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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4 성령강림후 6주 *맥추감사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6. 30. 12:25
성서일과
1독서 | 사무엘하 5:1 ~ 5, 9~10 혹은 에스겔 2:1 ~ 5
응송 | 시편 48 혹은 123편
2독서 | 고린도후서 12:2 ~ 10
3독서 | 마가복음 6:1 ~ 1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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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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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을 ‘자랑’ 할 수 있습니까?
1
1독서 계속 본문인 사무엘서는 다윗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내일을 위협하던 사울의 죽음 이후, 다윗이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북왕국 지파의 지도자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추대함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있던 이스라엘을 통일하는 명실공히 통일 왕국의 진정한 왕이 됩니다. 덧붙여 성경은 다윗이 점점 강성해져 갔다고 평가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의 삶이 형통해 졌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응송인 시편말씀은 ‘시온’에 관한 노래입니다. ‘시온’은 야트막하고 작은 구렁 같은 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작은 시온을 자신이 머무실 곳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니 이제 어느 누구도 시온을 넘볼 수 없습니다. 불가침의 평화가 시온의 상징이 되었고, 예루살렘에 임하는 평화와 영광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온 것, ‘하나님’ 덕분입니다.
2
2독서 서신서는 바울이 복음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삼층으로 이루어진 하늘을 경험하고 왔다고 하는 어떤 사람의 신비롭고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울 자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천국에 다녀왔다거나 지옥을 보고 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경험에 놀라고 덧없이 부러워하지만 성경에서 읽게 되는 이런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제 하늘이 일층, 이층 , 삼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을 사람은 없게 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올라 보게된 하늘은 그저 비어있는 대기일 뿐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모르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천년전에 기록된 글이라는 사실을 염두해야만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은 이런 땅과는 다른 미지와 신비의 영역,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의 ‘하늘’에 대한 경험은 세계 너머, 일상의 저편에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그에게 일어난 이런 경험은 작은 꽃 한송이 속에서 우주를 보게 되는 것 만큼이나 놀랍고 아득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바울이 세번이나 주님께 치유를 간구해야했던 육체의 가시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3
3독서인 복음서의 이야기는 두 가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이틀을 머무시던 주님께서 이제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목적지는 고향 나사렛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여간 뜬금없는 결정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내 어미고 형제’(막 3:35)라고 하시며 당신을 찾으러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외면하셨던 것이 얼마전의 일이었습니다. 괜시리 어머니를 홀대했던 것이 영 미안하셨던 걸까요? 하지만 고향을 찾은 예수님과 일행은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지 못합니다.
이미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좇고, 병든 이들을 고치셨으며, 심지어는 죽은 아이까지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이곳까지 들려왔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여간 시원치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마가복음 6: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놀라운 일을 드러내셨음에도 주님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바알세불에게 지폈다는 서기관들의 거짓말에 속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를 잘 아는데, 그럴리 없다’는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갑작스레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전도 여행을 위해 지팡이 외에는 양식, 배낭,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고, 신만 신되 두벌 옷도 가지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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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데는 두려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동들은 소문에 들어왔던 대로 평범하고 똑같던 일상을 거스르는 파격적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그의 제자들 중에는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이들도 있습니다. 칼을 들고 다니던 베드로나, 우뢰의 아들로 불리우던 야고보나 요한, 그리고 유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현실을 거부하고, 세상을 전복하려는 불온한 모습에 사람들은 불안해 하기 마련입니다. 가까운 이웃 마을인 세포리스에서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로마에 의해 이천명이나 되는 이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일도 있습니다. 이런 소문은 트라우마 처럼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것처럼, 조마 조마 합니다. 괜시리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과 한 패거리로 몰리게 되면, 혹은 예수의 고향이라는 것이 그들의 은거지로 오해라도 받게 되면 말그대로 끝장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 달리 그것도 주님께서 직접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도 귀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제자들도 답답했을 겁니다. 주님의 곁에서 일어난 그 놀라운 일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왜?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빈다. 그때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서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자신이 고향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귀한 것을 전하고, 복된 것을 나누니 어디를 가도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따위는 버리고, 마음을 단단히 하라는 당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런 길입니다. 한 나라가 세워지면, 다른 나라는 무너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된 소식이지만, 지금 붙들고 있는 제 삶과, 제 나라를 무너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독서 선택본문인 에스겔서의 말씀이 겹쳐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고 뻔뻔해서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고발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지만 그곳에는 듣는 이도 있고, 듣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마음을 참으로 부끄럽고 쓸쓸하게 만듭니다.
왜? 주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대를 환영하지 않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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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말씀하셨던 그 때, 사실 우리 마음도 불편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지라고 허락하신 것들이 모두 ‘겨우 이까짓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실망과 배신감이 ‘예수를 따르려면 이렇게 가난하고 궁상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푸념으로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신앙의 길이 결국 이런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이건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건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 처럼은 아니더라도 남 부럽지 않을 만큼은 살 수 있기를 기대했고, 거창하지는 않아도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대접은 받으며 살 수 있기를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고, 돈도 필요하고 먹고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가치가 무엇을 좇고 있느냐는데 있습니다.
사실 1독서나 응송 말씀을 읽을 때,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정말 사무엘 기자의 말처럼 왕이 되고,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해지고, 시편 기자의 노래처럼 침략당할 일이 없는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그런 것들일까요?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복’이나 ‘행복’을 가늠하고 평가내리는 삶을 강요당하고 또 거기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그래서 늘 본과 말을 혼용하거나 혼돈한 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에는 무관심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기쁨과 자유가 무엇인지에 무지할 뿐입니다. 자꾸만 그런것들을 복으로 삼고 하나님을 대신한 채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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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삼층의 하늘을 경험한 것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다른 어떤 것도 자랑의 이유가 될 수 없으니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어떤 것도 비굴하거나 부끄러움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육체의 가시’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자랑합니다.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 눈에는 불행하고 절망스러운 모습일 뿐입니다. 바울이 헛소리를 하는 걸까요?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12:9
우리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바울의 말을 쉽게 착각하곤 합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라고 찬양하지만, 강해지고 부요해진 내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늘 헛발질을 하고 맙니다. 송명희 시인이나, 이지선 자매나, 온갖 시련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칭찬하지만, 나를 그리 살기 싫은 것이 속내입니다. 주님 말씀과 달리 먹을 것이나 쓸 것, 전대에 담아둔 돈, 내일을 준비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대신하는 속절없는 헛헛함이 삶을 채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소망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통렬하게 직면하게 될 때, 비로서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앞에 손을 내밀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무너지는 십자가 아래에서 내 몸부림과 욕망 때문에 보지 못하고 닿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에 닿고,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일체의 비결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먹고, 만족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강력하게 체험하는 순간은 물질적 소유가 최소화되고, 주님만을 신뢰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맘몬의 유혹을 뿌리칠 때, 비로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 믿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제 눈에 의지하고 제 생각에 사로잡혀 주님을 배척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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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병든 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의원인 것처럼, 자신은 죄인들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날 수 있던 곳은 늘 사람들이 외면하고, 세상이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의 곁입니다. 그곳을 찾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이 환호할 것들이 아닌, 약한 자신을 자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상처와 아픔과 절망과 두려움을 보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일어 서도록 도우시는 그리스도를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우리는 양식이나 배낭, 전대에 넣어두는것은 고사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을 돈도 넉넉치 않아 근근히 살아내야하는 소외 받은 이들의 삶을 ‘나는 그리되고 싶지 않다’며 거부해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감격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먹을 것이나 필요를 채워주니까 어머니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길 때 경험하게 되는 평화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스스로의 삶으로 일치화했던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가라하시는 곳이었습니까? 세상이 ‘오라’ 하는 곳이었습니까? 하나님만을 자랑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까?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습니까? 삶의 기쁨과 자랑이 ‘주님의 것’이었습니까, ‘주님’이었습니까?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한해의 절반을 지나온 시간,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보잘 것 없고 깨어진 것처럼 보이는 삶이었지만, 말 구유같은 내 삶에 찾아와 계신 그리스도, 질그릇 속에 채워진 보화처럼 찾아와주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자랑이 되는 놀라운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이기는 구원의 능력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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