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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9/17 성령강림후 열 여섯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9. 13. 15:2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14:19-31 혹은 창세기 50:15~21

      응송 | 시편 114

    2 | 로마서14:1-12

    3독서 | 마태복음 18:21-35

     

    # 설교음원

    http://naver.me/G87axadh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xC1vfHy80C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후손 (Nicolas Poussin, 1633–34) /위키피디아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Deus dixit)

     

    1

    성경에서 한국교회 청년들이나 성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별다른 이견 없이 ‘요셉’이나 ‘다니엘’ 정도로 의견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요셉'이나 '다니엘'이 환란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켜냈던 입지전적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누리고 얻었던 것들을 동경하고 부러워할 뿐입니다. 특히 ‘다니엘’같은 경우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면서도 제국의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부하고, 오히려 ‘거룩함’을 선택했던 믿음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서슬퍼런 명령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풀무불과 사자굴 속에 던져짐을 당하였지만, 놀라운 기적을 통해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 그는 신앙의 순전함이라던가 순수한 믿음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교회에서도 신앙의 결기라던가 믿음의 본을 받으라는 차원에서 그와 관련된 설교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오늘 2독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니엘’의 믿음을 그닥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오히려 ‘다니엘’의 믿음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기준을 어리석다고까지 말합니다. 바울의 눈에, ‘다니엘’은 음식을 가려먹는 사람들, 즉 거룩한 ‘율법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인물일 뿐입니다. 이들 때문에 오히려 ‘음식’을 가려먹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이들을 ‘믿음'이 좋다거나 '신실'하고 '거룩'하다고 여기는데, 사도 바울은 오히려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 걸까요? 

     

    2

    1독서인 구약 출애굽기 말씀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질문하는 우리의 시선을 전혀 새로운 곳으로 돌려놓습니다. ‘유월절’을 지낸 이스라엘은 ‘자유’를 향해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번 째 재앙앞에 무릎을 꿇었던 바로와 제국의 군대가 곧장 이스라엘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씨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스라엘의 ‘자유’와 ‘생명’을 노리며, 바로와 제국의 군대가 코앞까지 뒤쫓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쫓기고 쫓기다 결국 막다른 ‘홍해’앞까지 내몰렸습니다.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고, 뒤로도 돌아갈 수 없는 벼랑 끝입니다. 어느 편을 선택하더라도 결국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절대적인 절망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놀라운 사건을 전해줍니다.

    밤이 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이 밀려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과, 그뒤를 쫓던 바로의 병거와 기병 모두가 홍해에 삼키워져 몰살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파라오의 이집트군이 홍해에서 수장되는 그림(Frederick Arthur Bridgman, 1900) /위키피디아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이제 성경을 잠시 덮어보십시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장면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남았나요? 어떤 분들은 바다가 어떤 방식으로 갈라졌는지, 물이 벽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광경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혹은 바람에 의한 것인지 썰물에 의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하실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의 감상평이 아니라, 성서기자가 보았던 것, 그리고 이 사건안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세요. 성서기자가 전하려고 했던 본문의 핵심은 마지막절 31절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 출애굽기 14:31

     

    성서기자에게는 ‘홍해’가 갈라졌다거나, 마른 땅처럼 건넜다거나, 애굽의 병거와 기병이 몰살당했다는 것은 핵심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적 기술인지, 비유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후대의 역사적 평가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단 한번도 생각하거나 기대해보지 못했던 어떤 놀라운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놀라 누구라도 한마디 입도 뻥긋할 수 없는 아득한 무엇인가를 보게 된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대 제국 애굽을 멸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홍해 앞에서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3

    본문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끊임없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도하심 아래 이루어지고 있고, 모세는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침묵하고 있습니다. 기적도 기적 나름입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을 경험했으니 당연한 겁니다. 말을 잃는다고 하지요? 백척간두에 오른 것처럼 압도적인 사건앞에 서고보면, 더 이상 ‘언어’라는 것은 쓸모를 잃게 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던 ‘Deus Dixit’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건 앞에 서는 것이 이런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이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될까요? 무엇을 해야하고, 어떤 열심을 다하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 다시 한번 본문을 유의깊게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이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심이 사건으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시니 ‘자유’와 ‘해방’, ‘구원’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은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계시’사건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에도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나 생각, 계획의 성취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찾아내시고, 구원하시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거룩한 ‘두려움’, 압도적 ‘경외감’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서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럴 수 없다고, 왜 그렇게 해야하느냐고 따져물을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출애굽기 14:13a

     

    바로 앞절인 13절에서 모세가 외쳤던 그 외침, 기자가 시편 46편에서 외쳤던 그 외침, ‘너희는 가만히 있어'이야 말로 바로 하나님 경험의 핵심인 겁니다. 이런 경험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그저 더욱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4

    오늘 복음서 말씀은, 지난 주일에 이어 ‘용서’에 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용서’이 수준과 정도가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 마태복음 18:22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입니다. 여기에서 일곱이라던가 일흔 번은 ‘그 만큼’이 아니라, ‘끝까지’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용서’란 모든 것을 끝까지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를 해코지 한 이를 한 번 눈감아 주는 것조차 억울한 우리에게 주님의 명령은 수준 자체가 터무니 없습니다. 이렇게 불퉁거리고 있던 이들에게 주님은 비유의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 유명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왔던 말씀이고, ‘용서’에 관한 판에 박힌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저 ‘좋은 말씀이다’는 식으로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우선 ‘용서’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아피에미’(φίημι)는 ‘놓아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를 통해 무엇을 놓아주는 걸까요? 나를 화나게 만든 이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나는 힘들고 억울한데 왜 너만 맘 편하게 ‘놓임’을 얻어야 하느냐는 ‘억울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말씀에서 ‘놓임’을 얻어야 할 대상은 우리들입니다. 사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히려 ‘용서’해줄 수 없는 분노, 억울함, 미움, 증오에 내 생명이 사로잡혀 괴로운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증오, 억울함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놓아주는 일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놓을 것’을 놓아주고, ‘풀린 것’은 묶어 줄 수 있을까요?

     

    5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용서’는 선택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당위’의 문제, 즉 마땅한 명령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비유를 보면, 우리 자신이야말로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한한 용서’, ‘차별함이 없는 용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탕감 받은 빚과 비교하면 ‘육십만 분의 일’ 밖에 않되는 작은 빚도 용납해 주지 못하는 배은망덕했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끼친 백 데나리온 만큼의 억울함, 손해, 아픔, 상처를 일만 달란트 즈음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마땅하지 않고,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늘 풀려있고 자유롭지 못한 채, 여기저기 아픔과 증오와 미움으로 묶여 있는 겁니다.

    두번째, 복음서 이야기는 ‘용서’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 마태복음 18: 23절 

     

    ‘나’ 자신이 받은 ‘용서’를 실감하고 살아가는 것, 용납해주신 주인의 은덕 때문에 일만 달란트 만큼의 가치 있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핵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이 능력이 부어질 때 비로서 우리는 ‘놓아주는 사람’, ‘용서’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죄’도 없음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질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빚을 탕감받았다는 것, 은혜와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 채 살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즈음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시는 하나님, 그 만큼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며,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결국, ‘백 데나리온’에 묶여 자신을 놓아(용서)주지 못했던 그 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그는 백 데나리온을 일만 달란트 만큼의 무게로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도 일만 달란트에만 시선이 머뭅니다. 스스로 짊어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짐을 짊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백 데나리온도 놓아줄 수 없을 만큼 무능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준에서 구별하고, 분리하고, 용서하고, 더 거룩해지려는 방식으로는 ‘일만 달란트의 채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식의 ‘개량주의’, ‘성장주의’가 바로, 지난 주일 함께 읽었던 구약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애굽’의 문화와 우상들입니다.

     

    6

    이제 다시 설교 머리에서 던졌던 물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나, 도달하게 될 어떤 수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우리 밖에 있는 압도적인 무엇인가를 마주하게 되었다는 경험이 훨씬 근본적이고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월절’마지막 재앙이나 ‘홍해’를 건넜다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의 제국을 멸할 뿐만 아니라 ‘홍해’를 가로막으시는 분, 모든 것들의 기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분 앞에서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변명할 수도 없고, 자신의 기대와 뜻을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응답할 뿐입니다. 그런 압도적이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면, 비로서 살아 숨쉬는 것, 밥 한끼를 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 홀로 버려지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보다 큰 은총 사건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서 우리는 모든 억압과 강요와 불안, 염려, 두려움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는 겁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나’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우리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날 삶에 두려움이 드리워지고 극심한 환란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과연 나를 구원하실까?’,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는가?’, ‘내가 과연 잘 믿고 있는가?’와 같은 ‘의심’이나 ‘회의’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런 연약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믿을 수 없고 ‘나’를 믿을 수 없으니 그러니 더욱 ‘하나님’께 운명을 맡겨야만 합니다. ‘내 믿음은 이런 수준’이라고 낙담하거나, ‘이런 나를 받아주실까’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백 데나리온 조차 놓아주지 못하는 우리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탕감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선택을 영원토록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겁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오히려 '말'이 없어집니다. 많은 말을 할 필요도, 부산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주님만을 의지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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