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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0 성령강림후 21주 (창조절 9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0. 25. 15:20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하박국 1:1-4, 2:1-4 혹은 이사야 1:10 ~ 18
응송 | 시편 119:137-144
2독서 | 데살로니가후서 1:1-4, 11-12
3독서 | 누가복음 19:1-10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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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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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에게 '인생'을 걸다
# 01오늘은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중세교회의 타락에 저항하며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의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세계 교회는 바로 이 날을, 이후에 들불처럼 번진 종교 개혁의 시작일로 삼아 기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이자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뱅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지요. ‘종교개혁’의 정신이 이 한 문장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개혁하기 위해, 오늘 이 날을 기억하려는 걸까요? 과연 오늘 교회의 모습은 그들이 개혁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 교회일까요? 아니면, 어느새 그들이 그토록 개혁하고자 했던 바로 교회가 되버린 것은 정말 아닐까요?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이들은 때로는 순교를 당하고, 때로는 도망자가 되어 떠돌아 다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하게,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잘 살 수 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곳과 현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신념과 믿음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대체 무엇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끝까지 붙들고 괴로워했습니다. 오늘 이 물음을 여러분께 던져야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요?’
저는 목사로서, 예수를 주와 구원자로 삼아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것을 주어진 몫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의 길을 소개할 때마다, 맹신적이고 어리석은 종교행위라 핀잔을 주시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안에서도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라는 회의섞인 질문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 길이 옳음을 전하려고 애를 써 보아도, 결국은 ‘제 눈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실감나게 설명하겠다는 것이야 말로 ‘오만’이었을 뿐임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이나 세상의 모습은 어떠 했는가?’를 되묻는 것이 최선일 뿐입니다. 거창하게 인류의 역사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개인이 살아온 시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다던 수 많은 시도가 실패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몸부림이 길어질 수록 삶은 꼬인 실타레처럼 자꾸만 얽혀가고, 참된 만족, 영혼의 평화나 행복을 이루는 길이 요원해 보이는데도, 지금까지의 걸음을 포기하거나 되돌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래도 내일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붙들고 마치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처럼, ‘돈 많이 버는 것’ 쯤을 ‘잘 사는 것’으로 자위(自慰)할 수 있을 뿐입니다.
1독서 선택본문으로 주어진 이사야서 말씀의 배경이 꼭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런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와 그의 손자 요시야 왕은 남 유다 왕국에서 하나님을 믿는 길을 민족의 살 길로 삼으며 개혁에 나섰던 등불 같던 이들입니다. 하지만 젊은 요시야왕이 죽고 난 이후 그의 아들 여호야김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유다 민족이 새로운 내일로 향할 수 있던 실낯같던 꿈을 꺼버렸던 겁니다. 하나님 없이 맘껏 그리고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사라지게 된 이후, 유다는 부정부패와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악인이 잘되고 오히려 의인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길을 포기한 채, 결국 바벨론에 의해 망했습니다. 대체 하나님 없이 잘 살아보겠다던 결론이 이것을 위한 것이었던가 싶습니다. 유다의 이 절망스러운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남의 일처럼 낯설지만은 않으니,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02
모두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버린 채 망해가는 이런 짙은 어둠속에서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에 사로잡히고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절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생명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어둠이 짙어질 수록 ‘빛’을 향한 갈망이 더 커지듯, 불신으로 팽배해지는 세상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목이 마른 사람들입니다. 응송인 시편말씀의 기자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허투루 여기고 저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길로 치닿는 세상속에서, 오히려 말씀을 향한 갈망과 열정으로 불타 올랐던 사람입니다. ‘원수들이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니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119:139) 말씀대로 살다가 손해를 입고,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지만’ 오히려 그는 주님의 법도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141) 불편과 불이익을 강요받으며 살아야 할 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바르게 사는 것을 더욱 기뻐하는 이들을 누가 감히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복음서 말씀은 이처럼 주님을 향한 갈급함을 보여주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삭개오’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축복하며 이름을 지어주었을 그의 부모들을 생각하면, 제 자녀에게 ‘너는 잘 살아라’고 복을 빌어줄 때마다 ‘부자’나 ‘성공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인 우리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모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세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 주 설교에서 당시 사람들이 ‘세리’를 얼마나 죄인 취급했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정당한 세금을 징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자’가 될리 만무할 텐데 여리고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고 하니, 그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왔을지가 눈에 선합니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이 직업이다보니 한푼도 헛되게 쓰지 않고, 낭비하지 않는 것이 몸에 베었을 테고, 게다가 이익을 쫓는 것에는 귀신같고, 돈 냄새를 맡는 것에는 동물보다 예리할 만큼 영특하고 계산이 빨라, 돈이 되고 이익이 있는 것이라면 번개처럼 낚아 챘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그의 집에 방문하실 때 사람들이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거릴 수 밖에요.
그랬던 그에게 오늘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관습이나 법률, 사람들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았으니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입니다. 결국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던 삭개오 부모의 바램은 성취된 셈입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더 궁금해 집니다.
#03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이 그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죄인’이라 비난하는 소리에 삭개오는 흠칫 놀랐습니다. 행여라도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사람 잘못 보았다며, 자신을 내치실지도 모른다 생각에 이르자, 그는 황급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소유의 절반을 내놓고,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배나 갚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쳤을 때 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는 ‘속건제’ 규정에 따라 ‘오분의 일’만 더하여 배상하면 허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약속은 분에 넘치고 많이 오바한 겁니다. 주님이 그에게 강요하시거나 책망하신 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단한 결단을 하게 된 동기가 뭘까요? 본문에 생략되어 있거나 우리가 모르는, 예수께서 그에게 어떤 엄청난 약속이나 은혜를 주셨던 것은 아닐까요? 여튼 아무리 말씀을 읽어봐도 특이하다 할 만한 것은 그가 예수를 만났다는 것, 예수께서 그의 집에 찾아오셨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도무지 그의 변화를 설명할 만한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삭개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리장’으로 ‘부자’까지 될 만큼 잔뼈가 굵은 그는 결코 손해가 될만한 일에는 손을 댈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만 남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그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 만큼 가치있는 분임을 알았다는 겁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 이분이야 말로 제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인생 전체를 걸어야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임을 깨달았다면, 그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설명이 됩니다. 그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을 소비해왔던 것처럼, 제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주님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갑자기 서운하고 서러운 마음이 밀려듭니다. 단 한번 예수를 만났던 그는 인생은 이처럼 송두리째 변하였는데, 우리 는 왜 여태 이런 모습인지 속상한 탓입니다. 그때의 주님과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이 다른 분이 아닐텐데, 우리는 왜 늘 이런 모습, 같은 신앙의 수준을 되풀이만 할까요.
여튼 분명한 것은 주님이 삭개오를 찾아가셨다거나 그의 집에 직접 방문 하신 것은 그의 변화의 이유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믿을 때, 주님이 우리 안에 찾아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선을 베풀었다거나 자기 재산을 내주었다는 것도 삭개오와 우리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삭개오는 ‘어서 내려오라’던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고, 그분의 손을 붙들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으로 나아갔습니다. 따라야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가 올랐던 뽕나무 위에서 주님을 내려다 보고만 있습니다. 뽕나무 밑으로 내려가고 그분과 함께 하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분의 손이 얼마나 부드럽고, 품이 얼마나 따듯한지, 그 눈빛의 깊음, 그리고 말씀의 달콤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도 응답할 수 없던 겁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는 그의 처신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내놓을 수 있을까?’라고 궁금해하고 부러워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우리가 예수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험하게 된다면, 삭개오의 선택을 보며 우리는 ‘당연한’ 일이라고 했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면 도무지 그분을 믿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04
삭개오처럼 예수안에서 하늘을 발견한 이런 사람들과 달리, 애를 쓰고 스스로 수고하고 노력함으로 삶을 구원해 보려고 하는 이들은 결국 바램과 달리 어긋나는 현실에 절망하고 낙담하게 됩니다. 자꾸만 되풀이되는 실패로 인해 패배주의에 빠지거나,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냉소주의’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어둠에 짓눌려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죽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번의 만찬을 준비하는 것쯤은 누구라도 할 수 있고 흉내도 낼 수 있지만, 삭개오처럼 주님을 따르며 살기 위해 이후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선택을 하려면, 예수 안에서 분명한 무엇을 보지 않고는 따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럴때 우리는 믿어야겠다는 마음과,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정죄감에 사로잡힐 수 밖에는 없습니다.
1독서 구약 선택본문인 ‘하박국’에서 선지자도 이런 현실과 믿음 사이의 갈등에 놓여있었습니다. ‘묵시가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는 주님의 약속으로부터 말씀이 시작하고 있지만 실재로 현실에서 주님이 전해주신 약속이 성취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실과 약속의 성취 사이의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그 간극을 뛰어넘을 능력이 없습니다. 매일의 일상에 치여 살아가야만 하다보니 이런 신앙의 삶,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자칫 ‘공허한 말’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자꾸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일이 언제 성취될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일어납니다. ‘그때가 도대체 언제인가?’라는 물음에서 자유롭지 않고, ‘얼마나 오래’냐고 되묻게 되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떨어진 탓입니다.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다 결국은 믿음을 잃어버리는 수준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 뻔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한계와 물음앞에 선 하박국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하박국 2:4
‘의인’ 즉 하나님께 용납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뜻이나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고백은 삭개오처럼 기뻐하며 나무에서 내려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방식을 경험으로 살아내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불빛을 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실감하면 할 수록 기다림의 시간이 막연함이나 지루함이 아닌 기쁨과 환희의 시간으로 경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이 없을 때, 믿음의 시간은 ‘억울함’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05
주님보다 억울함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간 이는 또 없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곁을 지켜주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신 것 뿐이지만, 한편에 매달렸던 강도가 말한 대로 ‘죄 없이’ 유대 기득권자들에 의해 억울한 재판에 내몰렸습니다. 그리곤 결국 십자가에 처형 당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은 대체 뭘 하시는 걸까요? 삶에서 이런 일을 경험할 때면, 믿음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을 우겨싸고 있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하고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셨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영혼, 즉 당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신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영원한 생명의 그리스도이시며 온 땅의 심판의 주인으로 높이셨습니다. 암담한 현실을 거스르며 하나님을 믿으며 참되게 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보여주셨기에, 그래서 주님은 ‘믿음의 주인’이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또 그렇게 살아낼 믿음의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처럼 억울한 상황에 떨어지는 순간 무너질 것이 뻔합니다. 우리로서는 예수께서 하나님께 그리하셨던 것처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 뿐입니다. 믿음을 완성시키신 그분의 운명에 우리 운명을 일치시켜, 그분의 운명, 그분의 믿음의 옷을 입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보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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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난폭하고 허무하며, 신앙의 유무와 관계 없이 ‘이런 세상에서 뭘 할수 있겠는가’ 싶은 상투성으로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자신이 없고, 그래서 ‘사는 것’이 자꾸만 불안해집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절박한 심정으로 붙들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런 세상에서도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삽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났던 ‘여리고’의 이름 뜻이 ‘향기’라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비난 받고, ‘죄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서러운 땅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 그곳은 복된 구원의 이야기가 향기처럼 흘러넘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던 삭개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 주님께 인생을 걸고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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