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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성령강림후 넷째주 * 순교자기념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6. 21. 10:3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21:8-21 혹은 예레미야 20:7-13
응송 | 시편 86:1-10, 16-17
2독서 | 로마서 6:1b-11
3독서 | 마태복음 10:24-39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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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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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e Doré - Abraham Sends Hagar and Ishmael Away '광야'로 내몰린, 사람들
1
지난 13일 난민 750명을 태운 난민선이 그리스 해안에서 침몰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104명은 구출되었지만, 78명이 사망하고 현재 수백명의 생사가 불명인 상태라고 합니다. 생명을 찾아 자신들의 조국에서 떠밀려진 이들이 돈에 눈이 먼 난민 브로커들에 의해 죽음에 내몰린 사건입니다. 기사에 의하면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자와 아이들을 컨테이너 안에 가둬두었던 탓에 참혹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목사로서 감당해야하는 침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그런 땅에 태어나기를 원했던 사람은 없었을텐데, 왜 그런 땅에 태어나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신학 이론 따위로는 도무지 위로가 되질 않습니다.
브로커들이나 난민구조에 뒷짐을 진 채 느긋한 대응으로 사고를 야기한 그리스 정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어디선가 아찔한 물음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무엇했느냐?’
따지고보면 난민들이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 팽개쳐졌던 그 참혹했던 시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안한 하루를 느긋하고 사치스럽게 누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적어도 그 시간 우리에게 그들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성서일과 본문안에서 우리는 똑같이 참혹한 상황을 엿보게 됩니다. 여기 광야로 쫓겨난 안타까운 모자가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아브라함이 초조함에 내몰려 저질렀던 불신의 대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게된 피해자들일 뿐입니다. ‘사라’를 통해 ‘이삭’을 얻게 되자, 아브라함은 그들을 브엘세바 광야로 쫓아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라’의 시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도 제 자식인데 물 한부대와 먹을 것 손에 쥐어주고 뒤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정내미가 떨어집니다. 31절과 33절에 보니, 그들 모자를 죽음에 내몰고 돌아왔던 그가 ‘우물’ 하나를 얻게 되자 태연스럽게 에셀나무를 심으며 하나님 덕분이라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물이 없어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사람도 아닌 ‘양’들 마시게 할 우물을 얻었다고 ‘복’받았다고, 복된 인생이라 말하는 그의 천박한 신앙은 악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자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범’내지는 방조에 의해 살인을 범한 범죄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더 서러운 것은 ‘아내 사라의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주신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복주시고, 어떤 이들은 죽음에 방치하는 차별적인 신,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불공평한 이 세상을 방관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2
우리는 아브라함편에 서서 불행에 떠밀린 모자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운명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갈’도 ‘이스마엘’도 자신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질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을 겁니다. 적어도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지금 ‘사라’와 ‘이삭’이 누리는 평화는 모두 자신들의 것이었고,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물도 먹을 것도 떨어져가고,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바라만 봐야하는 현실감 없는 처절한 상황에 떠밀려있습니다. 하루를 또 어떻게 살아야 할른지 걱정해야만 하고, 다른 집 자녀들 처럼 변변하게 해줄 것 없어 늘 미안할 수 밖에 없는 우리네 형편입니다. 하지만 느닷없고 폭력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힘앞에서 보면, 당장 죽게 생긴 하갈이나 이스마엘 뿐만 아니라,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할른지 모르는 우리도, 그리고 살만하다고 말하는 아브라함과 사라까지 모두가 똑같은 운명에 놓여져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런 때가 언제, 어떻게 찾아오게 될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내일의 불확실성 앞에서, 두가지 선택을 하곤 합니다. 마치 이런 날이 없을 것처럼 모른척하며 오늘에 매달려 살거나, 어떻게 하면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몸부림치는 겁니다. 살아가는 형편은 달라보여도, 양쪽 모두 기쁨이나 행복이 아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인간 실존이며, 우리의 한계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해도, 세상 사람 모두에게 칭찬받는 명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어느 한편에서는 만족스러워 보여도, 한순간에 두려움에 휘둘릴 뿐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지고 두려워하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두려워 합니다.
서신서인 로마서 말씀은 이런 인간 실존을 통렬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 로마서 6장7절
3
죽은 사람은 탐욕이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법입니다. ‘두려움’과 ‘염려’, ‘근심’같은 죄의 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는 사실은 곧장 사람은 죽을 때만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죽어야만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바울의 말이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닌 겁니다.
‘죄’의 힘은 ‘죽음’이고, ‘죽음’의 실체가 바로 ‘죄’입니다. 제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이면 누구나 ‘살고자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세련되고 인자한지와 관계 없이, 이기적일 뿐입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 따위는 없습니다. ‘죄’와 ‘죽음’은 사람들을 거칠게 자신안으로 구부러지는 욕망으로 몰아세웁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런 두려움은 도덕, 윤리적 문제로도, 마음을 다스리거나 통제하는 훈련으로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망이 강해도 죽음이 찾아오면 욕망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천인공노할 악인이라고 온 세상이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죽음 뒤에는 죄의 유혹에 더 이상 사로잡힐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죄’는 ‘나 자신’이 살아있을 때만 작동하는 힘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는데도 여전히 허무하고, 두렵고,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혔던 이유,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불안과 두려움에 휘둘리게 될 겁니다. 살아있는 한 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바울의 가르침, 죽어야만 죄에서 해방된다는 기독교 신앙은 옳습니다.
4
제자들을 향한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은 당시 제자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처해있던 암울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고 순교할 수 있던 이들의 믿음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우리는 초기 교회 공동체와 신앙의 동기 자체가 다릅니다. ‘영생’하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외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고 신앙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들은 ‘십자가’라고 하는 예수의 죽음에도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습니다. 애당초 신앙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환란과 역경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운명을 마땅하게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길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회피하고 외면하며 살 것인지를 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초기교회 공동체는 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박해와 핍박과 환란을 회피하지 않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았던 겁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사실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비난하던 유대인들처럼, ‘십자가’를 꺼려합니다. 단지 ‘부활’만 얻고 싶고, ‘천국’만 가고 싶을 뿐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 마태복음 10장 28절
이 한구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한 그들이 얼마나 극심한 상황에 내몰려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마땅히 여긴다고는 해도, 늘상 ‘죽을 것 같은’ 위협에 내몰리는 형편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음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교회는 승리한다’는 말이 이런 겁니다.
5
분명 주님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왜 지금도 숱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제 아무리 사나워도 그들은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위로가 될 만큼 큰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감이 나질 않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몸은 죽어도’라는 현실적 두려움이 더 커보인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벗어날 수 없게 되어 버린 겁니다. ‘몸을 어떻게 살릴까?’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은 영혼의 풍성함을 얻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 마태복음 10장 29절
이 말씀의 핵심은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입니다. 이런 말씀을 ‘결국은 또 하나님이야?’라고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읽고 설교로 들은 정보가 아닌, 내안에 단단히 굳은 모든 것을 깨트리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사건’으로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이라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는 한 결코 생명의 풍성함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말씀이 ‘아멘’이 되는 순간이면 삶을 우겨싸는 어떠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내 몸을 어떻게 살려내야할 것인가가 아니라, 힘을 다해 어떻게 ‘영혼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영혼이 풍성해 져야만 몸을 죽일 것처럼 위협하는 세력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절망과 슬픔을 넘치는 기쁨으로만 덮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엄마 품안에 안겨 잠든 작고 여린 ‘아가’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의 품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아서, 쌓아놓은 재물이 많고,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 품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 품안에서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폭풍과 파도에 두려워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합니다. 온 영혼을 집중해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해야하는데, 이렇게 해야 살 것 같고, 저렇게 하면 죽을 것 같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휘둘리고 맙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말씀이 실감이 나고 현실이 되지 못한 채, 허무한 공기처럼 빠져나가니 참으로 죽을 것만 같습니다.
6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야말로 ‘브엘세바’ 광야입니다. 주어진 일상과 삶에 투덜거리고 있을 때, 광야 저편 어디선가에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죽음에 내몰린 이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나는 ‘아브라함'처럼 ‘우물’을 얻었으니 이제는 ‘평화’하다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애당초 우리는 모두 똑같이 ‘브엘세바’ 광야에 내몰려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은 누가 ‘하갈’이 되고 누가 ‘이스마엘’이 될른지도, 언제 갑자기 이 평화가 깨어지게 될지 모릅니다. 이쯤되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자신이 없고 영혼은 조급해지며, 우리 본성은 또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라도 하려고 들겠지만, 먹거리와 물 한가죽 부대, 심지어 우물을 얻게 된다고 해도 광야에서의 내일은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러워하던 아브라함에 의해 두 모자가 죽음에 내몰렸다는 것처럼, 오늘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을 광야로 내몰고 있습니다. 바다 건너 이웃 나라에서는 방사능 오염수를 대양에 버리겠다고 하고, 정치적 이권에 눈이 먼 이들은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로 인한 환경 오염이 전 지구 공동체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탐욕에 눈이 멀어 멈추려고 하질 않습니다. 어둠의 힘이 세상을 온통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몸을 죽일 듯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사납고 탐욕과 폭력으로 생명을 파괴하고 있지만, 우리는 누구의 생명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의 생명마져 벼랑 끝에 내몰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 자신이 파괴자였고, 방조자였으며, 또한 피해자들입니다. 주검이 뒤덮인 광야로 쫓겨나 있으니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 애처로운 삶에 닿지 않습니다. 무관심하고, 무능력합니다. 우리는 버려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21:17~18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의지해야할 분이 누구인지는 명백합니다. 제 자식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어미 ‘하갈’의 신음을 들으신 분, 그들을 찾아내신 ‘하나님’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불퉁거리지 말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죽음에 내몰렸을 때 누가 지켜낼 수 있을까요? 죽음에 무너지는 그 순간에 누가 우리 곁을 지켜주고, 누가 어둠의 장막을 찢고 죽음에 삼키워진 우리 영혼을 찾아 낼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 가운데, ’죽음’을 이기신 분은 그리스도 한분 뿐입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비록 몸은 쇄하고 파괴되고 죽임당한다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를 찾아내시고 다시 살려내주실 것입니다. ‘죽음’이 왕노릇하는 광야 한복판에 내몰렸지만, 죽어도 다시 사는 ‘약속’을 기쁨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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