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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2 성령강림후 16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9. 9. 18:40
성서일과
- 1독서 | 잠언 1:20 ~ 33 혹은 이사야 50:4 ~ 9a
- 응송 | 시편 19 혹은 116:1~9
- 2독서 | 야고보서 3:1 ~ 12
- 3독서 | 마가복음 8:27 ~ 3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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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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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1
시편, 욥기와 함께 ‘시가서’로 분류되는 잠언은 ‘지혜의 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고민하는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입니다. 특히 잠언이 자주 강조하는 것은 ‘말’의 중요성과 그 사용에 대한 것들입니다. 요즘들어 부쩍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말이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을 향한 비난과 부정적이고 지독히 냉소적인 언어가 사람들 사이를 쉽게 깨트리고, 서로를 대하는 마음은 점점 퍽퍽해는 것 같습니다. 삶이 곤고하고, 갈등이 세상살이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대부분은 누군가를 향한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래 우리는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 외에는 자신의 말에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말은 경험한 것 그리고 그 경험으로부터 알게 된 무엇인가를 전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은, 누군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자신의 경험과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개된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은 단순히 외부로 드러내는 소리나, 의사나 정보를 나누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힐 만큼 치명적인 흉기가 되기도 하지만, 삶을 포기하려는 누군가에게 살아갈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따듯한 구원의 손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무심결에 자기 자신에게 쏟아낸 말이 영혼을 깨어지게 만들기도하고, 하나님을 향했던 수 많은 불신의 말들이 결국 우리 스스로의 삶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세계 가운데로 떨어트리기도 합니다. ‘말’ 한 것만 못하다면 말하지 말아야하고,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나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혀를 다스리는 곳에서 ‘생명’이 죽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말이든 일단 밖으로 내뱉어진 모든 말안에는 살아낸 자신의 시간 만큼의 무게가 실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기 이전에 먼저 듣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2
복음서 말씀은 ‘말’로 인해 야기된 긴장스런 상황과 마주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였의 일입니다. 알다시피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를 세계의 구원으로 내세운 신상을 세우고, 황제의 은택으로 안전과 화려함을 자랑하던 곳이었습니다. ‘성공한 인생’이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웅장한 도시의 위용앞에서 잔뜩 주눅들어있던 제자들을 물끄럼히 바라보시던 주님께서 ‘당신을 누구라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나는 저런 것을 너희에게 줄 수 없다. 그런데 대체 너희들은 뭘보고 이런 나를 따르고 있는 것이냐?’는 말씀인 셈입니다.
자신 만만한 베드로의 답변은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기도한 베드로의 당찬 답변이 이어집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흡족하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때가 되었다 싶으셨는지 놀라운 비밀에 대해 입을 여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러니까 세상의 유력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수난예고입니다. 제자들귀에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들렸을 겁니다. ‘그 동안 말은 않했지만, 이런식으로 계속 나아가다 나는 세상의 유력자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거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꿈이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견고한 세상, 압도적인 로마의 권세, 바뀌지 않는 대중의 반응 앞에서 마음을 단단히 해도 부족할 상황에, ‘아무래도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이 성공하기에는 이미 틀린 것 같다’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듯한 주님이 말씀입니다. 너무 무책임합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성급히 주님의 입을 가로막습니다. 원문을 보면 굉장히 사납게 주님을 막아 섰다고 합니다. ‘결코 그리할 수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당신과 함께 하던 이들 모두를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작정하신 것이냐?는 책망이고, ‘그런 심약한 생각일랑 꿈도 꾸시지 마라’는 윽박지름입니다.
그 순간 도리어 도리어 주님은 엄하고 거칠게 그를 뿌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33절
3
예수님께서 ‘사탄’과 공식적으로 직면하셨던 것은, 공생애를 시작하시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시험의 내용은, 광야에서 돌이 떡이 되도록 하라,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신령함을 보이라, 그리고 사탄의 권세 앞에 절하라는 세가지 유혹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 삶에 가장 달콤하고, 또한 가장 강력하게 찾아오는 유혹들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이런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따라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본능 앞에서 누구도 이 유혹을 쉽게 거절하지 못 합니다. 이런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하는 길은, ‘죽음’ 을 지나는 것 뿐입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 누구도 보고 있지 않으니 딱 한번만 눈감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외로운 걸음을 택하셨습니다. 사탄의 방식이 아닌, 죽을 지언정 하나님께 이어져 사는 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살고자 하는 자신을 부인한 주님의 외침이 광야에 울려퍼지는 순간, 사탄은 간 곳없이 사라졌습니다.
사역의 길에 나설 때, 목회자의 마음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유혹은 가족입니다. 자신은 직접 부름 받은 소명이라도 있으나, 그 곁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어린 자녀가 배를 곯게 될 때, 남들처럼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을 슬그머니 포기해야만할 때, 목회자의 믿음과 소명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잘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을까?’ 강력한 도발과 유혹의 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 타협과 변절로 걸음을 향하도록 거칠게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의 영광을 상징하는 가이사랴 빌립보앞에서 수제자 베드로의 거센 항변이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뒤흔들고 있습니다. 결국 당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가이사랴 빌립보가 아닌 십자가를 마주해야만 합니다. 모두 죽어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인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십자가를 향한 걸음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이 옳다 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다 하신 길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길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영원히 사는 길, 모두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선을 놓친 제자들을 깨우치시기 위해, 주님은 외치신 말씀은 ‘나는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는다’라는 주님 자신의 선택을 세우는 말씀입니다.
4
주님으로 인해 방금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전령처럼 칭찬을 받다가, 일순간 ‘사탄’으로 곤두박질하게 된 베드로는 우리들 모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본질적인 이유가 주님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이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그였는데, 구원자이신 주님께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안에 생각하는 구원의 방법을 기준으로 주님을 틀렸다 말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은 ‘베드로’자신이었던 셈입니다.
세상을 개혁하고, 종교를 회복할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장 높은 곳, 가장 영예롭고, 능력있는 권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식의 구원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뒤덮고 있는 황제를 구원으로 삼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자가 아닌 황제의 구원을 기대했던 겁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아지라는 황제의 구원방식과 달리,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은 더 낮아지는 곳에 있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이런 하나님의 구원방식 모두를 설명하는 응축된 결론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구원방식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실패이고, 죽음일 뿐으로 보입니다. 대체 주님께서 세상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사탄의 권세를 말씀 한마디로 굴복시키실 수는 없으셨던 걸까요?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에 대해 깊이 닿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만약 주님께서 천군천사를 불러 사탄을 무너트리셨다면, 사탄은 분명 웃으면서 죽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십자가를 부인하고 세상이 우러러보는 힘의 길을 택하셨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사탄의 방식을 따른 것이 되는 셈이니, 결국은 사탄이 이기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일’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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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사탄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주실 수 있기를, 사탄이 이끄는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던 셈입니다. 그곳은 가이사랴 빌립보였을까요? 아니면 황제의 궁궐이었을까요?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보고 있을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사탄이 주님을 유혹하던 먹을 것, 명예, 권세와 성공, 세상의 영광만을 마음에 담은채 그저 십자가 주변을 겉돌고 있는 우리가 베드로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전히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망하는 것 같고, 죽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순간이면, ‘그럴 수 없다’며 베드로가 주님을 밀쳐냈던 그곳에 주저앉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 사람보다 못하고, 저 만큼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구원에 길들여지면, 목회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자유와 해방, 구원이 아닌, 어떻게 성도를 모으고, 얼마나 큰 교회 건물을 세우고,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가에 몰두하게 되고, 그런것에서 만족을 찾게 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던 주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에 경도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물러가라’는 주님의 말씀이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다고 내치시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뒤로’라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비로서 주님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주님의 등 뒤에 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는 ‘나’는 간곳 없고, 주님의 모습만 보이는 주님과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내뒤로 물러서라’는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초대이며,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라도 이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골고다 언덕위가 아닌, 우리 각자의 시간과 삶 안에 놓여있습니다. 두리번 거리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님만 보고 걸어야 되는 모든 순간이 제 십자가가 놓인 곳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화려하고 멋진 세상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용기있는 선택앞에 서야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환란과 죽음, 세상의 멸시와 조롱이 드리워져있습니다. 베드로로가 주님께 그리했듯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당신은 틀렸다’는 비난이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 들고, 누구라도 성공과 성취, 자기 욕망을 거부하고, 주변의 조롱과 멸시를 감내해야만 합니다. 끊임없이 ‘그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가야하는 외로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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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십자가’ 너머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여전히 주님께로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바라던 것, 내게 중요한 것, 내 목숨이 더 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세상의 위용앞에 압도당하기 마련입니다. 언제 화려한 황제의 영광앞에서 순간적으로 베드로를 주눅들게 했던 것처럼, 두려움이나 부러움이 악마적인 기세처럼 꿈틀대며 우리를 덮쳐올른지 모릅니다. ‘무엇’을 해내려 허둥대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의 등 뒤로 물러나, 자신을 감추어야 합니다. 비로서 폭풍처럼 몰아치던 두려움이 잠잠해지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선택이 되고, 걸음이 되고, 우리 자신의 언어가 되고, 말씀이 육화되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뒤로 물러서는 것이야 말로, 주님을 따르는 최선의 길입니다.
주님은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택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오롯이 살아있는 말씀되게 하셨습니다. 오롯이 하나님의 말씀과 겹쳐진 삶, 하나님의 참된 말씀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만 듣고, 들은 말씀을 삶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을 믿고 있는지, 주님이 왜? 구원자가 되실 수 있으신 것인지 질문해 보십시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 아닌 다른 것에 기웃거려서는 곤란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했으니, 이제는 삶을 담아내는 말은 늘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매일, 삶의 언어로 채우셔야 합니다.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아멘’하며 살아갈 때 모욕과 비난이 찾아와도 마음이 상하지 않고, 어려움을 견뎌낼 수도 있습니다. 두렵고, 억울하고, 외롭지 않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있는 곳에, 사탄은 떠나가고 나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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