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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7 성령강림후 5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6. 23. 18:44
성서일과
1독서 | 사무엘하 1:1, 17 ~ 27
응송 | 시편 130, 30, 또는 예레미야애가 3:22 ~ 33
2독서 | 고린도후서 8:7 ~ 15
3독서 | 마가복음 5:21 ~ 4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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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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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평안' 을 말할 수 있습니까?
1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별 것 아닌 일에도 늘상 염려를 달고 사는 사람들을 향한 핀잔의 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지요.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또는 시작하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위로 철거중인 건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덕평 물류센터 화재 진압에 나섰던 김동식 구조대장의 가족들의 하늘도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던 우리에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삶의 낯설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충분한 위협이 되고 맙니다. 왜? 인간에게 이런 참담한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는 걸까요? 인류는 끊임없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왔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순전하고 가장 본질적인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이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종교’를 으뜸되는 가르침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오늘 복음서안에서도 우리는 쉽게 지나칠 수도, 뭐라 위로나 답을 줄 수도 없는 무거운 상황과 마주하게 됩니다. 차라리 죽음이 낫다 싶을 고통을 그렇게 매일같이 12년 살아온 한 여인과, 12살 꽃다운 나이에 떨어지고 만 소녀의 죽음입니다. 당사자들에게는 더 없이 끔찍하고 잔인한 상황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무래도 ‘죽음’이 더 안타깝고 고통스럽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둘 사이의 경중을 쉽게 비교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혈루증 앓던 여인 때문에 죽음앞에 선 소녀를 구하러 가는 길이 지체될 때 주님을 나무라고 재촉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고통에도 경하고 중한 차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얼마전 어깨에 생긴 염증때문에 심한 통증을 앓았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눈물이 날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만일 계속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면 삶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파괴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각 개인에게 찾아온 고통이란 누구에게나 치명적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경험해 왔을 12년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죽음 처럼 절망스러운 매일을 견뎌왔을 그녀의 인생이 잔인하다 싶기만 합니다. 하지만 역시 그렇다고는 해도 12살, 성년식을 치루어야할 나이, 이제 살아내야할 삶의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 채 떨구어진 죽음은 서럽기만 합니다.
3
고통은 그것이 어떤 모양의 것이든과 관계없이 ‘괴로움’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고통앞에서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일 없을 때는 몰라도, 고통의 현실앞에서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신속하게 무너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이 아닌, 낯설은 내일로 찾아오는 이런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나아가실 수 있을까요?
그리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도 정작 아쉬운 순간이 찾아오면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낯설은 오늘이 이빨을 드러내고 일순간 삶의 평화가 깨어지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기 보다는, 믿음을 팽게쳐버린 채 고통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입니다. 현실의 고난이 반복되어 갈수록 삶에 채워져가는 것은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다’는 원망과 체념 뿐입니다. ‘믿는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초라해지기만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져야하고,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소유와 소비중심의 탐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살아온 결과입니다. 이런 세계에 빠지게 되면, ‘지금’이라는 것은 언제나 ‘불행’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고난과 고통같은 문제가 찾아왔을 때, 문제가 없어지거나 해결되고, 어려움이 사라져야만 나아질 수 있게 된다는 생각도 사실은 결국 동일한 덫에 빠져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4
만일 우리가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고난이 찾아왔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처한 상황에서는 또 어떨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 믿음은 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까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주님의 말씀에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해 이미 소녀가 죽었으니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는 없는 것’이라고 조롱하지는 않을까요?
혈루증 걸린 여인과 예수님의 동선에는 묘한 공통점과 또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모두가 너는 부정한 여자라고 말하고, 열두 해나 그러했으니 이제는 틀렸다고 했을 핀잔을 뒤로한 채,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저분이라면, 저분의 옷이라도 붙잡으면 낫지 않을까’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주님도 그런 조롱의 벽을 뚫고, 죽음이 가득 덮인 방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한 걸음을 내디딘 여인은 치유를 얻었고, 모두가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체념한 현실의 벽을 밀치고 나아가신 주님으로 인해 소녀는 살아났습니다.
5
‘달리다쿰’! 소녀의 곁에 서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람어로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정말 소녀가 잠들어 있는 것처럼, 마치 잠들어 있는 어린 딸을 깨우려는 아버지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가 곁에 있었다면 ’이미 죽었다구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말았을 겁니다. 괜한 망신을 자초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문을 읽다보니 한편으로는 서러운 생각이 듭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이 기사를 통해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을 수 있었음에도,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잠을 자는 것과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이 깨워낼 수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선언’ 보다는 그럴 수 없다는 ‘세상이 전하는 말’이나, 나 자신의 의지를 결론으로 삼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을까요.
소녀를 부르시기 이전에 주님이 먼저 하신 행동을 주목해 보십시오. 주님은 먼저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는 소녀는 정말 잠자고 있던 것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주님의 믿음은 늘 일치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앞서 누군가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던 혈루증 앓던 여인의 행동입니다. 여인과 주님께 공통된 모습입니다.
‘손’을 내민다는 것은, 이미 파괴와 고통이 현실이 되어버린 삶을 저항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가능한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 때, 비로서 우리 자신도 삶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파괴하려는 세상의 모든 선언을 무효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이어지는 겁니다.
6
주님을 만났던 여인들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음’을 선물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혈루증 앓던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었습니까? 병이 나은 그녀에게 먼저 주님은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히’ 라는 말은 헬라어 ‘에이레네’라는 말로, 히브리식으로는 ‘샬롬’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미 그녀가 ‘병’이 나은 뒤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이 평안을 그녀에게 주신다는 것은 ‘병’에서 낫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살아야할 그녀의 삶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샬롬’으로 초대해주신 겁니다. 그러고보면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는 ‘샬롬’이 깨어져있었습니다. 늘 소외와 불안, 고통이 삶을 채웠습니다. ‘너는 이미 틀렸다’, ‘너는 부정한 여인이다’라는 사람들의 평판은 그녀의 영혼을 절망에 가두고, 하나님께로 조차 나아갈 수 없도록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구속이 오래되면, 마치 그것이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스스로를 그런 절망에 가두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샬롬’은 이스라엘의 인사말 입니다. 만나는 이들마다, 처해진 상황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샬롬’의 인사를 나누며 살아왔을까요? 그리고 역사속에서 그들은 언제 ‘샬롬’을 외쳤을까요?
사실 ’샬롬’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지나온 역사의 고통과 절망 앞에서 잔인한 삶을 향해 던진 신앙적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평안이나 평화를 원하는지 고민해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샬롬’은 삶이 이렇게 황폐하고 잔인하여도, 아니 그러므로 오히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 같은 평화를 갈망한다는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 맞습니다. 샬롬은 평화할 수 없는 현실의 땅, 신음하고 눈물흘리는 이들의 삶에서 고백되는 것입니다. 비록 병은 나았지만, 본질적으로 그녀는 여전히 죽음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빛되신 주님의 샬롬이 그녀의 인생에 선포되었으니, 그녀는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으신 샬롬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퍼런 어둠에 삼키워지지 않도록 구원해 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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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요? 과연 누가 현실의 힘을 가로막고, 어둠에 저항하며, 죽음의 힘 앞에서 ‘하나님의 평화’인 ‘샬롬’을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과 고통에 짓눌리고 억압당하고 있는 이들 앞에서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샬롬’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폭력과 억압앞에 차별을 당하고 소외와 절망으로 내몰려 있는 이들의 곁에서 ‘샬롬’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세상을 덮고 있는 죽음의 힘앞에 모두가 굴복하고 있는 시대를 가로막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으신 ‘평안’을 선물로 가져다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바로 그분이십니까?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할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샬롬을 선물하시기 이전에 그녀에게 주셨던 놀라운 선물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향해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부정한 여인’, ‘버림받은 여인’, 제 자신도 포기한 가련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로 초대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딸이라는 뜻의 헬라어 ‘튀가테르’(θυγατέρ)라고 부르신 유일한 대목입니다. 적어도 그녀는 지금 주님의 눈에 유일한 단 ‘한 사람’이 된 겁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유대 회당장의 딸과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려던 마가의 장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지금 가장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병에서 낫고자, 혹은 삶의 절망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더 이상 내쳐지면 어찌할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소외시키고 버린 불행한 여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하나님의 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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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 하나님의 딸로 부름을 받은 여인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용납해 주셨으니, 앞으로는 ‘너는 부정하다’거나, ‘너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세상과 사람들의 평가에 갇혀계시면 않됩니다. 그런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스스로를 절망의 감옥에 가두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무엇을 이루고, 어떻게 해내야만 한다는 거짓된 강요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의 초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 주님의 아들과 딸로 부르신 음성을 듣는 것 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부정하다 손사레 치는 피흘리는 몸을 이끌고 혈루증 앓던 여인이 주님앞에 나아간 것처럼, 연약하고, 상하고, 때로는 깨어진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참된 ‘샬롬’,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뿐입니다.
더 이상은 거짓된 평화를 말하며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세상의 조롱에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을 삶의 선물로 주시기 위해 우리를 아들과 딸, 자녀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살아가십시오. 구원하는 길은 오직 주님안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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