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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1/20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추수감사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1. 17. 15:42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23:1-6

         응송 | 누가복음 1:68-79

       2독서 | 골로새서 1:11-20

       3독서 | 누가복음 23:33-43

     

    설교음원

    http://naver.me/G7DxQ2Yp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5HSxbdv4RC8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James Tissot (French, 1836-1902).  It Is Finished (Consummatum Est) , 1886-1894.

     

    누가, 우리의 '왕'이신가?

     

    # 01

    ‘왕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오늘을 끝으로 2022년 올해의 교회력을 마감하게 됩니다. 다음주일부터 는 ‘대림’의 절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곧장 주님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이어지고 있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선언은, 결국 교회가 지향해야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서 말씀은 영광스러운 나라,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오늘, 굳이 왜 이런 본문이 주어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낯설기만 합니다. 본문이 가장 처절하고, 참담한 하나님 아드님의 살해 현장,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사건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가장 영광스럽고 기뻐야할 절기에, 가장 비극적인 본문이 주어진 걸까요? 우리의 당혹스러움은 성서일과의 지향과는 별도로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왕’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과 달랐던 탓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02

    민주주의가 보편적 질서가 된 오늘 같은 시대에 ‘왕’이란 말은, 전근대적이고, 역사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고루한’ 단어일 뿐이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도 ‘왕’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도 매일 ‘왕’을 대면하고 있고, ‘왕’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어떤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이란 절대적인 권세와 힘을 가진 존재이며, 모두가 우러르고 그 발앞에 복종해야하는 통치자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왕’이라던가 혹은 ‘왕같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복종할 만하고 부러워할 만하다는 의미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무시하거나, 혹은 이런식의 물음을 상투적으로 듣고 ‘예수님이 왕이시다’고 쉽게 답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요즘 같은 시대에도 역사속에 사라진 것같은 ‘왕’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드러나 있지 않고 ‘호칭’이 달라져있을 뿐, 조금만 눈여겨 보면 분명히 누구라도 복종시킬 수 있는 강력한 왕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시대를 통치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왕’은 누구일까요? 세상이 온통 돈과 경제의 힘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누가 뭐라해도 ‘돈’이야 말로 이 땅의 권세를 움켜쥔 ‘왕’처럼 보입니다. 어제의 우방이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우방이 되는 것도,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는 것도, 꿈을 포기해야하는 이유도, 결혼을 포기하는 것도, 그렇게 사람들을 자꾸만 서럽게 만드는 것도, 자꾸만 세상이 탐욕으로 무너지고 타락해가는 것도, 따지고보면 모두 ‘돈’의 통치력입니다. 그 힘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똑같아 집니다. 억압하는 힘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이 보여주는 ‘안락한 노후’, ‘번영’, ‘성공’이라는 힘과 권세를 하염없는 부러워들 합니다. 강대국은 강대국대로, 약소국이나 빈국은 그들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대로 ‘돈’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형국입니다. 이천년 전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재물’이라고 하셨던 예수님 말씀이 요즘 처럼 실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03

    그러나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며, 전혀 다른 진정한 ‘왕’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독서 본문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조국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며 예언을 해야만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렇게 가면 도무지 망할 수 밖에 없는 민족의 운명을 막아 보려고 그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할 뿐입니다. 거짓된 ‘평화’를 이야기하는 달콤한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뿐, 하나님의 진노앞에 패망하고 말 것이라는 예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 취급을 받고,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길이었고, 전하라 하신 바른 말씀을 외쳤을 뿐인데 낭패를 당하고 박해와 핍박에 내몰린 겁니다. 세상이 온통 그를 외면했고, 그는 혼자입니다. 복음서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습니다. ‘참된 목자’, ‘참된 왕’을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5)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왕’은, 인간들이 세우는 ‘왕’과 다릅니다. 슬기롭게 세상을 통치하고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참된 왕’을 통해,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샬롬, ‘평화’가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그 날에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함께 외치게 될 겁니다.(6) 오늘은 억울하고 섭섭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이 약속에 기대어 예레미야는 다시금 일어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응송으로 주어진 누가복음 1장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실 약속의 내일을 바라보았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였던 ‘스가랴’ 제사장입니다. 그의 찬가안에는 하나님께서 ‘왕’을 보내시기로 하신 약속을 지켜주셔서, 빛이 임하고 평화의 길이 열려질 것이라는 기쁨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왕’,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실 평화의 ‘왕’을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04

    이제 복음서를 직면해야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평화의 임금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레미야나 스가랴가 노래했고 또 우리가 그동안 기대했던 ‘왕’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온땅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왕이, 사람들에 의해 조롱을 당하고, 박해를 입고, 결국 십자가 위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살해당했습니다. 끝입니다. 이런 ‘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왕’은 이렇게 되면 않됩니다. 모든 기대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이런 결말은 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일과 본문이 조준하고 있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왕’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왕’이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가 바라는 ‘왕’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권세와 권력으로 모든 이들을 굴복시키는 정복자,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왕’, ‘힘’으로 상징되는 권세자를 기대합니다. 마치 주님 곁에서 높은 자가 되고 싶어하던 제자들처럼, 언젠가 우리도 주님 편에서 으스댈 생각 뿐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왕’은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낮은 그 어떤 이보다 더 낮아짐으로, 그 누구도 비굴함을 당하지 않도록 ‘섬기는 왕’ 입니다. 그의 통치 방식은 몸소 조롱과 희롱과 핍박을 받는 것이며, 그의 자랑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함과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약함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안에서, 처음 ‘왕’을 세워주실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듯 사랑해주는 자가 되어주길 바라셨던 진정한 ‘왕’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왕’은 하고 싶은 것을 저 마음대로 하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도구처럼 여기고 희생을 강요해서는 않됩니다. 저는 왕이라고 으스대고 백성들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이는 ‘왕’이 아닙니다. 양을 위한 이가 ‘참목자’이듯, 제 백성을 하나님 백성처럼 귀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만 ‘왕’이 되는 이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본래적 의미의 왕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왕’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왜곡되었고, 결국 삯군을 ‘목자’로 착각하고 폭군을 ‘왕’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말씀이 도무지 와닿지 않을 수 밖에요.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 34a

     

    이제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시는 ‘왕’은 끝까지 이해하고 용납하셔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왕’임을 알게 됩니다. 

     

     

    #05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이유가 뭘까요? 이 질문을 예수님이 ‘왕’이셔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바꿔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다른 이가 아닌, 예수님이 왕이 되어 주셔서 좋은 것이 뭘까요? 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찬미해야 하는 걸까요.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 베드로전서 2:9a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시니, 주님의 나라에서는 그분을 믿는 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고,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왕’같은 존재가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신들처럼 ‘경배’를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도 않습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 누구도 나와 같을 수 없다고 으스대고, 여기까지 올라와 보라고 채근하지도 않으십니다. 힘이 없어 주저앉은 이들, 걸을 수 없고 상처입은 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서 몸부림 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서 가장 비통하고 처참한 순간을 지나고 있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조차 없는 모든 이들을 위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 아들이 기꺼이 가장 낮은 자보다 더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으니, 이제 그분으로 인해 인간은 세상보다 높아집니다. 이런 왕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경험해온 세상의 왕은 권력을 얻고, 힘을 얻고, 높아지는 순간이면 다른 모두를 저보다 못한 이로 여기고, 도구처럼 부리려고 하는 오만한 이들이었습니다. 돈의 힘이 그렇습니다. 그 권세 앞에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노예’이며, ‘종’일 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누구라도 ‘왕’같은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그 누구도 왕처럼 스스로를 높이거나 으스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주신 덕분에, 우리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강요하고, 폭력과 거짓, 억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거짓된 왕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겁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예수님이야 말로 ‘왕’이시라고 믿었던 이유입니다. 

    그 동안 우리 삶이 헛헛하고 불행했던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정치적인 세속의 왕, 정복자로서의 ‘왕’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자이시라는 말이나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 모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고,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되시거나 ‘왕’이 되시는데 우리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왕으로 부르는 것이 소용이 없고, ‘구원자로’믿지 않으면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쓸모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06

    바울 사도는 2독서인 골로새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교회는 끝까지 넘치는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말합니다.(11) 이것이 왕이신 예수님을 믿는 유익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한다면, 시련의 때나 환란 앞에서 스스로의 신앙과 삶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모든 문제와 역경보다 크신 분이심을 아는 이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왕이신 그분의 영광과 충만함을 누리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19)

    오늘 교회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뭘까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금식이나, 할례나, 전통이 아닙니다. 혹은 그런 것들로 자신을 포장하고 드러내는 권력도 아니고, 그런 것들로 현혹시키는 신비롭거나 화려한 체험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시라는 것, 그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고 시인하게 되는 경험외에 다른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때, 그곳에 있던 백성들, 지도자들, 병사들, 그리고 죄수들까지 모두 주님을 향해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이고 말하는 표현도 제 각각이지만, 그안에는 같은 목소리가 담겨있습니다.

    ‘저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무슨 구원자냐’는 비아냥도,

    ‘여기에서 죽겠으니 어서 나를 구원해달라’는 악쓰는 소리도, 

    자신의 허물과 죽음을 받아들이며 생명의 불씨를 살리고 싶은 간구함도,

    제 인생을 걸었던 희망이 꺼져가는 것이 안쓰러워 일어서 달라고 외치는 제자들의 간절함도 모두 저마다의 ‘구원’을 향한 갈망들입니다. 마치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너희들만은 이 세대를 비춰주는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달라는 부르짖음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걸음이 여기 골고다에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물론 죄수 한 사람에게 남기신 말씀이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남기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누가복음 23:43

     

    예수님은 이 약속의 말씀처럼 '지금, 여기'에 갇혀 있는 우리를 당신께서 가지고 오실 ‘너머’의 나라로 이끌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 공의와 구원을 이루실 분은 주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은 왕국절이며, 또한 감사절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감사가 먹을 거리를 허락하신 것이나, 풍성하게 채워주심에 대한 감사에 그쳐서는 않됩니다. 한쪽은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먹거리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할 때, 한편에서는 ‘여호와 치드케누’ 하나님은 공의의 주님이시라고 했는데 이것이 ‘공의’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의 감사는 그들의 물음에 대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삶이지만 여기까지 이끄셨던 주님께서, 또한 종말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바라보며 드리는 신앙의 고백을 담은 답변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만 왕이시며, 그분의 나라만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른 지식과 앎,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잇대어 살아가십시오. 이 믿음이 다시오실 주님의 날까지, 모든 거짓과 허무로부터 우리를 지키며, 충만한 기쁨안에서 살아가게 해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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