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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1 성령강림후 22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0. 29. 10:41

    성서일과

    • 여호수아 3:7~17 혹은 미가 3:5~12
    • 시편 107:1~7, 33~37 혹은 시편 43
    • 데살로니가전서 2:9~13
    • 마태복음 23:1~12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OUsNjvTzhya2A6gcnNmE-GrjA7WDO7MI/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y0gWFPLH_Y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1

    가나안이 코앞에 바라다 보이는 모압 평지에 도착할 즈음 역할을 다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모세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혼돈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들어가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식으로 차려져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이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일곱 부족과 싸워 쟁취해야만 이스라엘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그들을 투쟁의 자리로 이끌어오신 셈입니다. 이기면 좋지만, 패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을 정복하기는 커녕 틈바구니에서 생존한다는 것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인데 지도자 모세가 죽었으니 어찌해야할지 답이 없습니다. 사십년을 여기만 보고 왔으니 이제는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이 무의미해지고 헛수고가 되고 형편이 되었으니, 그들의 불안은 극도로 치달았을 겁니다. 물론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진 새로운 지도자가 있기는 합니다. 여호수아입니다. 하지만 사십년을 함께 했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세에 비하면 여간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의 걸음이 요단강앞에 멈추어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중요한 결단을 해야할 시점입니다. 사십 년전에 홍해 앞에 섰던 때처럼 죽음만 보이는 내일을 향해 위로 뛰어드는 용기있는 믿음의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아니면 돌아설 것인지 선택해야합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이 물에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그들이 요단을 건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 모두가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을 건너기로 결단한 겁니다. 그들이 강을 건널 요단강의 물길이 끊어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건이지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나, 모세처럼 여호수아에게 입지전적인 능력이 있어 이제 백성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사건을 통해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뒤를 잇는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입증되었다고 있지만 언제나 성서기자가 우리의 손을 끌고 가는 곳은하나님 역사 개입,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강에 들어서는 순간 요단강의 물길이 끊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수아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 3:9b

     

    재미난 것은, 이스라엘 회중의 눈에는 지금 부터 듣는 이야기는 모두 여호수아가 하는 말로만 보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여호수아가 전한 모든 말을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담백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지금 목사인 제가 설교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말이 아닌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겁니다. 익숙한 신앙적 언어이지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까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경우는 드뭅니다. 여호수아는 덧붙여 하나님을살아계신 (10)이라고 소개합니다. ‘살아 계신다 표현은 바로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고, 그분이 헛되지 않은 실체라는 뜻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사건을 목격했으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있지 않느냐하기 쉽지만, 그런 현상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실재로 그런 일은 흔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이 없는 것이 일반적인 삶입니다. 게다가 그런 일을 경험하는 이들도 소수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계신다고 말했던 걸까요?

     

    2

    2독서 데살로니가전서 2 13절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칭찬과 격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 살전 2:13a

     

    교우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이건 모든 목회자들의 꿈일 겁니다. 저도 역시, 다른 어떤 것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가르치고 말하는 이들은 분명 바울이나, 사도들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들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일 있었을까요? ‘그냥 믿어라 식으로는 이상을 나아갈 없습니다. 설교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실재로 그렇게 믿는 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 결국하나님에 관한 말씀 들었을 ,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했음을 변명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자는 식이 아니라, 무엇이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하는지를 묻고 답해야만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제가 드리고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물음을 가지고 3독서 복음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독서에는 예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엄중한 비난이 가득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낯설기만 합니다. 실재로 23 13 이후를 보면 바리새인들을 향해화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되는저주 일곱번이나 쏟아내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죄를 저질렀기에 주님은 그들을 저주까지 하신 걸까요?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AD80 이후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때는 유대교의 분파인나사렛파 자리하고 있던 교회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했던 즈음입니다. 복음서 안에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난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교회 공동체가 유대교와는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늠할 있는 사실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분리하게 결정적 원인은 AD7세기에 발생한 유대전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대 전쟁이후에 성전은 훼파되었고, 로마군이 예루살렘에 상시 주둔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억압을 피해 바리새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이 오늘날야브네라고 불리우는얌니아라는 도시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들의 그곳에서 성전이 무너지고 사라진 오늘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 유대교를 어떻게 재건하고, 흩어지고 깨진 민족을 하나의 정신으로 묶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함께 하심을 경험했던 바벨론 포로기의 역사적 반성을 통해,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정경안에서 유대교 신앙의 동력을 찾았냈습니다. 성전을 대신해시나고그라고 하는 말씀을 강론하고 토론하는 회당이 그들의 신앙의 장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유대인이라면 정경안에 거하지 않는 삶은 용납될 없습니다. 말씀안에 들어와 있어야만 유대교인이며, 반대로 말씀 밖에 있다면 이교도일 뿐입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교회의 갈등을 심화시키게 됩니다. 가뜩이나 유대전쟁이 발발했을 방관자처럼 한걸음 물러선 바람에 유대교인들로부터 배신자로 단단히 낙인찍혔던 터였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며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복음 강조하고 있으니 율법을 가벼이 여기는 모습을 두고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를 박해하고,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공공연하게나사렛파 저주하는 기도문을 암송하게 했다고도 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미움과 증오, 배척의 대상이되고 말았지만, 놀랍게도 이런 핍박이 원인이 되어 유대교로부터 벗어나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애썼던 경건주의자들이었던 그들은 비난 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고, 실재로도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와의 분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읽어내야 합니다. 그들이 비난 받는 이유는 교회 공동체와 다른무엇때문입니다. 

     

    3

    1~ 7절까지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남에게 보이려는 열심인 사람들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권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깨어진 이들에게 신뢰를 주고 마음과 생각을 모아 하나의 유대교로 회복시키려면권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움 가득한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권위 필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그토록 중시하던권위 모두 부정해버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은 오히려 바리새파 사람들이권위 삼았던랍비아버지 같은 이들이 되어서는 않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들 본성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인정받고, 영향력이나 권위를 가지는 것을 성공이라 여기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나 선생님의권위 사라지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벼이 여기고, 학생이 선생님의 권위를 무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뻔합니다. ‘권위권한 더불어책임 포함하는 자연스러운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모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리가 없습니다. 

    이유를 주님은너희는 다 형제니라 말씀안에 담아주셨습니다. 형제를 대하듯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은 언제나무례함이나우쭐거림’, ‘폭력 기대게 됩니다. 사랑없는 권위는 권위주의 떨어질 밖에는 없는 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만적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4

    율법 아닌복음 믿는 공동체였음에도, 교회안에도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교적인 잔재가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우리의 교회안에도 이런 모습은 쉽게 발견됩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지금교회 조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하는 이들이 우리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었던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넜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주님의 말씀으로 삼고 살았던 교회는 믿음의 역사를 내려갔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오늘 교회는 자꾸만 바울이 그토록 경계했던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상실 모습처럼 보입니다. 대체 원인이 뭘까요? 넘치는 은혜와 조건없이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구원의 근거임을 믿고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루는 것임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죄인들을 증오하고, 스스로는 예수 아닌 다른 구원을 이루려 애쓰고 부러워하는 것에 천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믿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께 문제가 없으니, 우리 앎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모릅니다. 제대로 실감하고, 그렇게 말해 본적도 없습니다. 앎이 일그러졌으니 제대로 믿어 본적도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대로 산다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먼저듣는 필요합니다. 모세도 그러했고, 요단을 건너기 이전에 여호수아도 먼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열심과 신앙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먼저 말하고, 먼저 가르치고, 먼저 보여주는 것에만 익숙합니다. 유대교의 결속과 민족의 회복을 위한 길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조급함과 이것을 지켜내지 못하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하나님께 듣는 자리를 빼앗아 가고 말았던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용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앞에서 듣는 것에 서툴고 무르기만 합니다. 재촉하는 것은 말부터 하려는 이들의 마음인데, 우리는 하나님께 재촉합니다. 듣겠다고 했지만 실은 내가 바라는 것이나 내가 정한 답을 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답과 하나님의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듣는 마음일텐데, 우리는 듣는 자리를 벗어나 투정하거나 불평하는데 익숙합니다. 타박하거나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들어야할 존재이면서도 듣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듣는 자리는 오랜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자기 생각을 자꾸 비워내고 죽여야만 가능한 자리이며, 자신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높다는 생각이 있을라치면 들을 없는 것이 듣는 자리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하는 모든 이의 삶을 안에 받아줄 만큼 넉넉한 고수만 있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깨어지고 상한 우리의 거칠고 사나운 불평과 투정을 고스란히 들어내주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몫이었습니다. ‘듣는 언제나 하나님 뿐입니다. 

     

    5

    이제 설교를 마쳐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습니다.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의 자리를 마음에 담고 설교를 써내려가면서 찾고 있던 물음은, ‘어떻게 하면 그리 할수 있을까?’ 입니다. 어떻게 하면 들을 있고, 어떻게 하면 듣는 마음이 생기고, 어떻게 하면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얻을 있을까? 신통한 비법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주간을 씨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묵상했지만 그럴듯한방법 마땅히 떠오르질 않습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밥한끼 정성스레 밥상위에 내어놓지 못했다는 마음이 죄송스러워 설교문에 마침표를 찍을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도듣는 마음을 얻는 방법같은 것은 없다라는 말씀밖에는 수가 없습니다. 듣는 마음은 하나님앞에 서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듣는 존재라는 관계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하고 친해질 있는 방법이나, 사람을 믿을 있는 방법은 사람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함께 시간을 의미하는 , 생명의 근거가 주님께만 있음을 믿고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는 관계 가운데 있는 밖에는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요단강이 갈라지는 현장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만아멘 뿐이었고, 그리스도와 관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만 어떤 일들이 별볼일 없다여기는 사도들의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아멘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역시 바울과 같은 말씀을 드릴 밖에는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후반절입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 살전 2:13b

     

    듣는 마음이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관계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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