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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1/13 성령강림후 23주 * 창조절 1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1. 9. 18:41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이사야 65:17-25 혹은말라기 4:1~2

      응송 | 이사야 12

    2독서 | 데살로니가후서 3:6-13

    3독서 | 누가복음 21:5-19

     

    설교음원

    http://naver.me/xXDQJetZ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dHNJJe2MNP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A.D. 70, 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하다”, David Roverts

     

    ‘그 날’ 그리고,  '지금'은 ...

     

    # 01 

    주중에 개기월식이 있었습니다. 천왕성 엄폐와 동시에 월식이 진행되는 것은 2백년 만에 한번 관찰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붉게 물든 것이 얼핏 꼭 핏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목사라서 그럴까요? 사도행전 말씀 한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_ 사도행전 2:20

     

    혹시 이 말씀을 기억하며, 종말이 임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했던 분은 없으시겠지요? 오늘 복음서 말씀에 꼭 이런 상황을 염두해두셨던 것 같은 주님의 말씀을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성전을 오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성전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날, 그리고 그 날에 있을 천지가 개벽하는 재해를 연상할 수 있을 만한 징조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성전’은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로 인해 강도의 굴혈로 타락해 버린지 오래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성전의 위용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성전공사를 강행하고 있는 헤롯을 욕하면서도, 더 크고 위엄있는 성전을 기대합니다. 이제 이 성전 덕분에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차오릅니다.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으리으리한 성전 건물의 위용과 아름다운 돌, 봉헌물로 꾸며진 모습이 부러웠던 제자들의 눈이 주님을 향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 누가복음 21:6

     

    역시 주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를 깨트리는데 누구보다 일가견이 있으신 분입니다. 마치, 너희가 세운 것, 너희가 기대하는 어떤 성전이라도 내가 무너트리고 말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지금 예수님 일행이 마주하고 있는 곳은 제3성전이라 불리우는 헤롯이 건축하고 있는 성전입니다. ‘이두매’라고 하는 이방출신으로 왕이 되었던 그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작한 공사다 보니, 규모나 외형에 있어 압도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교회의 정체성이 공동체에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공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잘 정돈되고, 엄숙한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과 영혼을 차분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대가 아무리 흐르고 신앙의 모습이 변한다고 해도, 건물로서의 교회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건물이 무너질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미련도 없으신 것같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창 건축중인 성전앞에서 ‘이 성전이 무너트려질 것’이라 하셨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머무실 성전이 무너지다니요? 생각해 보세요. 근처에 대형교회에서 더 크고 웅장하고 그럴 듯한 새성전 건축이 한창인데, 제가 지나다가다 ‘이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작은 교회 목사의 치기 어린 시샘이라고 꾸짖었을 겁니다. 유대인이었던 당시의 사람들이 주님 말씀에 받은 충격과 당혹감은 컸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역사속에서 자신들이 쌓아 올렸던 성전이 두번이나 무너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전파괴는 유대인들에게는 역사속에서 경험한 씻을 수 없는 아픔이고 상처로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40년이 지나, 제3성전인 헤롯 성전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돌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말씀들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성전파괴를 실재 사건으로 경험한 이후에 기록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제국과 나라와 민족은 무너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던 것처럼, 이미 성전의 운명을 내다보고 계셨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 02

    문제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왜냐면, 성전이 무너지기는 커녕 여전히 돌 위에 돌을 쌓아, 이전보다 더 웅장하고 으리으리하게 지어낸 성전이 우리 주변에 즐비하기만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않을 것 같습니다. 현실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늘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였을까요? 개역개정 성경으로 6절 주님의 말씀을 주목하여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21:6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날이 이르면’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이르면 성취될 겁니다. 그것도 ‘반드시’입니다. 그때가 되면 주님이 말씀처럼 제 아무리 높이 쌓으려해도 낮아질 것이고, 그때가 이르기 전에는 작은 돌 하나도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 21:7b

     

    이제 우리의 관심은 모두 똑같을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관심은 늘 대체 그런일이 언제나 일어 날른지, 그때가 이르면 어떤 징조가 있을런지 뿐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히 ‘그때’에 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만 속해 있으며 자신도 모르실 뿐만 아니라, ‘너희도 알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셨는데도 우리의 믿음 없음은 늘 똑같은 곳에만 머물고 맙니다.(사도행전 1:7) 게다가 분명히 ‘속지마라’고 말씀하셨으니, 여러분도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들이나, ‘때가 이르렀다’는 말에도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몰라도 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뒤에 이어지는 징조에 관한 10~11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이 일어나 민족을 치고, 나라가 일어나 나라를 칠 것이다. 큰 지진이 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이 생기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  21:10~11

     

    세상이 끝장나버릴 만큼의 대 재앙의 모습입니다. ‘종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이 묵시적인 종말에 관한 말씀을 우리들은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까요?

     

    # 03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곳곳에서 말세의 징조, 종말의 때가 이른 것이라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거나 두려움에 몰아 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선동하는 이들이 없어도, 덤덤하게 제 길을 걷던 이들도 암담한 현실을 자꾸만 직면하다보면 결국은 불안감과 초조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식의 대재해는 주님의 말씀 이후부터 지금까지 숱하게 있어 왔습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재해들보다 더 크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사건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고 ‘종말’도 여전히 멀게 보입니다. 자꾸만 ‘대체 언제쯤일까’라는 불안함에 빠져있게 되면, 결국은 ‘종말’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무감해지고 냉소주의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체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지진, 기근, 역병 같은 징조들은 무엇을 말하려 하셨던 걸까요? 

    이제부터 집중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사실 이런 무서운 일들과 하늘의 징조들은 이미 우리 개인의 일상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근이나 전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은 대단해 보여도 영혼은 후패해지고 있고, 온갖 전염병처럼 모든 사람들의 삶에 이런 암담한 좌절감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지진은 땅이 온통 흔들리는 경험, 그러니까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무거운 상황이나 사건들입니다. 작게는 진학이나 취업에 낙방할 때, 실연을 당하거나, 사업이 망하게 되었을 때, 갑작스러운 건강의 이상을 알게 되었을 때도 개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거립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같은 경우도 같습니다. 전 지구적인 재앙이든, 개인에게 찾아온 재앙 같은 사건이든, 우리가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얼마나 대단하게 살았는지와 관계 없이 우리의 오늘은 종말 앞에서 형편없이 깨어지게 될 뿐입니다. 이런 종말 아에서는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무관하게 우리는 모두 똑같이 무능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 동안 자랑하고 으스대며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게다가 이런 종말은 특별한 어떤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용케 어떤 사고나 사건으로부터 비켜왔다고 해도 사정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살아있다’는 말은 결국 ‘내일 죽을 것’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내것처럼 당연하게 누리고 살던 ‘오늘’이 내것이 아니었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부끄럽고 두려운 날이 찾아 올 겁니다. 여러분에게 그 날은 공포와 재앙, 두려움의 날입니까?

     

    # 04

    구약 본문은 이사야 65장과 ‘말라기’ 4장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두 본문 모두의 핵심은 ‘그날이 오면’입니다. 선택본문인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을 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왔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역사안에 하나님의 개입을 꿈꾸며 성전재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재건하고 벌써 50년이나 지났지만 귀향이후 기대했던 이전의 평화와 안정,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신앙은 싸늘하게 식고 나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신앙과 삶 모두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제사는 변질되어 형식만 남아 있을 만큼 타락했고, 이제 율법과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세상도 함께 불의가 판을 치고, 악인들이 득세하였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의 삶이 짓밟히는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디에도 그릇된 길로 치닿고 있는 세상을 ‘그렇지 않다!’ 꾸짖는 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백성들을 가르치고 깨우쳐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조차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은 없다’(2:17)고 말하는 참담한 지경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신실하게 주님만을 믿는 이들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이들과 악인들의 차이가 드러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살던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바로 ‘그 날’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서는 ‘그날’에 대한 이미지를 더 감격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새로운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채우신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날입니다. 허무와 상처로 얼룩져 울부짖던 울음과 억울함의 소리가 온 땅에서 멈추어지는 날입니다. 20절 말씀을 읽다보니 자꾸만 눈물이 흐릅니다. 서러운 우리 삶에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 이사야 65:20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해주신, 주님의 날은 그 어떤 어둠의 힘에 의해서도 침해당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것마다 나누어 주셨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그토록 꿈꾸고 희망하는 평화의 날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응송인 이사야 12장의 선지자 처럼,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쁨과 환희의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될 겁니다.

     

    # 05

    사도 바울은 ‘그 날’을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데살로니가교우들에게 무절제 한 삶에서 벗어나, 사도들에게서 배우고 전해 들은 말씀을 따르며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곧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 누구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그 날’은 언젠가 올 막연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3장 8절에서 자신은 누구의 짐도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언제일지 자신이 없어서 생계를 지켜가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실 그 날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비록 비루해 보이고 볼품없어 보이고 우습게 여김을 받는 일이라도 그는 주어진 모든 것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겁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종말’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종말에 맞이할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이니, 종말이 언제 온다고 어수선해지거나,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댈 일이 없던 겁니다. 바로 오늘,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이 사도와 우리 신앙의 차이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돌아봅시다. 주님은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일어날 징조로 천지지변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언급하셨던 재해들은 현실속에 드러나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분명히 우리 내면과 실존에, 우리 각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충격과 균열같은 것입니다. 검을 주러 오셨던 주님이 던지신 균열이 세상에 익숙해져 살아가거, 또 그곳을 터잡아 살려고만 했던 우리 삶을 뒤 흔드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헤롯이 지었던 제3성전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제3성전을 짓겠다고 호들갑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실 때, 무너지게 될 ‘성전’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구원의 징표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니, 적어도 성전이 있는 한 망할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은 결국 ‘성전’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겁니다. 우리안에는 어떤 ‘성전’들이 세워져있을까요? 이렇게 살아내라, 저렇게 이루어내라, 그런 인생을 만들라고 요구받았던 것들, 혹은 이런 것만 있으면 살것이라고 믿어왔고 의지해왔던 모든 것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게 만들었던 ‘자아’야 말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 남김없이 무너트려야 할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무너지는 날이 바로 ‘종말’, 주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자아가 깨어지는 그 때에야 주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자로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주님이 무너트리셨던 그 성전을 다시 쌓으려고 주억거려서는 않됩니다. 우리가 자신안에서 무언가를 세우고 의지하려고 할 때마다 주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트리실 것’이라고 천둥처럼 외치실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가 복됩니다.

     

    # 06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또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감사절은 풍성함에 대한 감사를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풍성함을 기뻐하는 것은 바알을 숭배하던 이교도들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주목하는 ‘감사’의 정체성은 ‘흉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셨다고 하는 감사, 찬양, 바램과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안에는 무엇이 더 많이 있어야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없을 때에도, 믿고 의지할 것을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어 버려진 것 같은 그런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셨다는 고백, 주님 때문에 나는 살았다는 고백이 담겨있어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드릴 감사이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감사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적어 봉헌합시다. 감사할 만한 것이 없으시다구요? 아직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신 겁니다. 남들 앞에 드러낼 만한 것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다음 주일은 그것을 가지고 오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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