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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6 사순절 첫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2. 24. 16:05
#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창세기 2:15-17, 3:1-7
응송 | 시편 32
2독서 | 로마서 5:12-19
3독서 | 마태복음 4:1-11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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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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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Tissot,Jesus Tempted in the Wilderness '일치'(一致)를 향하여
1.
오늘 성서 일과 본문의 공통 단어는 ‘시험’과 ‘유혹’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고 맞이하게 되는 첫 번째 주일의 성서 일과 본문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는 절대적 믿음이 사순절의 끝에 마주하게 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귀의 ‘시험’에서 이기려면 주님처럼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의 근거가 있어야 하고, ‘유혹’에서 이겨내려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시험과 유혹은 계속될 겁니다. 잔뜩 움츠려들거나 회피하거나 무관심하게 돌아서지 마시고, 모쪼록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누가 유혹하는 존재인지, 또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며 나아가야 할 것인지 똑바로 마주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 성서일과 구약 본문인 1독서 창세기는 대체 어쩌다가 인류의 역사가 이런 길을 걷게 되었는지의 기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게 된 기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선악과’ 사건이라고 하지만, ‘열매’ 자체에 놀라운 능력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 열매를 따먹은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 일을 금하셨다는 겁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이나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무엇을 하고, 얻고,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마땅히 따라야 할 권위이며, 생명이 그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할 만큼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말씀을 어기고 뱀의 유혹에 떨어진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오히려 눈이 밝아지고 난 이후에 생명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 없이 벌거벗은 ’자기 자신’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무능하고 부끄러운 존재가 드러나니 괴롭고 불편해졌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아담과 하와도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숨어야 할 만큼 관계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도 된다’고 아낌없이 은혜를 베푸셨는데, 대체 왜 아담과 하와는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던 단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게 되었던 걸까요?
2.
교부 어거스틴은 ‘죄’의 기원은 ‘교만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싶다는 생각을 불어넣은 ‘하나님처럼’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의 정체가 바로 ‘교만함’입니다. ‘교만’에 대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아퀴나스는 ‘과도한 자기 사랑’과 같은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자기 사랑’ 또는 ‘자기 연민’이란 자신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살려는 모든 생각과 일체의 행위입니다. 마치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이들처럼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오직 ‘나’만 중심이 되려고 하는 미숙하고 이기적인 마음과 비슷합니다. 늘 자기 자신이 기준이고 우선인 탓에, 하나님 말씀도 저 듣기 싫으면 외면하고, 받아들이기 거북하면 온갖 명분과 이유를 들어 말씀 듣는 것을 거절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는 변명과 구실만 늘어놓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삶의 중심이나 관심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만 치우치게 되면서부터 늘어나는 것은 내 걱정이고, 채워지는 것은 늘 내 염려뿐입니다. ‘내 생각에는’이라는 기준이 ‘두려워 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고, 더 가지고 싶고, 더 잘해내고 싶고, 더 많이 이루어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닫곤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말씀’을 거부하고 ‘제 생각’대로 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용납’과 ‘인정’을 얻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법치 국가에서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도덕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언행을 따르는 사람이 도덕적 인간으로 인정받습니다. 회사에서는 어떤 사람이 인정을 받을까요? 능력 있는 사람,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인정하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자격이나 조건을 충족하고 이루었다고 ‘인정’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을 만하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도, 정의감이 투철해도 억만금이 있고 세상 모두가 그 능력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우리는 왜,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하나님이 내게 생명을 주신 이유조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조건과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얻을 만한 의로움이란 없습니다.
3.
그런데도 우리는 늘 믿음이나 구원마저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해 왔습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참 좋아’라거나 ‘그 사람은 믿음이 없어’라고 하는 판단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도 근거는 모두 자기 확신뿐입니다. 내 생각을 기준으로 하나님도 그렇게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구원도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건이나 자격을 요구하신다면, 그 순간 우리의 구원은 예외 없이 불가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 빌립보서 2:12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조차 내가 해내고 이룰 수 있는 수준의 업적 즈음으로 생각해 온 탓에, 자꾸만 겨자씨 한 알 보다 큰 믿음을 소유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믿으려고 한다는 것은, 믿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믿지 못하고 있으니 불안하고, 불안하니 더 열심히 믿어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식의 신앙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든 아담과 하와처럼,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질까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자기 오해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내려는 신앙적 피곤함으로 치닫게 만드는 겁니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구원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정죄감에 짓눌리거나,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인정받을 만하다는 교만에 휘둘립니다. 스스로 구원에 합당한 증거와 조건을 성취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어리석음이며, 믿음과 구원의 근거를 자신안에서 찾으려는 오만함입니다. 믿어지든 믿어지지 않든 내 만족이나 확신과 관계 없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 있을 뿐임입니다. 여전히 이교도들의 종교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로마 교우들을 향해 바울은 2독서인 로마서 5:18에서 한문장으로 ‘복음’을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 로마서 5:18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 즉 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받게 되었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종교적으로 노력하고 거룩을 훈련하며 믿음을 강화하는 조건이나 자격을 얻으려 하고, 겉으로 조금 더 거룩한 것처럼 보이고 흉내를 낸다고 해도, 예수 믿기 이전이나 이후나 우리는 그대로 일 뿐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허무로 떨어질 운명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의로워졌다는 말씀보다는 오히려 ‘죄’와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의로움을 얻을 조건이나 자격을 성취하려고 종교적 열심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기로 결단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나 평가가 아니라, 그렇게 여겨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겁니다.
4.
복음서 말씀을 봅니다. 성령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야 하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처음으로 이끌어 가신 곳은 다름 아닌 ‘광야’였습니다. 그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은 악마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내몰려 살아가고 있는 이 땅입니다. 이곳에 오셔서 악마의 시험을 이겨내셔야만, 악마의 시험에서 우리 또한 건져내어주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광야’를 찾으셔야만 했던 겁니다. 악마는 광야에 들어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 의존된 자녀로서 살아갈 것인지, 악마에게 굴복한 채 ‘하나님 없이’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유혹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넘어트려 온 인류를 무너트렸던 자신감 때문일까요?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께도 그는 이빨을 감추고 찾아왔습니다. 또 속여 넘어트리기 위해서입니다. 악마가 예수님께 던졌던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자기의’를 드러내라는 유혹, 그리고 모든 나라와 영광을 얻을 만큼의 ‘자기업적’을 쌓으라는 유혹의 문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직면한 ‘삶’의 문제들입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살 것 같고, 그것 없으면 죽을 것처럼 짓누르는 이 치명적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역사 이래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경에 기록하기를’이라고 하는 짧은 말씀으로 악마의 시험을 모두 무력화하셨습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거나 변명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남들은’이라는 구실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각조차도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순간에도 주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붙잡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는 순간까지 그분의 생애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 마태복음 4:11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권위를 얻고, 내 선택과 삶을 이끌어가는 말씀으로 외쳐지고 선포되는 곳에서, 시험과 유혹은 그치고 악마는 떠나가는 법입니다.
5.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한순간에 두려움에 떨어지기도 하고, 아무래도 틀린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불안하고 초조해하기도 합니다. 왜, 나를 시험에 빠트리셨는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악마의 ‘시험’과 ‘유혹’이 도사리는 ‘광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시험을 경험합니다. ‘시험’이나 ‘유혹’이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오늘도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를 악마가 유혹하고 시험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악마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 마태복음 4:1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는 말씀은 시험에 빠트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시험과 유혹 속에서도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도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주님처럼 말씀에 붙들리도록 도우시고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도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광야’이기에 더욱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광야’를 ‘미드바드’라고 불렀습니다. 말씀이라는 뜻의 ‘다바르’ (דָּבַר )와 장소를 뜻하는 ‘미’ (מ)가 합쳐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 ‘광야’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는 안전합니다. 그 말씀이 생명이시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악마의 유혹과 시험에서 능히 지켜내어 주실 것입니다. ‘광야’는 사방을 구별할 수 없어 먹을 것만 찾아 헤매다 길을 잃기 쉽고 악마에게 휘둘리다 죽게 되는 땅입니다. 하지만, 또한 ‘광야’는 생명의 말씀을 의존하는 이들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이 입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내 인생은 거칠고 투박하고 힘겨운지, 왜 이런 시험과 유혹에 내몰리게 되는지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니까 ‘광야’에서도 살 수 있는 겁니다. 시험과 유혹이 찔러 오는 ‘광야’이니까 더욱 ‘말씀’에 의지하면 됩니다. 형편이나 상황, 세상의 평가나 내 생각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으며 살아가면서,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 길은 악마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쳐야만 갈 수 있는 길이고, 사람들의 외면과 세상의 조롱을 삼켜내야만 갈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연민’대신, 그리스도의 삶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이들만 생명을 얻는 법입니다.
6.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의 속성도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죽음에 짓눌려 있고, 유혹과 시험이 찾아올 때마다 무너질 만큼 연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늘 죄에 지배에 내몰리고 죽음의 위협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격도 조건도 없는 불의한 자'라고 그런 우리를 비난해 올 겁니다. 하지만 애써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려거나, 그럴듯해 보이려고 자기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용납해 주셨고, 그 생명이 우리를 덮었으며, 그분의 나라가 깨진 우리의 세상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고 자랑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최선일뿐입니다. 죽음의 땅을 지날지라도 이끄시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를 이루셨던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악마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의 일치를 향해 ‘사순절’의 여정을 떠나는 순례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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