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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8/01 성령강림후 10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7. 28. 09:13

    성서일과

    •       1독서 | 사무엘하 11:26 ~ 12:13a 혹은 출애굽기 16:2 ~ 4, 9~ 15
    •        응 송 | 시편 51:1~12 혹은 78:23 ~29
    •       2독서 | 에베소서 4:1 ~ 16
    •       3독서 | 요한복음 6:24 ~35

     

    설교음원

    http://naver.me/xyUiTQbU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 방송시스템 에러로 영상이 업로드 되지 않았습니다

     

     

    일용할 '오늘'을, 삽니다

     

    1

    사람은 무엇을 먹으며 사는 걸까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라고 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꽃은 하늘 가득한 햇볕을 먹으며 자라고, 지렁이는 흙을 파먹으며 삽니다. 그런가 하면 돼지는 또 돼지가 먹을 것을 소는 소가 먹어야 하는 여물을 먹고 삽니다. 물에 사는 것이든, 공중에 사는 것이든 저마다의 먹거리를 먹고 사는 것을 보면, ‘저가 먹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된다’는 말이 정말 그렇지 싶습니다.

    인간이 푸성귀를 먹을 수 없고, 여물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우리는 그 동안 으레 밥만 먹으면, 돈만 벌면, 시간이 지나면 절로 사람이 되는 것인줄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인간이라면 먹어야 할 것, 인간답게 살고, 인간이 되기 위해 먹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짐승이 먹어야할 것들을 먹고, 제 욕망을 채우다보니,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쓰고는 있지만 짐승같은 기형적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말았던 겁니다. 

     

    과연 이것이 사람이란 말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인면 수심의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런 우리의 자화상은 자꾸만 인간에 대한 절망을 키워갑니다. 인간은 무엇을 먹고 ‘인간’이 되는 것’인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무릇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먹어야만 삽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자신 밖에 있는 무엇인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엇을 먹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 '무엇에 스스로의 생명을 의지하고 있는?'라는 물음에 이어집니다. 지금껏 우리는 무엇을 먹고, 또 무엇에 스스로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었을까요?

     

    2

    복음서 말씀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속에 긴장감이 베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가버나움까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을 다시 뵙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들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역력한데, 의외로 그들을 맞으시는 주님의 얼굴은 그들 만큼 밝지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요 6:26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제삿밥에만 욕심을 내는 모습에 주님 마음이 탐탁치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동기가 불순하다고 책망하시는 모습이지만, 사실 먼저 그들에게 떡을 주시고 배부르게 하셨던 분은 주님이었습니다. 제 힘으로 서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시는걸까요? 그도 아니면, 이제는 그들이 안타까워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떡을 주실 수 있는 분에게 떡을 구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는걸까요? 배고픈 이들이 떡을 찾는 것은 잘 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표적을 보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정작 보아야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만 찾고 있으니 답답하셨던 겁니다.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이라는 말로 번역된 ‘표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향하고 바라 볼 수 있도록 하고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까닭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보게 하려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 그것을 통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삶과 존재의 목적 자체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당신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식이라면 먹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직 배를 채워줄 빵으로만 보였던 겁니다. 정작 하나님을 주목하라고 베푸신 기적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놓치고 만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아닌, 빵을 보여주고 말았으니 답답할 노릇인 겁니다. 

     

    3

    주님의 마음이 불편했던 두번째 이유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27a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일하는 너희에게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 주어졌다는 초대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반문합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배고픔과 굶주림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현실의 두려움이 되고보면, 마음은 온통 '내 것'으로 삼고 싶어하는 소유에 대한 집착에 의해 사로잡고 맙니다. ‘내일은, 다음 날은 어떻게 것인가?’라는 물음은 자꾸만 내것으로 쌓아두고 소유해야 한다고 부추김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봄날 흐드러지게 핀 꽃이라도, 내일도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굳이 꺾어서 가지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입니다. 소유욕은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주님은 분명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먹으라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해내겠다고 들먹였지요? '자신'에게만 집중하다보니 결국 ‘자기 의’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이런 조급함은 곧 스스로 또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이어지고 마는 법입니다. 이런 삶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없습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기억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광야에 내던져진 이스라엘이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먹거리 삼아 살았던 것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인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살아가곤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내 힘'으로, '내 수고함'으로 살아냈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니 감동과 감격은 실종되고 삶이 수고롭고 거추장스러운 짐으로만 여겨지게 되는 겁니다.

     

    4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 29

     

    ‘하나님의 일’이라도 해내겠다는 그들의 오만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 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앞에서 머쓱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로서는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영생을 위한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내일을 위한 양식을 위해서도 이처럼 수고하고 애를 쓰면서 살고 있다 생각해보니,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이 실감이 날리가 없습니다. 한껏 힘을 주고 있었는데 맥이 풀리고 만 셈입니다. 불편한 마음속에서 ‘겨우 믿는 것 뿐이야?’라는 생각이 일어나지만, 정작 하나님을 믿는 것이 또한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믿는다는 것,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드리는 것’ 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고 거절할 때가 많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인정하여 드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 내 인생과 삶을 의탁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크지 못할 만큼 짜부라져 있습니다.

     

    5

    결국 우리는 주님이 빈들에서, 산위에서 보여주셨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내 삶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보라고 주신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 이 말씀을 먹을 수록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이 우리안에 예수생명이 솟아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꾸만 떡광주리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고, 표적이 가르키고 있는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통해, 내 삶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믿음이 드러나게 될까요?

     

    구약 1독서 선택본문인 출애굽기에는 ‘만나’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을 살려내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 출 16:4

     

    만나를 거둘때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날마다 일용할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은혜의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지만, '일용할 양식'만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날마다’ 그러니까 ‘내일’도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시험은 쉽지 않습니다. 내일을 위해 쌓아두는 사람들을 탐욕스럽다 비난하지만, 정작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광야’에 던져지고 나면 우리도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오늘 내린 만나에 자족하며 손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내일의 ‘굶주림’이 두려움이 되고 마는 우리 본성과 맞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도 말씀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만나를 몰래 빼돌리고 쌓아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남들과 달리 스스로 똑똑하다 싶었겠지만 그렇게 귀했던 만나는 어김없이 다음날에는 썩어 악취가 나는 골칫덩이가 되고 맙니다. 

     

    6

    ‘만나’라는 이름 뜻이 ‘이것이 무엇일까?’라고 합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오늘 내 손에 들려진 ‘이것’이 놀랍기만 하다는 감탄인 겁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척박한 광야에서 생명을 이어주는 만나가 그렇게 고맙고 특별할 수가 없습니다. 단, 유효기간이 ‘오늘’뿐이라는 사실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매일 아침이 놀라움으로 가득차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영락없이 굶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밤마다 ‘내일도 만나가 내릴까?’라는 의심을 안고 불안에 몸을 맡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가보니 어김없이 지천에 만나가 널려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외쳤을 겁니다. 틀림없이 ‘오늘’은 살 수 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오늘’이기도 하고, ‘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오늘’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위에 우리는 늘 불평과 불만과 한숨과 억울함의 오명을 뒤집어 씌워왔습니다. 하루치 밖에 않되느냐고 볼멘 소리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릴 없이 지나치고 말 것처럼 가볍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도, 앞으로 나아갈 걸음도 모두 ‘오늘’을 살게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깨닫고 보면, 우리는 만나에 불만족하고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께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오늘’을 살게 해주셨다는 감탄으로 이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럴 때 일용할 양식을 왕의 잔칫상처럼 누리고, 그저 그런 오늘이 하나님이 살게 해주셨으니 누구도 해칠 수 없고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핵심도,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오늘’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 32절

     

    모세가 ‘그들에게’라고 해야 맞는 표현임에도, 모세의 때에 내렸던 만나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부러 ‘그들’이 아닌 ‘너희’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생명의 떡이 되시는 당신의 말씀안으로 초대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의 때에 하늘에서 내렸던 ‘만나’도, 광야 빈들에서 주님이 먹이셨던 ‘오병이어’도 모두 ‘오늘’을 구원하시고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적일 뿐입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우리는 그저 ‘오늘’을 살아야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을 삽니다. 종말을 오늘로 끌어안고, 오늘을 종말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더 부족할 것도, 더 넘칠 것도 없는 복된 날로 우리의 ‘오늘’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7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 본성은 무엇이라도 채워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꾸만 채우고 싶고,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탐욕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문제는 정작 무엇을 채워야할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이것 저것 많이도 집어 먹게 됩니다. 배를 채우려 하고, 그도 않되니 명품으로, 돈으로, 지식으로, 권력으로, 명예로, 심지어는 헛헛함을 채우려고 종교적인 열광주의에 사로 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채워질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먹어야할 할 진짜 음식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두려움에 내몰려 자꾸만 이런 것들에 의존하다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떡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음에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몸부림쳤던 다윗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 사람들에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이어지고, 하나님께 의존되는 배고픔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배고픔이 있는지 질문해 보십시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처음 누우셨던 곳이 ‘구유’였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구유는 밥통입니다. 외양간에 있는 짐승이 먹어야 할 밥통에 주님이 누우셨다는 겁니다. 소나 돼지 처럼 죽음앞에 무력한 짐승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우리를 참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사람이 되기 위한 사람먹을 양식이 되기 위해 보냄을 받으신 겁니다.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예수님이야 말로 생명의 빵이라는 이 사실, 그를 먹고 마시면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목숨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선물 같은 하루로 믿으며 '오늘'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하며 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먹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주님과 연결된 ‘오늘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을 구원하시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 우리 삶에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일용할 오늘’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적이 주어졌으니, 하나님께서 넉넉히 지켜내실 것을 믿으며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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