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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3 성령강림후 20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0. 20. 16:05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요엘 2:23-32 혹은 예레미야 14:7~10, 19~22
응송 | 시편 65
2독서 | 디모데후서 4:6-8, 16-18
3독서 | 누가복음 18:9-14
설교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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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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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탓소_ 바리사이와 세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01
사람들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감추고 싶은 모습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인지 그렇게 살아가다보니 세상이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연약한 부분을 어떻게 회복하도록 할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만 온통 관심을 쏟게 만듭니다.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테지요. 왜냐하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힘이 바로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쟁’은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일단 ‘경쟁’의 늪으로 내몰리고 나면, 누구보다 더 잘하고, 잘나고, 많이 가졌는가를 평가받기 시작하는데, 죄송하지만 마치 1등급, 2등급 우수한 종으로 낙인찍히는 가축이 되는 것처럼 불편합니다. 저마다 1등급이 되려고 달려가지만 이런 경쟁의 방식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단 ‘한 사람’ 뿐이고, 결국 그 한명을 위해 우리의 최선은 소비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자신의 단점은 감추고 끊임없이 장점은 개발하고 남들이 알아줄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만이 상책입니다. 쉬지 않고 주변과 비교하며 제것은 감추고 아직 갖지 못한 것은 제것인 양하며 살아가다보니 자꾸만 사람들이 가식이나 허무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삶에는 평안이나 안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번 경쟁에 발을 들여놓으면 여간해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경쟁’의 룰 안에서 얻게 되는 ‘행복’이란 것은, 남들이 부러워할 자신을 발견하는 ‘자기만족’ 뿐입니다. 비교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 경쟁이다보니, 남들과 비교되어 열등감에 떨어지고 남들과 비교될 수 없으면 ‘행복’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어디를 가도 나보다 잘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보니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삶을 헛헛하게 만들 뿐입니다.
제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게 될 때, 사람들이 쉽게 택하는 돌파구는 ‘자기 비하’나 ‘정죄’의 방식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타자를 ‘정죄’하려는 모든 폭력이 제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려는 가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자기 밖의 타자들에게 거칠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는 이들은 사실 자존감이 낮고 자기비하에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안타깝지만 오늘 한국 사회안에도 목소리 큰 사람, 툭하면 윽박지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드는 사람, ‘정죄’와 ‘혐오’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아니면 세상을 지켜낼 사람이 없다는 순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이야기하려드니 이런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여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02
복음서에서 읽게 되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리석고 못난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 보게 만듭니다. 비유안에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유대의 경건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엄격하고 딱딱한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반듯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말 그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에 반해 ‘세리’의 평판이라는 것은 형편없을 만큼 땅바닥까지 떨어져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에 빌붙어 동족들의 고혈을 빨아먹어 제 배를 채우는 ‘매국노’들이었으니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이들을 보면,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벌’주시기를 빌었을 만큼 세리들은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오늘로 치면 생각만 해도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 형편없어 보이고, 혐오스럽고, 더럽고, 곁에 있기 싫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교회에서 쉽게 만나는 신앙심 좋은 장로님이나 권사님 같은 분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평판도 좋을 뿐더러, 살아가는 모습도 점잖고 세련됩니다. 어디를 가도 환영받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둘이 성전에 올라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과 함께 성전에 올랐던 제자들의 눈에 그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아마 손을 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의 거룩한 모습과 달리, 세리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마음은 똑같이 불편해 했을 겁니다. 저런 더러운 죄인이 거룩한 성전에 올라온다니, 게다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며 얼굴을 붉히고 투덜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이윽고 말없이 지켜보시던 주님이 입을 여셨을 때, 사람들은 주님도 한마디 거들어 주실 것이라 기대했을 겁니다. 주님은 우리 편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우리 모두를 일순간에 부끄러움으로 몰아세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누가복음 18:14
우리도 세리 같은 사람들 때문에 늘 마음이 불편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사람들을 대해왔기 때문인지, 오히려 ‘세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주님의 말씀은 꼭 우리를 꾸짖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옮음과 우리가 보는 옳음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보면 바리새인이 의롭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전적으로 우리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외에 실재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대단하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형편없는 모습을 마주하고는 실망하는 일이 부지기수 일 정도로 우리의 ‘앎’은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볼품 없어 보여도, 내실이 더 알찬 인생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사특한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의 됨됨이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는 겁니다.
# 03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리를 ‘옳음’즉, ‘의롭다’고 인정해주신 이유는 ‘자신을 낮춘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서 ‘겸손’한 사람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춤의 핵심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아무리 치장을 하고 감추려고 해도, 자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한계에 갇혀 있는 연약한 존재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자신의 민낯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런 자신이 용납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격할 뿐이라는 겁니다. 사실 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요청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납과 은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인정받아야 할 이유만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죄인’이라는 자신의 민낯을 숨길 수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계시며, 더욱이 자기 자신도 알고 있으니 속일 수 없습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13b
그의 기도안에서 그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전적인 용서와 용납이 필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이보다 더 깊은 지식은 없습니다. 자신이 병들어 있임을 깨닫는 사람은 의사에게만 의지하게 될 겁니다.이처럼 죄인은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절대적으로 기대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런 참된 믿음의 관계안에 있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나,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자신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몰입하게 됩니다. 마치 사랑에 빠지면, 오직 세상에서 한 사람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세리는 이 관계에 집중하고 있었고, 바리새인은 스스로에게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기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만겁니다. 아무리 제 스스로를 그럴듯하게 여기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누구보다 더’라는 상대적 우월감은 그저 우리 자신만을 만족시킬 수 있을 뿐, 그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갈라디아 6:7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04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세리’가 보여준 그런 겸손함으로 살겠노라고 마음을 먹게 될 겁니다. 물론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을 높이곤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실상은 세리보다 바리새인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겁니다. ‘당신이 내 속마음과 신앙을 어찌 아느냐?' 되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단한 물음으로 우리가 어떤 영성에 쉽게 이끌리는지 확인해 볼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둘중의 하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바리새인과 세리중의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답해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세리같은 인생보다는, 그래도 내 자식은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그래서 하나님께도 감사할 일이 많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실 겁니다. 저 역시 이런 마음에서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을 통해 살아가는 모양이나 외견은 그럴 듯하게 바꿀 수 있지만, 삶 자체까지 바꿀 수는 없고, 경건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아무리 경건한 척 한다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경건을 ‘능력’삼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리’는 그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개들의 심정처럼,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였습니다. 아무리 허울 좋은 모습으로 치장을 하여도, 허무한 인생을 건져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탓에, 오히려 그는 세상이 모두 손가락질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용납되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의존할 것이 더 많은 인생을 ‘성공’으로 가르치는 세상의 방식과 달리, 오히려 이렇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때, 비로서 삶을 둘러싼 모든 두려움, 절망, 서러움과 억압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쉬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이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돈’은 더 가져야만 살 수 있고, 없으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늘 ‘어떻게 하면 돈을 벌 것인가’에 인생 모두를 사로잡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행복’은 따듯한 밥 한그릇, 무조건 적인 용납과 가슴을 울리는 진실된 말 한마디와 온전히 희생하는 ‘사랑’안에서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사람은, ‘돈’의 강요와 힘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게 될 겁니다.
# 05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는 때를 성경은 ‘심판’ 혹은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없이 자랑하고 우쭐대면서 살아가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면 전적인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독서 본문으로 구약 본문 요엘서가 복음서의 배경으로 주어졌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유다땅에 몰아닥친 메뚜기 떼로 인한 황폐함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1장에서 그는 지금이야 말로 ‘슬피 울며, 애곡’할 때라고 백성들을 이깨웁니다. 그런데 2장에 이르자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말하듯 오히려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을 기뻐하라는 그의 말에는 타당하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히려 심판의 날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철저한 회개로 응답하는 이들에게는 무너졌던 터전 뿐만 아니라, 무너졌던 심려까지도 다시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한 백성들은 더 이상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날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28), 모든 이들이 구원(32)을 얻게 될 소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은 배부르게 하시고,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하시는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3~4)
우리의 걸음이라는 것은 그저 하늘 끝까지 오르는 듯 싶다가도, 때로는 어두운 심연 바닥까지 떨어지기도 할 겁니다. 언제 내가 믿음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형편없는 모습으로 무너질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비록 오르락 내리락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신앙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겁니다. 지난 몇주간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웠던 것처럼, '신앙의 성장'이란 우리가 무언가 노력하거나 성과나 업적을 이루어냈는가, 혹은 얼마나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응답하는 것은 우리들 몫인 것처럼, 인생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길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주 말씀대로라면 주님을 향한 ‘절박함’을 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우리 앞에 신앙의 선배인 바울 사도가 바로 그것이 신앙의 길임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 고백처럼 그는 마침내 전제처럼 뿌려졌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서있습니다. 모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내며,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인생 전체를 오직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덕분이었습니다. (8c)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 삶을 구원하는 영생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이것말고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구원하셔서 그분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 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디모데후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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