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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6/20 성령강림후 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6. 17. 11:09

    성서일과

          1독서 | 사무엘상 17:(1 ,4~11,19~23) 32~49 혹은 사무엘상 17:57 ~ 18:5, 10 ~ 16 혹은 욥기 38:1  ~ 11

            응송 | 시편 9:9~20 혹은 133 혹은 107:1 ~ 3, 23 ~ 32

          2독서 | 고린도후서 6:1 ~ 13

          3독서 | 마가복음 4:35 ~ 41

     

    설교음원

    http://naver.me/GxOS8wGa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prMDNpJo_c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Rembrandt, Christ in the Storm on the Lake of Galilee

     

    그가,  '누구' 이길래 ?

     

    1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날마다 풍성하고, 늘 흔들림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초대교회가 처해있던 현실의 상황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황제로 대변되는 로마의 영광과 기득권자들의 우쭐거림 틈바구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들의 신앙은 늘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애써 의미없는 길이라고 무시하고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아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현실의 모습은, 과연 이 길이 옳은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로 이어졌을 겁니다. 오늘 복음서에 제자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중에 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말그대로 미친 듯이 흉포하게 몰아치는 바람을 만났으니 꼼짝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어찌해서든 살아야한다는 필사의 몸부림에 두려움이 더해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황이 없습니다. 일순간 죽게 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평안은 산산히 깨어지고 정신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배위에 있던 이들이 누구입니까? 예수의 제자들, 소위 사도들입니다. 세상이 거칠게 몰아세우는 순간에 이르면 신앙이 있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형편없이 무너지는 모습은 그들이나 우리나 매한가지입니다. 세상의 힘 앞에 초라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생을 세상을 거스르는 치열한 싸움으로 본다면, 이런 식의 전투나 전쟁은 역시 믿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공부와 믿음은 별개였고, 믿음은 늘 먹고 사는 것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관계없는 것들일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외에 무언가 확실한 한방이 절실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기대하는 한방은 ‘돈’이 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바라보면, 오늘 1독서 계속본문인 사무엘서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혀 현실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때려죽인 장면입니다. 내심 믿음은 현실에서 통용될 수 없다 여기는 탓인지, 우리에게 이 사건은 마치 용과 싸운 전설속의 용사의 이야기나 신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현실에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저 다윗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마는 우리들이기에, 골리앗과의 싸움이야기는 늘상 다윗 개인의 영웅담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골리앗 앞으로 부르고 계시는 ‘다윗’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다윗과 다르다는 생각만 할 뿐, 다윗의 힘과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음에도, 우리는 오늘도 전쟁은 칼과 창으로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늘 칼과 창을 찾고 있는 걸까요?

     

    2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라는 말입니다. 칼과 창이 상징하는 것은 세상이 말해주는 살아가는 방식, 내일을 구원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그러무로 하나님의 구원은 창과 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것이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약속해주는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요?

     

    오늘 1독서 선택본문은 ‘욥기’서입니다. 욥기는 참 어려운 책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욥기를 읽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이유는 글 자체가 어렵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욥이 처해 있는 형편을 받아 들이고 보고 있는 것이 불편해서입니다. ‘이유없는 불행’,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말은, 곧장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나 자신의 상처와 아픔으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외면하고 성급히 다시금 욥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결론으로 달려가거나, ‘신정론’ 류의 신학적 해석을 언급하며 어찌해서든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해결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설명이나 해석을 가져다 붙여도, 이내 ‘다 알 수 없다’는 불가지의 한계에 이르고 말 뿐입니다. 정작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삶이라는 것이 온갖 아픔과 갈등, 상처,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가득한 무대라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욥기’의 내용들입니다. 아무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도 또 나만 불행한 것처럼 보여도 우리중에 누구도 일상속에서 욥이 처한 다 설명할 수 없는 낯설고 아득한 고난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나의 일’로 마주하지 않고 지낼 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고 죽음에 이르는 아이들, 전쟁의 포화속에 사라지는 생명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이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있는가? 경악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우리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절망에서 우리는 모두 자유롭지 않습니다. 백세에 이른 어르신이나 갓 태어난 아이를 가리지 않고 본질적으로 우린 모두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앞에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지만 절망스러운 우리의 실존입니다. 근원적으로 ‘무죄한 이’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 아득한 고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외면과 침묵, 부재의 경험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니 더 서럽고, 더 절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 이러신지를 따져물을 수가 없습니다. 아들의 부르짖음과 절규를 외면하셨던 하나님의 침묵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고난속에 내몰려 있는 것이 인류의 운명인 걸까요?

    ‘욥기’는 우리에게 이 질문앞에 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일 없는 것처럼 살고, 갑작스러운 불행앞에 허둥대는 우리 삶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마주라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아픔, 상처나 절망을 ‘악’이나 ‘심판’으로 여기고, 이런 현실이 자신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교리에 숨지 말고, 그런 현실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나오라는 발칙한 의문이 욥기가 가지는 참된 의미입니다.

     

    3

    욥기서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불행에 처한 욥과 그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친구들과의 설전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친구들이나 욥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들이 상대를 비난하거나 또는 항변하는 근거는 모두 ‘내가 생각하기에는’이라는 자신의 해석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고 방식입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제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앞에 신실했던 모습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업적을 쌓고, 잘 살아왔으면 환란이나 고난이 피해가거나 막을 수 있는 보답이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념이 담겨있는 겁니다. 하지만 죽음이 덮고 있는 이 땅에서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 업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친구들의 비난 앞에서도 당당하고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 외쳤던 욥이 일순간 할 말을 잃고 침묵합니다. 게다가 42장에서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정작 하나님 앞에 서고보니 갑자기 비굴해진 걸까요?

     

    폭풍이 몰아치던 복음서의 장면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혼비백산해 있던 제자들은 주무시던 예수님을 채근해서 깨웁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시냐?’고 꾸짖는 이도 있습니다.

    배 밖에 있는 이들이 눈에는 이런 폭풍에 사로잡혀 죽게 생겼다는 것은, 필시 그들 중에 ‘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식의 파도도 잠잠케 할 만한 믿음도 없느냐? 거나,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고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제자들의 탓으로 정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을 그들의 불신을 정죄하시는 것으로 읽으시면 곤란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풍전등화처럼 암담한 현실에 놓인 교회를 향해 ‘믿고 살라’는 촉구입니다. ‘믿어야 산다’는 것이고, ‘너희는 믿고 그리고 살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셨는데 믿음없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면 반대로 ‘믿음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구원에 이를 ‘믿음’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본문은 제자 공동체의 믿음없음이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랐다는 사실로 귀결시킵니다. 믿음의 실체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막 4:41

     

    주님이 폭풍을 잠잠케 하신 이후,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이 던진 말입니다. 복음서 본문의 핵심 주제가 이 질문안에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대체 누구이십니까?

    그가 누구이시기에?’라는 질문이 터져나온 것은,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안에서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안에 무언가 놀라운 하늘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겁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무관심하고, 무관심하면 질문하지 않고 지나치고 마는 법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무관심하거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 없음’이란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인 셈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얼마나 붙들고 있을까요? 

     

    4

    예수께서 어떻게 폭풍을 잠잠케 하신 것인지 궁금하신가요?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그런 초능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바람이나 파도, 폭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력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세우고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운명이나 신적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파도를 다스린다는 것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의 능력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공동체의 관심은 그 힘이 예수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신 겁니까?가 아니라, ‘대체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고 되물을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로마의 황제가 되었든, 이교도가 되었든, 이런 능력만 있다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런 모습이 아니어도, 저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셔야만 한다는 이유를 좇고 있는 겁니다. 돈만 된다면, 성공만 할 수 있다면 세속의 불의, 거짓에도 영합하는 오늘 교회의 모습은 무엇을 좇고 있는 것인지 분명해집니다.

     

    너희는 믿음이 없느냐?’는 주님의 물음은 ‘너희는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요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가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교회 공동체에게 이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설교 역시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요청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라는 비밀을 발견했는지 아닌지의 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안에서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구원의 능력을 발견한 사람은 믿음이 있으니 비밀을 아는 사람처럼 살 수 밖에 없고,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제 아무리 아는 척을 하고 화려한 것들을 드러낸다고 해도 비밀을 모르는 대로 살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주님을 향한 신뢰는,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라는 경험과 발견 위에서만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누구이시길래?’라고 되묻던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믿음이 회복되는 자리, 새로운 믿음이 싹트는 자리에 있는 겁니다. 이제 그들은 비로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할 대상이 폭풍이나 파도가 아니라 자신들 아에 있는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살려내시는 절대적 구원의 힘을 경외하게 된 겁니다. 주님의 비밀을 발견한 그들이 부럽습니다.

     

    5

    오늘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집채 만한 파도, 폭풍입니까? 아니면 경제 위기, 건강의 문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아닙니까? 지금 믿음이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람과 파도도 다스리실 수 있으신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 뿐입니다. 

    욥의 태도가 변화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근거와 시원에 대하여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욥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난과 환란 같은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몸부림치던 문제도 세월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물며 살고 죽는 실존앞에 서면 세상이 올무처럼 씌우는 모든 문제는 비로서 상대화되고 맙니다. 그래서 죽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십자가의 복음은 그래서 진리입니다. 모든 생각의 근원이 나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위대하신 하나님앞에서 비로서 욥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폭풍속에서 구원을 얻고 싶으십니까? 광풍과 죽음앞에서 자유와 평안을 얻고 싶으십니까? 참된 구원은 주님을 믿는 것, 다시 말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경험하는 순간 주어집니다. 그것이야 말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십시오. 이제 참되고, 유명하고, 살아있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기뻐하고, 부요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바울의 외침은, 그 동안 복음의 길을 걷는 그의 삶을 온갖 두려움과 부러움으로 위협하고 뒤흔들던 세상의 자랑들입니다.비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이제 바울은 자신이야 말로 세상이 부러워해야할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가져다 주는 능력, 주님이 누구이신지의 비밀을 발견한 이들의 믿음의 능력입니다. 광풍의 위협에서 유유히 벗어나는 생명의 능력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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