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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9/05 성령강림후 1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9. 1. 23:53

    성서일과

    • 1독서 | 잠언 22:1 ~ 2, 8 ~ 9 , 22 ~ 23 혹은 이사야 35:4 ~7a
    •   응송 | 시편 125 혹은 146
    • 2독서 | 야고보서 2:1 ~ 10, (11~13), 14 ~ 17
    • 3독서 | 마가복음 7:24 ~ 37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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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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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9/05 성령강림후 15주 설교 | 동녘교회

    | '낯설은 사람들, 낯설은 주님' | 성서일과 1독서 | 잠언 22:1 ~ 2, 8 ~ 9 , 22 ~ 23 혹은 이사야 35:4 ~7a 응송 | 시편 125 혹은 146 2독서 | 야고보서 2:1 ~ 10, (11~13), 14 ~ 17 3독서 | 마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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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설은 사람들, 낯설은 주님

     

    1

    인간은 생명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후로 늘 스스로를 지켜야하는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낯설은 상황이나, 낯설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틈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낯설음’이란 자신의 통제력 밖에 있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늘 불편하고 불안한 대상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은 새로움이나 낯설음을 거부하고 자신에게만 집중한 탓에 관계의 지평이 확장되고 넓어질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사라졌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를 차별’하고 마는 거친 폭력성을 드러낼 만큼, 우리들 마음의 크기는 보기 흉하게 짜부라져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391명의 낯설은 이웃들이 우리 땅을 찾아왔습니다. ‘생명’의 가치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우리 자신에게 기꺼이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품을 내어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들을 환영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을 받아준 한국사회에 감사하고 앞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기사의 끝에는, ‘눌러 앉아 살려고 했느냐’는 등의 비아냥이나 ‘이슬람’사람들은 모두 폭력적인 ‘테러스리스트’라던가, ‘탈레반’이 숨어있을 수 있으니 받아주어서는 않된다는 과격한 댓글들이 지저분하게 달려있었습니다. ‘저들이 어떻게 하는지 앞으로 두고 보겠다’는 정도가 그나마 온화한 반응입니다.

    이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을 거북하고 불편하게 했습니다. 정작 제 땅에 찾아온 그들을 품지 못하고 날선 눈으로 바라보며 내치려고 하는 교회가, 과연 그 동안 이슬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선교사를 보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그 교회가 맞는가 싶을 만큼 당혹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2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야고보 사도는 마치 이런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거칠게 몰아부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 야고보서 2:1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고 업쑤이 대하는 것을 ‘믿음’과 직접 관련짓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야고보서 2:14

     

    사도는 더 나아가 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타자를 섬기지 않는것은 ‘죄’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사는 이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주님은 차별함이 없는 사랑과 넘치는 은혜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죄인이며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받아주실 때, 조건을 붙여 서럽게하지도 않으셨고, 업적을 요구하며 궁색하게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삼아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라면, 주님과 달리 살 수 없다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단호한 믿음입니다.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과연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그의 호통이 매섭기 그지 없습니다.

     

    3

    3독서 복음서 말씀은 주님께서 향하셨던 걸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두로’,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를 거쳐 갈릴리 바다 인근까지 이어지는 여정입니다. 이 장소들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매우 이례적인 곳들입니다. 가뜩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에 의해 불온하다는 의심을 잔뜩 받고 계셨으니,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라도 피해야 했던 여정입니다. 바로 얼마전에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문제로 날설은 설전을 벌였던 것을 벌써 잊으셨던 걸까요? 보란듯이 이곳들을 여정으로 택한 채 거침없이 나아가시려는 것은,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유대인들을 자신들이 경멸하는 이방인들을 통해 부끄럽게 하시기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언급되었던 ‘두로’나 ‘시돈’, 특히 ‘데가볼리’ 같은 지역들은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외세에 의해 더렵혀졌던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그곳의 사람들은 로마에 협력하면서 자치, 통상, 면세등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니, 유대사회에서 그곳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을지 불 보듯 뻔합니다. 부정하고 불결한 땅, 함께 할 수 없는 더러운 이들로 배척당해왔습니다.

     

    ‘두로’에 들어가셨을 때, 수주님앞에 나아와 엎드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구해내려고 주님을 찾아나섰던 수로보니게 출신의 여인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구하던 그녀는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뜨악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주님을 향한 간청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금 찬밥 더운밥, 체면이나, 형식 따위 따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딸을 살려내야만한다는 그녀의 간절함은 차별하시지 않는 주님의 긍휼과 마주쳤고, 마침내 그녀의 딸은 악령의 손아귀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자칫 모욕감을 느끼고 실족할 수도 있던 순간을 구원의 사건으로 삭여낸 여인의 온유함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님이라도 이방인, 그것도 아무 힘없는 여인을 향한 폭력적이고 인격모독적인 차별과 비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불쾌하게 합니다. 평상시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망스러운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의 지나친? 표현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던 유대인들이야 말로 주님 보시기에는 그들만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들춰내시려는 장치로 읽어내면 됩니다. 여튼 마가의 복음서는 ‘차별’의 상황을 뛰어넘었던 여인의 갈급함과 믿음을 통해, 이제 구원의 지평이 유다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성령강림 이후에나 가능한 일(마 28:18 ~ 20)로 소개하는 마태복음과 달리,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인과 주님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이후 악령에 사로잡힌 여인의 딸을 치유하신 주님은 데가볼리를 거쳐 갈릴리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곳에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만나게 되셨는데, 마가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결과로 여겼던 당시는 사회가 던지는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만 하는 서러움이 질병보다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사회로부터 ‘부정하다’ 외면당하고 버려진 이곳에서, 선한 사마리아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부정하다’, ‘더럽다’ 여기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이를 부축하고 이끌어 주님앞에 데리고 나온 이들이 있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긍휼한 마음으로 따듯한 손을 내민 그들을 보시면서, 비로서 주님은 흡족해 하셨을 겁니다. ‘차별’을 무너트리린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치유로 이어졌습니다. 아픈이를 대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다른 때와는 달리 대단히 정성들여 보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뱉어 혀에 대시곤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하셨습니다. 숨’을 내쉬며 탄식하셨다는 장면에서 정성들여 흙덩이를 빚어 사람을 지으시고는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하나님 창조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보시기에 좋으셨다’던 창조와, 주님의 치유가 ‘온전케 하신다’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합니다. 비로서 주님은 생명으로 빚으시고, 살리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악령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시고, 육체의 질병에서 낫게해 주시는 일이야 말로 주님의 일임을 알게 됩니다.

     

    5

    앞서 본것 처럼 야고보 사도는 ‘차별’을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었습니다. 

    ‘차별’은 타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마음이며, 낯설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나와 너가 다르니, 마주보지 않겠다는 견고한 벽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리에서도 이런 ‘차별’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불신’이야 말로 주님을 소외시키고, 주님을 마주보는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주님의 은총앞에서 스스로를 차별하는 병든 마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끊임없이 병자, 소외된 이들, 죄인들과 같은 타자를 찾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세상 모두에게 열려져있으니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습니다. 주님의 품으로 품을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찾으시는 주님의 목적은,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회복하도록 해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더불어 살아갈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함께 살자는 주님의 요청에도 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증거’만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사랑은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결혼’은 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 백성이라고 우쭐거렸던 그들이 정작 주님을 믿지 않았던 겁니다. 제 손으로 거룩해지고자 하는 그들에 의해 주님도 철저히 ‘차별’당하고 ‘소외’당하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나그네나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때,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때도 훗날 무언가를 돌려받을 수 있을지, 내게 도움은 될른지를 먼저 물었습니다. 상대가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전도를 하거나 성도를 대할 때도 교회를 채운다거나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라는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 ‘너와 나’는 다르다는 ‘차별’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6

    주님의 치유는 육체적인 질병과 악령으로부터의 회복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적 억압에서 자유를 회복하는 것도 또한 장애의 치유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나음을 얻고 구원을 이룬 이들의 삶에는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의 순례자들이 돌아오던 때의 기쁨과 환희가 깨지고 억눌린 땅에 넘쳐났습니다. 못보던 이가, 걷지 못했던 사람이, 나병에 걸렸던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뛰어다닙니다. '주님의 치유'는 소외된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길은 아무나 걸을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건짐을 받은 이들, 하나님에 의해 나음을 입은 이들만 걸어갈 있는 길입니다. 듣지 못하고 더듬던 그이를 주님앞으로 데리고 나왔던 이들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손을 내밀고 성도가 끌어안아 주는 품에서 시작되는 길입니다.

     

    차별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허다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타자를 차별하고, 자신을 주님의 은총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기댈 때만 경험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삶을 누릴 없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없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멸시하는 것은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잠언 17:5) 같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부터는 이웃의 손을 붙잡고, 그들 속에 있는하나님의 형상 보아내며 사십시오. 주님을 대하듯 이웃을 귀하게 보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며, 그를 지으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차별의 담을 허물고 평화하게 하는 이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낯설은 이웃들에게서 주님의 형상을 찾아내려는 그들에게 주님은 기꺼이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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