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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6 성령강림후 2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1. 2. 20:34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학개 1:15b~2:9 (혹은) 욥기 19:23~27a
응송 | 시편 145:1~5, 17~21 (혹은) 시편 98 혹은 17:1~9
2독서 | 데살로니가후서 2:1~5, 13~17
3독서 | 누가복음 20:27~3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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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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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세친구들 '너'는, '살아 있으라'
# 01
11월의 첫주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막바지에 이른 교회력의 시간 앞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다시 대림의 기간을 준비해야하는 여력조차 잃어버린 형편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오늘’처럼, ‘종말’을 ‘오늘’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찾아온 ‘참사’로 인해 황망하게 떠나야만 했던 생명들의 안타까운 죽음앞에서는 ‘약속’이 있는 ‘내일’에 기대어, 오늘의 현실을 든든히 지켜낸다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 동안 붙들고 우리를 지탱해 왔던 믿음과 소망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입니다.
지연된 주님의 재림앞에서 믿음에 파선한 교우들이나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의 소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앞서 살았던 초기 교회 공동체가 마주해야만 했던 현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기분입니다. 그들은 참담한 현실에 사로잡힌 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목숨을 걸고 ‘예수 생명’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더 크게 외쳐왔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 02
2독서인 데살로니가 교회에 써보냈던 바울의 편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사도는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는 속임’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 (2),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한 이들이 나타날 것이며 (3), 예배를 대항하고, 자기를 높이고,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는 이가 나타날 것(4)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폭풍처럼 쏟아내는 그의 말을 통해, 당시에 교회가 얼마나 위태로운 신앙의 싸움을 해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의 교회는 안팎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로마라고 하는 제국의 통치시기라는 현실적 문제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거세게 공격해 오는 이단들 때문에 신앙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우리라면 자꾸만 느슨해 지는 신앙을 북돋고 이런 교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써 ‘부흥회’를 하고, ‘세미나’를 하고, ‘캠페인’이라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런 권면외에 달리 다른 것을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라는 것’(8)과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9) 마음을 격려하고 굳세게 해주시기를 비는 축복(10) 이 전부입니다.
요즘식으로 보면, 바울은 미숙한 목회자입니다. 이런 식으로하면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기 십상이고, 교회가 문을 닫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지켜내실 주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권면처럼 숱한 고난의 역사속에서 교회 공동체를 지켜왔던 것은 바로 이 가르침들이었습니다.
# 03
1독서 구약 본문 ‘학개’는 ‘복음서’의 배경으로 주어졌습니다. 본문은 당시가 어떤 때인지 매우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리오 왕 제2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1:15), 그러니까 이때는 주전 520년 경 즈음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바사의 고레스왕의 칙령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온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어가던 때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왔던 이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오늘 말씀도 다시 성전 재건에 나서라고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이전의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이 없다는 그의 말은, ‘성전’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니 하루 빨리 성전이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 성전재건에 게으른 이유가 그 영광을 보지 못한 탓이라는 겁니다.
분명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신앙의 중심이었던 성전 건축은 시급하고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직후의 삶은 퍽퍽하기만 합니다. 학개가 언급했던 ‘이전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입니다. 옛 영화를 상징하는 그 성전이라는 것이 바벨론에 의해 벌써 60년 전에 무너졌으니,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에게는 성전의 영광이라는 것은 기억속에 희미할 뿐입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가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을 재건하자는 지도자들의 요구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총독 스룹바벨이나 대제사장인 여호수아 역시 그런 공동체의 형편 때문에, 성전 건축을 채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선지자 ‘학개’는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이 둘에게 오늘 본문의 내용 그대로 ‘성전 재건의 시급성’에 대한 말씀을 쏟아냈습니다.
그의 설교의 주된 메시지는 ‘스스로 굳게 서라, 두려워하지 마라, 힘을 내라’는 독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출애굽’(5)이라고 하는 민족의 역사속에 잠들어 있던 사건을 끄집어 냅니다. 대제국 애굽의 노예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이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이 땅까지 이르렀던 것은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놀라운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살려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기 계시니, 패배감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사명에 응답하라는 겁니다. 얼핏 교회 건축, 새성전 건축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헌금과 헌신을 독려하는 식의 설교에 사용되곤 했습니다.
# 04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신앙의 독려만으로 처해있는 상황이나 형편을 이겨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당장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전향적인 삶, 전혀 새로운 삶의 선택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듣기만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미 구원은 완성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결론적을 말씀드리면 ‘말씀’은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삶에 말씀이 울리는 사건, ‘아! 그렇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깨우침, 말씀에 응답하는 공명이 없다면 시쳇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날 '인생은 유한하다’고 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말하고 듣는다고 해도, ‘아~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라고 할 수 있지 못하다면, 삶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증거는 이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마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대부분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이미 우리 삶 뿐만 아니라 영혼마져 지배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는 탓입니다.
학개 선지자의 설교와 외침은 이처럼 두려움과 염려로 인해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굳어진 영혼을 향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왔던 이들은 이미 과거의 역사를 통해 패권을 움켜쥔 열강들에 의해 언제든, 어느날이든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벽을 쌓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을 겁니다. 이 힘이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는 열강이나 세상의 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풀처럼 시들고, 먼지처럼 흩어질 것들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시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는 이들에게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이 상투적으로 듣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힘 앞에서 주눅드는 가식에 떨어지게 됩니다. 실재로 우리도 대단한 권력가들, 재벌 총수들이나,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 앞에서 속절없이 위축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실재적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학개 선지자의 설교는 바로 이렇게 잔뜩 움츠들고 쪼그라들고 말라붙은 민족의 영혼에 불을 지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디 믿음없는 자가 아닌, 믿음 있는 이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자처럼 살아가라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능력앞에서는 모두 무너지고 말 것들 뿐입니다. 이스라엘을 우겨싸던 열강들이 한줌의 흙으로 사라진 것이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 사실들을 실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분명하고 선명해 질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모든 억눌림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8절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라’ | 학개 2:8
이 말씀이 상투적인 고백이 아닌 실재의 사건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내것으로 삼으려는 어리석은 욕망에서 벗어날 뿐만아니라, 내것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염려나 두려움에서도 우리는 해방될 수 있게 될 겁니다.
# 05
학개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 때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안에도 여전히 두려움, 절망, 염려와 근심이 가득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히고 체념한 채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런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일에 매달리고 노력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며 한주를 살아내셨습니까? 하지만 이 중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지자 학개가 외치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는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전’안을 가득채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그런 영광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그 영광의 빛 아래서 살았습니다. ‘영광’이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이나 순간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 바로 ‘영광’입니다. 하나님 경험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전쟁과 패망의 위협에 우겨쌈을 당하고 있음에도 ‘평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여전히 바라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온통 뒤죽박죽인 삶이지만, 기도나 예배의 자리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안과 평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성전’가득히 채워진 ‘영광’을 보았기에, 충만한 ‘하나님 경험’에 사로잡혔던 ‘성전’에 집중하라고 한 겁니다. 본질적으로 삶을 공포와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건져내는 ‘구원’의 경험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힐 뿐이라는 학개 선지자의 주장은 옳고, 이 일을 위해 성전을 재건하는데 마음을 다하라는 그의 재촉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의 설교, 그가 전한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성전이나 건축물, 공간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충만한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났으며, 그가 주시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가득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자신을 당신의 ‘성전’으로까지 삼아주셨습니다.
# 06
복음서 말씀에서 ‘부활’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찾아와 일곱 형제있는 이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님을 곤란한 상황에 떨어트리기 위한 사특한 질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황함 없이 두가지 답변을 주셨습니다. 첫번째 답변은 34, 35절입니다. ‘부활’을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처럼 보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죽은 뒤에도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은 당연한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된 모든 이들의 삶이 얼마나 헛헛하게 되는가를 헤아려보면, ‘가족’, 또는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의 행복의 근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이유, 조건들이 연장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 없으면 않되고 이런 것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 여기던 모든 한계가 극복된다는 뜻입니다. 두번째 답변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37, 38절입니다. 이 답변안에서 주님은 구약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 해석을 덧붙이신 것이 38절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 누가복음 20:38
모세를 대면하여 만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 대목을 언급하시면서 주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언뜻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그들은 이미 죽고 없는 조상들일 뿐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해석대로라면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죽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끝이라면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셨을리가 없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이 말씀은 언젠가 다음에 죽음 뒤에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똑같은 말이 아닌가 싶을 겁니다. 다시 한번 잘 읽어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무척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또는 우리 편에서는 ‘죽은 자’는 그저 ‘죽은 자’일 뿐입니다. 제 아무리 뜨겁게 사랑한다고 해도, 제 목숨이라도 내주겠다는 부모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은 이들을 살아있는 자로 불러내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뿐입니다.
# 07
학개가 처해있던 상황이나, 바울 사도와 초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상황, 그저 갈길을 걸어가다가 죽음에 삼킴을 당하는 절망에 처해있는 우리의 오늘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구약 선택본문에 나오는 ‘욥’도 그런 절망의 극한에서 몸부림치던 사람입니다. 잔인하고 절망적인 삶의 한복판에서 그는 토해내듯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 욥기 19:26 ~ 27
‘이렇게 살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을 뵈어야겠다’는 절절한 그의 간절함은, 벼랑끝에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심정과 닿아 있습니다. 욥의 부르짖음에 대한 답변을 에스겔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안에서 듣게 됩니다.
‘그 때에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가다가, 핏덩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고,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 | 에스겔 16:6 (새번역)
이 말씀안에서 우리의 소망은 ‘너는 살아 있으라’ 말씀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결국 우리도 모두 죽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언제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더욱 주님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폭력과 공포를 무기삼아 짓누르는 어떠한 죽음의 힘 앞에서도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모든 죽은 이들을 살아있음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 빼앗기실리가 없습니다. 불현듯, 도둑처럼 낯설게 임하는 그날에도,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시기를’ 간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지치고 낙망한 영혼을 기대시고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태초에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불러내셨던 것처럼, ‘죽음’이 주인 행세하는 서슬퍼런 죽음의 손아귀 안에서라도 우리를 ‘살아있는 자’로 불러내실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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