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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4 성령강림후 7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7. 8. 17:42
성서일과
1독서 | 사무엘하 6:1 ~ 5, 12b~19 혹은 아모스 7:7 ~ 15
응송 | 시편 24 혹은 85:8 ~ 13
2독서 | 에베소서 1:3 ~ 14
3독서 | 마가복음 6:14 ~ 2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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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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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지심’일수도 있지만, 작은 미자립교회 목회자이기에 경험하게 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우연치 않게 오랜만에 마주치게 사람들에게서 ‘요즘 괜찮으냐?’, ‘어렵지는 않느냐?’는 식의 똑같은 질문을 받을 때입니다. 질문을 받기 이전까지는 그들의 기억 밖에 있던 사람이었다는 씁쓸함 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는 전혀 관계 없이 이미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선입견이 더 불편합니다. 함께 하는 교우들의 섬김과 헌신에 감동하고, 기적같은 매일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실감하는 기쁨이 깊어가며, 개인적으로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부산함과 강박에서 벗어나 말씀의 깊음에 천착할 자유와 영혼의 평안을 누릴 수 있으니 사실 이보다 복된 시간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속내를 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인지, 어쩌면 보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독서는 타자에 대한 오해와 무례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던, 현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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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본문은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를 모시고 온다는 것은 이제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적 권위를 부여받고 참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하지만 섣부른 조바심에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기에, 다윗의 마음은 조마조마 했을 겁니다. 또다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부덕한 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오벧에돔의 집에서부터 예루살렘 다윗성까지 이어진 여정이 성공적으로 마쳐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은 셈이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사람들 앞에서 속옷이 풀어 헤쳐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다는 본문의 기록을 통해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 뿐만 아닌 온 성읍에 희열과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남녀를 무론하고 모든 백성에게 떡 한개와 고기 한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을 나눠줌으로 기쁨에 초대했고, 온 나라가 잔치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이 잔치에 소외되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내였던 왕비 ‘미갈’이었습니다. 그녀는 왜 이 기쁨에서 소외되었던 걸까요? 나팔소리와 환호소리가 들려올 때 미갈은 왕궁 창가에서 행렬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행렬의 앞에서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른 채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는 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다윗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불편해지고 얼굴이 찌푸려집니다. 역시 미천한 목동 출신이라는 것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처럼 보입니다. 왕이 되었지만 천한 근본까지 어찌할 수는 없다는 듯 미갈은 다윗을 깔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기쁨에 참여하게 된 언약궤가 돌아왔다는 동일한 사건앞에서, 유독 미갈의 마음은 깨어져있습니다. 모두의 기쁨 가운데서 그녀를 소외시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기쁨에서 소외되고 가시를 쏟아낸 결과 그녀의 삶은 저주로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을까요?
우리는 지금 다윗이 춤을 추고 있는 곳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라고 했던 성서기자의 표현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모두가 기뻐할 때 ‘미갈’이 놓친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언약궤와 그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다윗의 천박함 뿐입니다. 맘에 들지 않고,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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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은 응송인 시편 24편에서도 이어집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들을 초대하는 노래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여호와의 산’이라고는 하지만 실재로는 별 볼일 없는 빈산, 무너지고 황폐한 야트막한 언덕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여호와의 산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아무리 가장 작은 언덕도 여호와의 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에베소서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해야하는 당위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이야 말로 이런 신령한 복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말이 좋아 하늘에 있는 복이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무의미하고 허망한 선언일 뿐입니다. 배고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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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는 놀라운 진술로 복음서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한 곳마다 귀신이 좇겨나가고 병자가 고침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열광하는 예수님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마가가 덧붙이는 이야기는 곧장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닌, 세례자 요한에게 일어났던 참담하고 참혹했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대체 헤롯과 세례요한의 이야기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헤롯왕으로 기록된 헤롯 안티파스는 타고난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기대어 이스라엘의 분봉왕이되었지만 이방 땅인 이두메(에돔) 출신이라는 사실이 늘 그의 정치적 입지와 야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좋은 가문과 신분을 얻는 길 뿐입니다. 그가 동생인 필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헤로디아 또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남편을 버리고 헤롯의 아내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이제 탄탄대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앞을 가로막을 자는 없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고 꾸짖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운줄 알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치는 소리입니다. 마치 세상 모두가 알게 될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그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화들짝 놀란 헤롯이 급하게 그를 잡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요한을 당장에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매혹적인 춤으로 잔치의 흥을 돋구어낸 탓에 기분이 좋아졌던 헤롯은 사람들앞에서 딸 ‘살로메’에게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맹세를 했던 것이 화근이되고 말았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구했던 소원은 은쟁반에 담은 세례자 요한의 목이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오리라 상상조차 할수 없는 끔찍한 일입니다. 눈엣가시인 요한을 제거하고 싶던 그녀의 어미 헤로디아가 사주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기까지 헤롯의 행동은 마치 자신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요한을 죽일 수 밖에 없던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을 살해한 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음을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애당초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던 그의 맹세 자체도 무효였습니다. 당시 그 땅을 통치하던 것은 로마 황제였고, 더 나아가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맹세였으니, 잔악하고 사특한 요구를 터무니 없다고 거부할 수 있었음에도 헤롯은 불의한 요구에 마지못해하며 자신의 선택권을 떠넘긴 겁니다. 등을 긁고 싶었는데 때려준 격입니다.
이 참담하고 기가막힌 사건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답답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오실길을 곧게 하며 하나님 나라로 회개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던 시대의 개혁자 요한이 악인들의 음험한 음모에 의해 허망하게 죽임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한의 죽음이 곧장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우울한 복선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제야 예수님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주님도 세상에 의해 요한처럼 허무한 죽음앞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길은 늘 악인에 의해 깨지고 상처입고 좌절당하는 현실앞에서 우리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늘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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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윗과 미갈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너머의 미갈의 시선이 아닌, 요한이나 예수의 시선으로 보면 비로서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 요한은 입을 다물지 않는 한, 헤롯이 자신을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유력자들에 의해 해코지 당할 것 알고 계셨습니다. 실재로 여러번에 걸쳐 살해 위협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예수님은 살해를 당하신 것이 아니라, 어둠에 속한 이들의 사특하고 잔혹한 속내를 들춰내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작 헤롯앞에서 목이 잘리기 전에 요한이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십자가 앞에서 예수는 또 무엇을 보고 계셨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돌에 맞아 죽어가던 참혹한 살해의 현장에서도 스데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일이었던 것처럼, 제3자로 떨어져 있는 한, 마치 창문 너머로 미친 듯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있던 다윗을 무감하게 내려다 보던 미갈처럼 우리는 의인들의 죽음이라는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외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을 따라야하는 제자임에도,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하는 운명앞에 드리워져있는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안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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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 헤롯은 제 자신안에 감추고 있던 탐욕이 세상에 폭로되는 수모를 겪고 말았습니다. 그를 죽였으니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모두 치워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예수의 등장로인해 자신이 무참히 살해했던 요한은 그에게 더 생생하기만 합니다. 탐욕을 이루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지만 불안하기만 했던 그와는 달리, 예수의 이름이 곳곳에 드러날 수록 의로움의 빛에 참여하며 살았던 세례 요한의 걸음은 빛을 더해만 가게된 겁니다. 당신께 이어져있는 자녀들을 억울함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마침내 드러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제야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엡 1:3 (새번역)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율로기아의 단어 자체가 ‘좋은’이라는 뜻의 ‘eu;’와 ‘말’, ‘말하다’라는 의미인 ‘logi;a’의 합성어라는 겁니다. 결국 ‘복’의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율로기아’ (eu;logi;a)가 ‘찬양’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찬양’하는 것과 ‘복’을 비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높인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복이 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찬양은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만이 주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됩니다. 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에 따르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는 누릴 수 없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늘의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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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보면 이적을 행하시고 난 이후,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알리지 마라고 엄히 당부하시는 대목을 보게 됩니다.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더 소문을 내거나 드러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은데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드러나시게 되면, 분명히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뉘게 될 겁니다. 믿고 참여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읽은 에스겔서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도 듣는 이가 있고 듣지 않는 이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곳에 있음에도, 그의 나라가 지금 임하였음에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들은, 삶을 뒤흔들고 불편하게 하는 위험요소라 여겨 공격하고 말 겁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아무리 드러내고 보여주어도 좋은 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길가나 가시덩쿨, 자갈 밭같은 땅도 있는 것처럼, 결국 듣지 않고 보지 않는 이들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보는 이들에게만, 듣는 이들에게만 드러나는 은밀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으로 인해 이미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신하고 거부합니다. 그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삶을 통해서만 은밀하게 존재하고 드러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렇게 경험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세상과 사람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다만 보지 못하는 자는 볼 수 없고, 보는 자는 기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은밀하게 임하여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주의 재림의 날까지, 불법과 죽음이 왕노릇하고 있는 이곳에 은밀한 방식으로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 온 힘을 다해 잇대어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의 역사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 요한 처럼, 바울 처럼, 늠름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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