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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6/18 성령강림후 셋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6. 13. 10:15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18:1-15 (21:1-7)

      응송 | 시편 116:1-2, 12-19 

    2독서 | 로마서 5:1-8

    3독서 | 마태복음 9:35-10:8(9-23)

     

    설교음원

    http://naver.me/IgNseGLe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Hhb_QbEnI9w='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1

    우리네 인삿말중에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가운 이 인사안에는 지난 밤사이 안녕할 수 없었던 시대의 아픔이 담겨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유대 사회의 인삿말인 ‘샬롬’ 또한 평화없는 불운한 그들의 역사를 대변해 줍니다. 우리는 모두 ‘안녕’이나 ‘샬롬’ 같은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식으로 세상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평화’가 이토록 간절한 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는 ‘참된 평화’가 없다는 반증일 겁니다. 이를 증명하듯 지금도 누군가 버튼 한번만 잘 못 누르면 모두가 공멸할 수도 있는 전쟁의 공포속에 인류는 내몰려 있습니다. 거창하게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개개인의 인생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시련으로 삶이 한순간에 구렁텅이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애당초 인간에게 ‘평화’는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혹독한 오늘을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샬롬’이나,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인사를 합니다. 현실 감각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내일의 막연함을 이겨내려는 현실 부정인 걸까요?

     

    2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건넨 첫인사가 바로 유대인들의 인사였던 ‘샬롬’이었습니다. 서신서인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 사도 역시 로마 교우들을 향해 ‘샬롬’이라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 그리고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교우들 모두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모두 ‘평화’하지 않은 세상을 살면서, ‘샬롬’을 외쳤다는 겁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통치했던 로마였지만, 자신들의 제국의 상징으로 내걸었던 명분은 다름아닌 ‘평화’였습니다. 아마도 ‘팍스 로마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 성전세와 관련한 논쟁에서 등장했던 ‘데나리온’은 바로 로마의 화폐였습니다. 보통은 뒷면에 대사제를 뜻하는 pontiff 라는 단어가 새겨져있지만, pax라고 주조된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pax가 바로 ‘평화’입니다. 그 만큼 로마 제국은 평화에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국을 통일한 로마는 평화를 누릴만한 국가였고, 역사 이래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평화는 로마에게만 평화였다는 겁니다. 그들에 의해 짓밣힌 피정복국가는 피흘림의 고통과 신음만 있던 시대입니다. 이런 형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로마나 오늘 현대 사회나 동일합니다. 오늘도 평화는 계속 이야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어느 한편에게만 유효한 ‘평화’일 뿐입니다.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평화라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언론이 ‘평화’를 이룬 정부, ‘평화’한 세상이라고 외치지만 우리 시대의 ‘평화’는 늘 상대적이고 차별적입니다. 본질적으로 ‘평화’가 실현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 본성이 늘 불안과 허무에 사로잡히고 마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이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만족했지만 오늘은 불만족하고, 이런 것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내 이익을 위해서는 일말의 주저함없이 돌아서고 맙니다. 오늘은 평화한 것 같지만, 이 평화가 언제까지 유효할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3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평화는 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 로마서 5:1

     

    무턱대고 로마의 교우들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는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평화가 이루어지면, 환난이 닥쳐도 인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인내가 결국 성장하고 단단해질 수 있게 해주는 연단이 되어, 결국에는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방식’으로 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 앞에 서있는 우리는 줄곧 ‘과연 그것만으로 가능하냐’고 되묻곤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현실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구원자’라는 말씀을 좀처럼 실감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그릇된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요? 

     

    오늘 1독서 본문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백세의 아브라함과 구십인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라는 놀라움과는 달리, 본문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는 것과, ‘이삭'이라고 하는 유대 족장의 이름이 어떤 유래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사는 삶,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그를 초대하시면서, 그에게 세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땅, ‘복’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과 더불어 ‘자녀’를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열국의 아비가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엄청난 약속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4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처음 약속을 주신 이후로 무려 24년 만입니다. 본문에는 세 사람의 나그네가 찾아온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대리자들이 누구인지 보다는 언제나 그들이 누구의 대리자로왔는지에 주목합니다. 야곱이 자신과 씨름하던 어떤 사람을 ‘하나님’을 대면한 것과 같다고 했던 창세기 32장이 그런 표현입니다. 여튼 하나님은 내년 이맘 때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이듬해에 말씀 그대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어떤 마음으로 읽으셨습니까? ‘믿기만 하면 100세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렇게는 아니더라도, 그런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해주시지 못하겠느냐는 생각은 없으신가요? 어떻게든 믿음을 가져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 약속이 성취되어 다음해에 이삭이 태어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 아브라함은 ‘약속’만 받았을 뿐입니다. 약속을 받았던 75세부터 두번째 약속이 있던 99세까지 24년이나, 다음해까지의 일년이나 기간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24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년이나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힘겹고, 일년 뒤에도 별다른 일이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5

    장막안에 숨어서 이 과정을 지켜보며 어이없어 하던 사라가 참지 못하고 헛웃움을 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하는 사라의 태도가 불경건해 보인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나이 구십에 그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똑같을 겁니다. 우리는 그녀를 비웃을 자격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개연성있는 하나님의 약속 조차도 믿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상하게도 그녀의 웃음이 제게는 세상에 배신당하고 인생에 지친 이들의 늙그막에 자식을 얻어 넉넉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이 어디에 있느냐’ 원망섞인 푸념 처럼 들립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속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처해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믿을 수 없던 ‘사라’의 처지는,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역사속에서 패망하고 해체될 수 밖에 없는 형편에 내몰렸던 이스라엘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늘 ‘하나님의 약속’만 있었을 뿐, 현실은 냉혹하고 잔인했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 거려보아도 약속이 성취될 조짐은 보이질 않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서러웠을까요? ‘오늘의 환란’이 ‘소망’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로마 교우들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고, 말씀에만 잇대어 오늘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삶도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운명, 같은 처지입니다.

    그러니 ‘사라’는 약속이 있는 말씀, ‘복음’을 받았지만 여전히 무거운 현실에서 웃지 못하고 있는 우리 뿐만 아니라, 말씀이 소망이 될 수 없어 절망스런 현실에 내몰려 있는 모든 이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5

    복음서 말씀에도 똑같은 현실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듣게 되는 주님의 첫 마디 말씀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 37b

     

    주님의 말씀처럼, 마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고생에 지치고 삶 소망마져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목자’를 잃은 양처럼 처량해보입니다. 약속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에도 죽음의 힘은 좀처럼 물러설 것처럼 보이질 않을 만큼 고통과 절망, 죽음의 힘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짓눌리고 모두가 포기하고 싶어졌을 바로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일깨우신 것이 3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 38

     

    그리고 이후 10장에는 추수할 일꾼으로 세워진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서 말씀의 핵심은 9장의 후반부에서 읽게되는 두 말씀안에 담겨있는 셈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 3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달라고 구하라’고 하신 까닭은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고’, ‘하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고쳐주는 일’의 시급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세워질 추수할 일꾼이나, 일꾼으로 세움받은 제자들이 해야할 일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그 일이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추수하러 가야할 때’라던가, ‘추수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결단이 새롭게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찬찬히 38절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추수하는 일입니까,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추수하러 가고 싶다고 하셔도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주인의 밭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도 주인이 응답하시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해, 응답이 주인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6

    이 말씀에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선교적 사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기도만 하면 다 될 것이라고 던지는 주술적 위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해집니다. 추수하고자 하는 주인의 의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자신의 열심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믿고, 그런 하나님을 좀 믿으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맘대로 되질 않습니다. ‘오직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를 앞서는 것은 대부분 말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뜻입니다. ‘말씀이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아멘’ 이라거나, ‘믿습니다’라는 고백 뒤, 마음 어디쯤에선가 시작된 ’그러나’라는 울림이 멈추질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는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라든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그러나’라고 말끝을 흐리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분은 아니지만, 내일이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분이지만, 내 자녀의 오늘을 두고볼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제 창세기의 이야기와 로마서 말씀을 매듭지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는 그 때, 사라가 구십세가 되는 그 해에 이삭이 태어날 것을, 그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환란이 인내가 되고, 인내가 연단이 되며, 연단이 소망이 될 것이라는 것은, 방관자가 아닌 환란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지금, 오늘, 여기에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말해도 그것은 감정적인 자기 확신이나 현실에 대한 체념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 불신에 떨어질 수도 있고, 큰 소리친 것이 무색해질 만큼 형편없는 수준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소망이 없다면 연단은 무의미합니다. 올림픽에 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올림픽에 나가려고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단이 아니라면 인내는 자학이 될 뿐이고, 인내할 수 없는 환란은 죽음처럼 고통스러울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약속의 말씀은 거꾸로 작동하고, 그런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종말’에서부터 거꾸로 지금의 우리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내일’, 즉 하나님께서 완성시키실 ‘종말’에 우리 신앙의 모든 근거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큰 나무만 보려고 합니다. 작은 나무나, 그보다 작은 싹은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언제 그런 나무가 되느냐고 조급하고 채근할 뿐입니다. 하지만 죽으면 모두 흙이 될 뿐이라는 사실에서 보면 언제나 그것은 나무였습니다. 인생도 동일합니다. 어떤 면에서 실패할 수도 있고, 건강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겹고, 비교에 내몰려 서러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말’에서 보면 그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7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 로마서 5:5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그 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쯤되면 언제까지 성령이 채워주실 것을 또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고, 왜 지금 나에게는 그렇게 부어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왜 어떤 사람은 죽고 나는 살아있는가?’와 같은 물음 처럼, 세상은 알지 못하고 믿으려하지 않는 그것을 알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늘 공평하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에게 성령은 부어져야만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거부할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고 자기 자신 조차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성령은 알고 계시고,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는 거부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해도,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결국은 성령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언약과 인도하심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삶의 방향을 정했지만 그런 신적 체험이나 하나님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24년 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력한 삶을 버텨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장막앞을 지나는 나그네들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단박에 보통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환란이나 시련이 밀려오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지 못할 만큼 흔들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이루내실 ‘내일’에 자신의 영혼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뿐, 스스로 내일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완성시킬 ‘종말’에 우리 모두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해주실 겁니다. 주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사실을 확증하여 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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