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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성령강림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5. 23. 19:27
성서일과 독서본문
* 1독서 | 민수기 11:24-30
* 응송 | 시편 104:24-34, 35b
* 2독서 | 사도행전 2:1-21
* 3독서 | 요한복음 20:19-23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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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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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s van Leyden,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1530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 '성령'
1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을 조건없이 받아주시는 방식으로 구원해내십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과, 또한 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에 낙심이 가득하고 마치 믿음에 실패한 것 같을 때마다, ‘믿음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푸념과 아쉬움만 내뱉게 됩니다.
그래서 내심 마치 믿음이라는 것이 종교의 영역에서만 통용되고, 믿음대로 살아도 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그럴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는, 많은 경우에 우리는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그러다보니 믿음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맙니다.
만약 믿음이라는 것이 나는 힘들어서 못한다거나 그래서 특별한 사람들만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기독교 신앙이 보편적 진리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결국 대부분의 신앙의 실패와 허무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마뜩찮게 여기는 완악한 ‘자아’로부터 초래되는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아는 대로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 무지한 우리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많이 잊혀졌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방식은 무시당해 왔습니다.
2
1독서 구약본문인 민수기 말씀은 11장 24절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11장의 초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불안과 원망이 터져나오는 짜증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 동안 ‘만나’외에는 ‘고기’를 먹어 본적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는 말 그대로 ‘광야’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생명’의 젖줄이었음에도, 지금은 불평과 원망의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장실 들어갈때랑 나올 때가 달라도 이처럼 다를 수 있는 걸까 싶지만 목적지인 가나안에 닿을 때까지, 그들은 늘 이 대목에서 비틀거렸습니다. ‘고기 좀 못먹는 것이 대수냐’라고 타박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진중에 계시고 있음에도, 하나님께 ‘내일’을 맡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일상의 문제들에 시선을 빼앗기다보니 어느새 하나님의 은총까지도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손이 능하시다는 믿음마져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이제 그들의 기억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혀져 버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 11:23
모세에게 하신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불평하는 것을 너머 당신을 불신하는 배신의 문제로 여기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도자 모세를 향한 백성들의 원망을 부추겨왔던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72명의 장로들 중에 두 사람이 소집 명령에 불응한 것을 보면, 이들이 모세의 리더쉽에 얼마나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금방이라도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거나 징계가 내려질거라고 충분히 기대할 만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홀연히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모두가 ‘예언’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끝까지 명령에 불응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임하였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일까요? 어떻게 이런 불순종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임할 수 있는 걸까요?
3
2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도 ‘여호와의 영’이 임재하는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120명의 제자들 모두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들 곁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현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그 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상황입니다.
여전히 서슬퍼런 유대교와 로마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저 자신들끼리 모여 믿음을 지켜가는 것 뿐입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조롱과 박해속에서도 제 신앙을 지켜간다는 그것만으로도 대견합니다.
복음서는 이보다 더 먼저 일어났던 ‘성령’임재의 사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수를 잡아죽이고 일당들의 목숨을 노리던 이들을 피해 골방에 숨어들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얼어 붙었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말씀들이 오늘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시지요? 오늘 본문들은 모두 ‘성령’, 즉 ‘여호와의 영’이 임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일과 본문들이 주목하고 있는 여호와의 영, 성령께서 임하였던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요? 여러분 생각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인 ‘성령’이 임할 만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러니하지만, 본문속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믿어지지 않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예수의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분이다’라고 하는 정보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정작 보지는 못하던 사람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는 걸까요?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아득한 일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쌓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와 무관한 누군가의 이야기나 어떤 일이 아니라, ‘나에게는 그렇다’고 하는 사건이며 실감이 될 때, 비로서 ‘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 누구를 안다는 것도 그런 말이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도 그런 뜻인 겁니다. 정보는 내가 얻을 수 있지만, ‘아는 것’은 제 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건이 나를 찾아오고, 자신을 드러내기 이전까지는 불가능합니다. 아는 것의 주체가 ‘나’자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가 어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일이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구원이십니다’라고 하는 명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비밀스럽고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니, 우리의 오늘을 지탱하실 뿐만 아니라 내일을 이끌어 오실 것이라는 내 삶의 선택과 일치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4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만 시간’은 쏟아 부어야 능숙해질 수 있다는 말이고 동시에, '일만 시간’만 투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 아무리 일만 시간 동안 그림을 그려도 고흐나, 렘브란트 같은 화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글쓰기나 습작에 일만 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섹스피어나 권정생 선생같은 작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이라고 다를 리 없습니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자연스레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세계에 갇혀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어릴 적 동네 작은 극장에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 사셨습니다. 정말 포스터와 똑같이 보일 만큼 대단한 실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화가’라고 불러주지 않았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화가’와 그 아저씨의 차이는 뭘까요? 그 아저씨에게 그림은 생계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화가는 똑같이 그려내는 이가 아니라, 그에게 보여지는 세계를 화폭에 옮겨놓는 사람인 겁니다.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 이에게 시인 ‘조병화’ 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시를 쓸수 있을 때까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곡가도, 화가도, 작가도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될때까지, 아니 너머의 세계가 다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은 '발견한 사람들’인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음악이나 글은 생계의 수단으로 전락할리가 없습니다. 그 세계가 바로 자신의 의미와 삶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다림’보다 그런 세계가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장로들이 ‘예언’하는 것을 보고 금지시키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면 그것은 지도자인 모세같은 사람에게나 합당한 일입니다. 반란과 소요를 일으키는 장로들에게 영이 임한다면, 지도자 모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식이라면 말씀에 순종할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이 공동체가 평화하고 생명을 지키며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5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생명’의 참맛을 누리는 것은, 내 인생과 삶이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그런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나주시는 방식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도무지 듣지 않고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자아’와 ‘무지’로 인해 불신에 떨어져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소통케 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는 닫혀 있던 눈과 귀를 열려, 말씀을 듣는 이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려면 먼저 듣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전하고 싶어했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전면에 드러나 있는 것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지금 제자들이 모여있는 그곳에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방언’이라는 것도 무언가 신령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세상은 속이고 기만하고, 상처주고, 유혹하는 소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란스런 세상의 소리에 휘둘려 베드로는 배신자 되게 했었고, 마귀가 가져다 준 속삭임에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상황과 여건이 겁박하는 소리들이 제자들의 마음을 짜부러트려 골방에 갇히게 만들었고, 여전히 예수를 핍박하는 이들의 험상궃은 소리에 내몰려 120명의 제자들이 다락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주님의 제자의 자리를 회복했고, 골방에 숨어들었던 사도들이 회당에서 외치는 이들이 되었으며, 다락방에 모여들었던 이들이 문을 열고 나와 ‘증인’이 되었습니다. 죽을 것처럼 두려워 숨 조차 쉴 수 없던 그들의 숨통을 성령께서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들어와 영혼을 채우니 비늘처럼 눈을 가리던 두려움이 벗겨지고, 거짓과 유혹을 떨쳐내지 못해 답답했던 심령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겁니다. 공기가 돌지 않고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막혔던 숨이 터져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고대인들은 ‘숨’을 쉰다는 것을 ‘바람’이 코로 들어가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람’이 통해야 ‘생명’이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성령’을 대지를 흔들며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어루만지고 풍성한 생명을 깃들게 하는 ‘바람’처럼 생각했습니다. ‘바람’을 뜻하는 헬라어 ‘프로에’와 성령을 뜻하는 ‘프뉴마’의 어근이 같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누가가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과 함께,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고 묘사한 것은 실제로 불이 보이고 바람이 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바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게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도록 우리 귀를 열어 놓으시기 위해 ‘성령’께서 찾아오셨다는 분명한 증거였던 셈입니다.
6
하나님의 영은 72명의 패역한 장로들에게도, 그리고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에게도,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거룩한 영이 임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능률과 목적을 위해 업적이나 성취, 능력을 조건 삼아 차별하거나 소외시키는 우리와 달리, 하나님의 영은 차별함이 없습니다.
자녀들이나 늙은이들과 젊은이들을, 남종이나 여종을 무론하여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던 (요엘 2:29) 주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지켜졌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과 막혔던 사이에 생명의 소통이 일어나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공동체안에서도 소통이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셨던 그날, 다락방 밖에 있던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자신들의 언어로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제자들과 세상이 소통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임재 사건’의 결말을 복음서 주님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요한복음 20:23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 뒤에 ‘죄 용서’에 대한 말씀이 덧붙여 있습니다. ‘죄’는 죽음의 힘인 염려, 두려움, 근심, 불안, 불신, 세속적 가치의 유혹에 빠지도록 하는 근원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이야 말로 눈이 멀고 귀가 닫혀 있는 세상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겁니다.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죄’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은 놀라거나, 술취했다고 조롱하는 것 두가지 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의 통치에 귀기울여, 이득과 목적, 편견과 아집 때문에 높이 쌓아 왔던 차별과 소외의 담을 무너트리고, 죽음앞에 주눅들지 않고 거짓된 생명과 싸우며, 각자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영역안에 말씀에 순복하고 일치되어 살아가는 교회다움을 회복하게 된다면, 세상은 분명히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며 세상이 놀랄 겁니다.
과연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성령께서 ‘예수 따름’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걸음이 옳다는 것을 지지해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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