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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성령강림후 둘째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6. 8. 10:2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12:1~9 혹은 호세아 5:15~6:6
응송 | 시편 33:1~12 혹은 50:7~15
2독서 | 로마서 4:13~25
3독서 | 마태복음 9:9~1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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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죄인들과의 식사 (벽화), 산 파스토레 반전(反轉) : '의인'과 '죄인'
1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유언같은 부탁을 지켜내기 위해 ‘사랑’의 실천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끝이나, 생면부지의 이민족까지 사랑하려는 선교적 열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 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형편에 떨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복음서 말씀을 읽다보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작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도 당신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기득권자들과 늘 대립각을 세우고, 심지어 그들을 향해 독설을 쏟아내기도 하시는 모습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분란과 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문제적 행동일 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갈등하고 계셨다는 것은 늘 어느 편을 향해 저항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과는 구별되어 말씀과 기도만 하면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우리 생각과 복음서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주님의 모습은 너무 달라 낯설기까지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어느 한편에 치우쳐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의 편에 주님은 서계실까요? 마음이 정직하고 의롭고 거룩한 성도들 편일까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이들 곁일까요? 마태는 주님이 서 계신 곳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 10절
‘세리’와 ‘죄인들'에 둘러쌓여 함께 식사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 역시 주님이시다라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주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생각이 오히려 주님 곁에 있는 이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적의 적은 내 친구’라는 식이 아니라, 참으로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이 머물고 계신 곳은 세리 ‘마태’의 집에 계십니다.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모여든 그의 친구들 면면을 보면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사실이지 싶습니다. ‘세리’와 ‘죄인’ 뿐입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민족의 고혈을 빨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매국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업의 특성상 꺼리지 않고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도 일하는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 사회에서 늘 소외되고 배척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쳐진 그들 곁에는 자연스레 사회에서 버려진 이들만 남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로치면 이들은 교회가 그토록 혐오하는 동성애자들일 수도 있고, 척결해야한다고 낙인 찍은 ‘좌파' 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가요? 여전히 이들과 웃고 즐기며 식사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이 불온하게 보이지는 않나요?
2
경건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의 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따져물은 겁니다.(11) 이들에게 주님은 세가지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시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12절 말씀,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13절 전반절 말씀,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13절 후반절인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세가지를 말씀하셨지만 사실 나머지 두 말씀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세번째 말씀에 포함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이 세리나 죄인들, 혹은 이방인들의 편을 들어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두둔해주시는 것처럼 섣불리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편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당신의 편으로 받아주신 것 뿐입니다. 이 말은 누구라도 주님의 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속은 지금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에 목숨을 걸며 살고 있는 그들 면전에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신앙과 삶의 지향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주님은 자신들과 한편일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들의 사정도 바리새인들처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씀앞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나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감동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평상시에 우리는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순절 같은 절기에, 혹은 예배의 자리에서나 ‘나같은 죄인’을 떠올릴 뿐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은 세리나 죄인들처럼 죄를 짓지도 않았고, 파렴치하게 살지도 않습니다. 드러낼 만큼 의인은 아니더라도 법과 질서를 따르고 양심에 따라 교양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죄인’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 주님과 아무런 관계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지금 우리는 ‘의인’이라는 인식과 나는 ‘죄인’이라는 충돌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적인 정체성에 떨어져있습니다. 이런 식의 신앙은 허위의식일 뿐,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3
주님은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거나, 바리새인들에게 ‘죄인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호의적으로 바리새인들을 대하고 편들어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하는 이들이라고 그들을 매섭게 대하셨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있는 이들보다 그들 자신이야 말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늘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종교적 성취나 경건 생활의 성과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구도자적인 태도로 살았습니다. 금욕하고 절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제에 솔선수범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경건한 삶의 성과를 얻었고, 그런 업적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정도 받았습니다. 오늘 교회안에서 이런 분들을 만난다면 틀림없이 모두가 칭찬하고 존경하는 모범적인 신앙인들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는’이라고 말하면서도 늘 ‘내 생각에는’이 기준이 되고 마는 ‘자기의’가 똘똘 뭉쳐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이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천착해야하는데, 자꾸만 경건한 성도가 되고 이런 사람이 되자는 도덕, 윤리적 가르침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정도는 해야 하나님께 용납받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쳐지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신지에 대한 앎은 없고,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에 조급하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지에 불안할 뿐입니다. ‘믿음’과 ‘신앙’에 대해 우리는 예수님과 동상이몽(同牀異夢)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4
1독서 창세기 12장과 서신서인 로마서 4장 말씀 모두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시선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떠나고,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합니다.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램과 간절함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조급함이 되어버립니다. ‘성공한 사람’이라는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세상의 방식과 너무 닮아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믿을 수록 위안이 되고, 자유롭고, 평안해야하는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조바심이 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라는 것이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감같은 심적 상태라면, 굳이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으니 감사한 것인데 무엇을 해주지 않아서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으니 돈도 벌고 진학도 하고 꿈도 꿀 수 있는 것인데, 돈이 없어서 죽겠고, 꿈이 없어서 죽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은 무엇이 본질인지를 왜곡해서, 자꾸만 각자에게 주신 생명을 허무와 결핍으로 내몰아갑니다. 이 지점에서 잠깐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는 ‘주님’을 원하고 있을까요? 믿음이나 그것도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의로움은 아니었을까요? 기독교 신앙, 특히 믿음의 지향과 근거는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5
1독서 선택본문으로 주어진 ‘호세아’ 서는 날카롭지만 따듯한 ‘빛’처럼 이런 우리의 민낯을 들춰냅니다. 아시다시피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음하고 부정한 여인 고멜과 결혼해야만 했고 이를 통해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고발했습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무속적인 것들이나 불교나 이슬람 같은 타종교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말씀이 지목하고 있는 ‘우상숭배’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가나안’을 약속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하는 삶으로 아브라함을 초대하시면서, ‘가나안’이라는 ‘땅’과 ‘후손’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을 배신하는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엄하게 금지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물들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으로 받은 ‘복’은 지금 가나안 민족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며, 오늘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아브라함에게 ‘부유함’과 ‘형통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는 정작 그렇게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세상과 짝하지 마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산에 들어가서 사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문화도, 제도의 편리성이나 안전책들 모두 누리면 않됩니다. 세상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마라는 것으로 읽는다면 국제결혼을 해서도 않됩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이방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하지 마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6
여러차레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지만, 말씀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이것은 거룩하고 저것은 더럽다는 식으로 가르지 않습니다.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마치 있는 것처럼 형상화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는 없는 것을 경배하는 일체의 행위입니다.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화’하고 신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상숭배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절대화’해서는 않되는 것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혼인도 하지 말고, 돈도 벌지 말고, 세상을 끊고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상숭배하지 마라고 외치는 호세아도 결혼을 하고, 먹을 것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런 것 없이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것을 절대화하지 마라는 겁니다.
자본이나 풍요같은 것들, 대표적으로 ‘돈’은 어느 한순간 ‘절대성’을 띄게 됩니다. 오늘 시대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돈’은 절대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돈’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돈’안에는 ‘풍요’라고 하는 마력이 숨어있습니다. 그 마력에 휘둘린 사람은 누구라도 ‘사용’의 도구였던 ‘돈’이 ‘사랑’과 ‘경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겁니다. ‘행복하기위해’ 혹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행복’도 ‘건강’도 저당잡히는 오늘날의 어리석음은, 모두가 돈을 절대화한 탓에 돈의 마력에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미 ‘유사신’처럼 돈이 절대화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누구도 그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도 ‘돈을 절대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기도와 신앙은 돈의 가치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상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절대시하지 않고, 그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호세아 선지자는 6장 3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 호세아 6:3
‘참’을 알면 ‘거짓’은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자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예외가 없습니다. 말씀은 어떠한 사람도 영웅시하지 않고, 어떠한 나라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중심에 놓습니다. 하나님 만이 생명을 가져다 주실 수 있는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것에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 나라’는 ‘명분’일 뿐, 대부분 우리의 관심이 머무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 문제 때문에 삶이 비루하고 힘겹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문제 때문에 세상이 살맛이 난다고도 합니다.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 업적에만 의존하고 매달립니다. 은혜는 주어지는 것이니 기꺼이 기다려야 하고 기다릴 수 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얻어내려고 하고 ‘믿음’은 그렇게 도구가 되고 맙니다. ‘나’를 통해 만족하고, ‘구원’을 경험하는 모습,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날 주님으로 인해 잔치가 벌어졌던 세리 마태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의 관심에 주님은 없습니다. 그들의 시선에는 세리와 죄인들만 들어왔습니다. 온통 자기 자신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참과 거짓,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하나님이 온통 뒤죽박죽 되어 버린 그곳에서,
참 빛이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의 정의를 새롭게 정의해주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 ‘의인’이고,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진 사람은 ‘죄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만을 향하게 되는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제 힘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자기 무능에 정직한 사람,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임을 통렬하게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죄와 죽음에 내몰려 절망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의 ‘구원’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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