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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1/01 성탄후 첫주 *새해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12. 27. 23:26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전도서 3:1-13

      응송 | 시편 8

    2독서 | 요한계시록 21:1-6a

    3독서 | 마태복음 25:31-46

     

    설교음원

    http://naver.me/GmVGxSCh = '클릭'하시면 설교 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4QV4FmFxFVo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 01

    새해 첫날을 주일로 맞이하며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간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해 첫날은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고 덕담을 나누는 일이 익숙한데, 과연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말씀은 어떤 덕담을 던져줄런지 기대가 됩니다. 올해는 성서일과 (가)해로, ‘마태복음’을 복음서로 독서하게 됩니다. 신년의 주일 본문으로는 마태복음 2장이 배정되어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새해’ 첫날의 본문인 마태복음 25장을 읽겠습니다. 25장에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세가지 비유가 담겨있습니다. ‘열처녀의 이야기’, ‘달란트 이야기’, 그리고 오늘 읽은 ‘양과 염소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가지 비유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의인’이나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에 구별되고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이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고, ‘지금’은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다가오고 있는 ‘그날’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의존하는 것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 02

    여튼 기분 좋은 새해의 덕담을 기대하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만큼 본문속에 등장하고 있는 ‘영생’이라던가, ‘영벌’ 같은 단어들은 위협적이고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말을 계속 듣다보면 왠간해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도 고압적인 무당이나 점쟁이들의 저주?에 좌불안석하는 것처럼 위축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제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맞아들일 때까지는 기꺼이 문 밖에서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협박하실리가 없습니다. ( 요한계시록 3:20)

     

    그러니 차분하게 대체 어떤 사람들이 ‘영생’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이 ‘영벌’에 처해지게 되는지 답을 찾아가 봅시다. 적어도 오늘 말씀안에서 찾을 수 있는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작은 자’는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 됨’, ‘헐벗음’, 그리고 병들거나 ‘옥’에 갇히는 상황 같은, ‘어려움’이나 ‘곤란한 상황’에 떨어져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종말’에 심판주로 오시는 날에, 우리가 오늘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고 판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보면 아찔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쳐왔던 얼굴들, ‘작은 자’들의 서러워 하던 모습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탓입니다. 애써 무심한 듯 무관심하게 여겨보지만, 마음 한켠이 불안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 03

    40절 이하부터 바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습이 임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주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무엇이든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했던 것을 고스란히 임금을 대하며 한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 지금, 여기에서 자신들이 한 행동이 이후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른지를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이를 잘 돌봐준 사람들이나, 함부로 대한 사람들이나 양편의 사람들 모두 억울하고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잘 돌봐준 이들은 더 잘해주지 못했음이 아쉬움이 될테고, 그렇지 않았던 이들은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지 않고는 살아가고 있는 순간의 가치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고난에 내몰린 ‘작은 자’들의 형편을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는 임금의 마음을 과연 누군들 미리 알 수 있었을까요?

     

    지금 ‘작은 자’ 하나를 대하는 것이 임금을 대하는 것과 같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사실 우리가 세상에서 배워왔던 성공의 길, 출세의 기준과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세상은 오히려 작은 자들과의 차별성을 더 많이 가지는 것을 성공의 덕목으로 삼아왔고, 우리는 성공한 인생,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길은 그런 이들과 달라지는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그런 상황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작은 이들’은 우리와는 관계 없는 사람들처럼 무관심하게 대해왔을 뿐입니다. 선행을 베풀거나, 도움 주는 대부분의 일은 자기 만족으로 그치고, 불쌍히 여기는 적선이 되기 일쑤입니다. 늘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작은 자들을 돌보는 길 보다는 여전히 성공을 지향하는 길에 서는 것이 쉽고 마음에도 편합니다. 그러니 본문을 읽는 우리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오히려 우리에게 ‘부담’이 아닌 ‘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우리는 모두 ‘임금’의 앞에 서게 될테지만, ‘임금’을 모시고 섬기는 일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임금의 위상에 걸맞게 섬기려면 허리가 휘고, 깜빡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경을 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임금을 모시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돌보는 일은 훨씬 가볍습니다. 평소에 사는 모습 그대로 똑같이 그들을 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 몸을 대하듯 이웃을 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레위기가 가르쳐온 가르침입니다.

     

    # 04

    ‘연약하고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귀찮고, 힘든 일일 뿐더러, 부러 그의 삶에 개입하고 가까이 해야하는 수고를 무릎써야만 합니다. 책임이 따르고 괜시리 귀찮아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큰 자’를 섬기고, 그에게 잘 보이는 것이 누가 보아도 쉽고, 득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자본의 힘에 길들여져 살아온 탓입니다.

    그런 탓에, 가난하고, 병에 걸리고, 환란에 처한 이들을 향해 동정을 가지기도 힘들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런 이웃들을 존재 자체만으로 귀하게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돈보다 귀하고, 꽃보다 귀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여기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예산이 없어서, 혹은 경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하기도 합니다.어떻게 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을까요? 

    겸손과 덕성을 기르거나, 인격 훈련을 하고, 사회를 개선하고 제도를 바꾸는 일을 통해서 그 일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보이게 할 수는 있고, 어느 순간 그런 수준에 이른 것처럼 만들 수는 있지만, 곧 가식과 허무로 떨어지고 말 겁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은 ‘자신’이 낮아짐으로만 가능한 일인데, 제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 듯해 보인다고 해도, 마음과 영혼이 낮아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떻게 해야 이땅에서 ‘임금’을 섬기는 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종말’의 상황, 즉 주님이 다시 오실 ‘파루시아’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이야 말로 임금을 대하는 일처럼 가치있는 일,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파루시아’, ‘종말’의 때가 이르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마침내 무엇이 중요한 것이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간과하며 살고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겁니다.

     

    # 05

    기독교 신앙이 제시하는 ‘작은 자’를 섬길 수 있는 해답, 오늘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길이 바로 ‘파루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시고,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세계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고, 높고 낮음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통치안에서 보면,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만 중요하게 됩니다. 분리나 차별, 소외로 내모는 세속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 증거는 많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끌어안고 있던 서글픔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마음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내어 드릴까? 어떻게 하면 감사한 마음 고스란히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기도였습니다. 없는 살림, 끼니를 걱정해야할 형편임에도 밥 하기 전에 꼭 먼저 쌀 한줌을 떼어 ‘성미’를 드렸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회 종을 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아무도 없는 교회에 가서 역한 냄새 참아가면서도 웃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하고, 의자를 닦던 일도, 내 소원은 주님 집의 문지기되는 것이라던 마음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말의 날을 지나치게 허황된 것처럼 여기거나, 아니면 무턱대고 문자적이고 사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없는 것처럼 살게 될 때, 삶은 무질서하고 부패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종말의 의미에 깊이 나아가지 못한 채 지나치게 문자화하는 것도 ‘현실’의 삶을 파괴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오늘’과 ‘내일’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이나 그 너머의 ‘이면’도 이어져있습니다. 살아있음은 ‘죽음’과 이어지고 ‘죽음’은 이미 살아있음안에 들어와있는 것처럼, 현실은 ‘종말’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안에 있음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것안에 감추어진 참된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누릴 수 있고, ‘오늘’에 내몰려 다가올 ‘내일’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 06

    여전히 세상에서는 작은 자들, 연약한 이들을 무시하고 그러면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재로 대부분의 경우는 곤경에 처한 이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일처럼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나, 큰 죄를 짓지도 않고, 탐욕이나 큰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익숙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작은 자들에 대한 무관심이야 말로 임금에 대한 무관심이며, 그것이 ‘영벌’이나 ‘영생’으로 갈라지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관심에 쉽게 빠지게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벌’과 ‘영생’이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나, 바로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들고 늙어갑니다. 임금 앞에 서게 될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 자신에게 집중하며 삶을 구원하려고 하지만, 염려나 걱정, 근심할 일은 여전히 끊어지질 않습니다. 외롭고, 지치고, 허무하고, 고독해집니다. 이런 일에서 완전히 자유한 사람도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모든 죽음의 힘으로부터 자유한 ‘참된 생명’을 맛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그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그 날이 바로 ‘종말’이고, ’파루시아’입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는 모두 나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이 ‘주님’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초기 교회 성도들은 삶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미 예수안에서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영혼의 만족과 해방을 경험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만족과 해방은 ‘예수’의 길, ‘십자가 죽음'을 각오해야만 따라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에 빗대어 보면,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이 나실 겁니다. 오늘 우리는 자본과 물질의 힘에 완벽하게 지배당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고, 주님을 믿으며 살아도, 여전히 돈이 없이 살 수는 없는 현실에 묶여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돈과 효율성,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교육도, 문화도, 삶 전체가 다 이 틀에서 작동합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고, 비교에 내몰리게 됩니다. 제게 이득이 되는가 않되는가의 이권을 두고 편이 갈라집니다. 집 값이 떨어진다고 장애우들을 위한 특수학교나, 사회 안전공원 설치를 반대합니다. 집 값이 크게 오르면 좋아하고, 또 한편에서는 집 값이 너무 올라서 절망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이런 현실을 거스르고, 저항하는 겁니다. 거창하게 투쟁을 하라거나, 돈 없이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이 요구하고 바라는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그런 기준을 따르지 않고 무관심해 질 수 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감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나라에 천착하는 사람만이 세상의 요구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더 이상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살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6:31~32)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수준에서 바라보자, 세상에서 작다고 여기는 이들이 그들에게는 결코 작아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런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스스로 작은 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 07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대하는 것에 관한 본문의 말씀을, 어떤 사람을 돌보고, 어떤 이들을 구제할 것인지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본문은 ‘휴머니즘’이나 ‘복지’의 차원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보다 실재적으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작은 자’가 되는 것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참된 생명이 이런 것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종말의 날이 오게 되면 그 날에는 ‘참된 생명’ 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겁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던 주님의 말씀이 내 삶에 실제가 되는 것을 경험해 가는 겁니다. 주어진 오늘을, 주님의 말씀이 드러나는 ‘종말’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 말은,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본 것처럼 ‘영생’과 ‘영벌’의 기준으로 삼던 우리의 모든 생각과 기준이,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동안 ‘생명’ 아닌 것에 몰두하며 살아왔던 삶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마음을 어디에 빼앗긴채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이미 ‘종말’의 날에 ‘영생’ 과 ‘영벌’의 심판을 결정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 샘물, 하나님의 은혜에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심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과 ‘영벌’을 가늠하는 모든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작은 자’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작은 자’가 되어도 괜찮은 겁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인생에서 낙오되지는 않을까?’, 그런 ‘작은 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모든 두려움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장 값진 것을 값없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 ‘오늘’,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더 분명하고 선명해 질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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