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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3 대림절 첫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2. 1. 19:2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64:1-9
응송 | 시편 80:1-7, 17-19
2독서 | 고린도전서 1:3-9
3독서 | 마가복음 13: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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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재림'
# 1
_ 오늘 우리는 2023년 대림절 첫주 기다림의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불을 밝힌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목적은, 어둠 때문에 볼 수 없던 무언가를 찾아내고 보기 위해서일 겁니다. 대림의 초를 밝힘으로 우리는 지난 이천년 교회 역사에 동참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밑으로 향할 수록 세상은 한해를 떠나보낸다는 허무와 소비문화가 부추기는 분주함과 소란으로 치닿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림의 기간 교회는 한해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날들이 오고 있다는 마음으로 설레이게 됩니다. 그 날을 가지고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기다림은 상황이나 여건과 무관하게,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두의 마음을 풍성하게 채우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애타는 마음 끌어안고 버텨온 한해의 시간은, 자칫 또다시 기다림이라는 고개 앞에 서게 된 우리를 쉽게 지치고 무너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이 기다림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않을까, 아무것도 바뀌는 것 없이 이렇게 기다리다가 망하는 것은 아닐까? 섬칫한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기다림이라는 것은 ‘믿음’의 문제와 직결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망하게 내버려두실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면 기다림은 소망이 되겠지만, 그런 믿음의 걸음이 남아있지 않다면 ‘기다림’은 또다시 짊어져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을 삶의 근거로 삼으며 교회 공동체는 지난 이천년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의 재림을 향한 기다림이 올 한해 더욱 사무치고 깊어졌을까요? 이 만큼이면 족하다 싶던 행복한 순간이나 눈물을 꾹꾹 삼켜야만 하던 날에도, 주의 재림은 또 하루를 살아내도록 이끌어주는 이유가 되었습니까? 혹시, 세밑의 기쁨의 취해버린 세상처럼, 재림의 시간과 무관하게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되어 살아온 것은 아닌지요?
# 2
_ 복음서 말씀은 이런 우리를 다시금 ‘주의 재림의 날’로 이끌어줍니다. 본문은 두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집을 떠나 멀리갔던 주인에 관한 비유가 들어있습니다. 두개의 비유는 정해진 결과가 분명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나무에 문제만 없다면 열매는 언젠가 반드시 맺힐 겁니다. 멀리 떠났던 주인도 반드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매가 어느 순간에 맺힐지를 모르고, 종 또한 주인이 언제 올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주인이 지금이라도 당장 제집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하는 종이라면, 오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잘 돌고 열심을 다해도 정작 열매 맺는 시간을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도 전적으로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입장에서 놓치면 않되는 이 비유의 핵심은, 그날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알 수 없다’것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거나,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으니 막연하고 답답한 것은 변함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기독교 신앙안으로 깊이 들어서지 못한 겁니다.
‘알 수 없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는 ‘임박성’에 있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등뒤에 와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임박성’입니다. 하지만 ‘임박성’이라는 말을 곧장 지진이나 해일같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것으로 연결짓거나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의 징조로 사용하고 있는 이런 단어들은 이천년전 로마의 지배와 박해 아래 있던 상황을 염두하고 씌여진 표현일 뿐만 아니라, 묵시문학적 비유로 표현된 상징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여튼 ‘임박함’이라는 말에서 몇시 몇분 몇초와 같이 구체적인 시간을 찾으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임박함’은 구체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형편에 처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시험이 임박했다’는 말이 시험을 치루게 되는 12월 25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치뤄야만 하는 운명에서 피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뜻하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사십년도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한참 재절거리던 우리에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운명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날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신 선생님께서 교탁앞에 서시더니 책을 모두 가방에 집어 넣고 연필만 꺼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시험지를 나눠주시는 겁니다. 아뿔싸, 낭패였습니다. 지난 중간고사에 부정행위가 있었던 것 같아 재시험을 보게 된 겁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이건 부당하다고 한마디도 못한 채, 꼬박 오전 시간 내내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생을 바라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도 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언제라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고, 그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을 실감하며 사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느닷없이 그날이 찾아온 순간에야 비로서 우리는 살아있다 생각했지만, 죽음이 임박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늘의 운명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런 날은 없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는 해도, 감히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언제인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알 수 없으니’ 지금 당장, 그리고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렇게 우리에게 임박해 있습니다.
# 3
_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향한 관계성에 들어간다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신앙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발견했음을 전제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안에서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던 이 사건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루실 생명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생명, 죽음을 뿌리치는 ‘영생’이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러 자신에게 주어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또한 실감하게 됩니다. 모른채 지나칠 수는 있지만, 일단 참된 생명을 엿보게 되었는데 그런 생명이 온전하고 충만하게 내게 주어질 날이 간절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염려나 근심이 무너트릴 수 없는 기쁨, 좌절이나 절망, 두려움과 의심이 빼앗아갈 수 없는 행복, 그리고 죽음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채워져도 금새 사라지고 말 것들에 매달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정체성을 언제나 ‘주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 1:7
하지만 바울의 이 외침안에서 주의 재림을 바라보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인식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엿보게 됩니다. 이 물음에 먼저 답해보세요. 지금, 주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 안에 계시다고 답하신다면, 이 대림의 기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다시 오실 주님은 어디로부터 오시는 걸까요? 반대로 승천하신 이후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여기에 계시지만 여기에 없고, 여기에 없지만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말씀은 ‘모순’일 뿐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런 말씀을 진지하게 끝까지 밀어부치지 못한 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고 맙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4
_ ‘용어’부터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바울이 말한 ‘주의 나타나심’은 ‘재림’을 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나타나심’에 해당하는 단어로 ‘아포칼립시스’ (Αποκαλυφιs) 즉 ‘계시, 폭로’라는 뜻하는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덮개를 벗겨내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비밀은 폭로된다는 의미입니다. 무언가 조금 어색하고 이상하다 싶지 않으신가요? 지금껏 우리는 ‘주의 재림’이라고 하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사건으로만 생각해 왔지만, 일단 ‘폭로’나 ‘계시’라는 말 자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나타나심’이라는 말을 통해 바울이 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주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어떤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다만 어떤 이들에게는 숨기워진 비밀이었을 뿐입니다. 비록 이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고 없는 것만 같은 주님이었지만, 믿음으로 구하고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고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역사를 찢고 그 날에 드러날 참된 생명이 주님안에 있으니, 주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종말’을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만난 성도라면, 우리는 과연 나는 참으로 ‘주님만으로’ 충분한가?라고 하는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주님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말이고, 결국 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만을 삶의 근거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삶의 근거로 삼는 것들은 대부분 돈이나 명예, 출세나 성공과 같은 자기 만족과 성취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믿음안에서 우리가 맛보고 있는 은혜는 그저 열린 문틈을 통해 살짝 엿본 수준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쉬움과 눈물, 염려와 두려움, 환란과 고통에 넘어지고 무너지던 연약한 믿음, 구원하시는 은혜를 매순간 온전히 누리지 못하던 한계를 벗어나,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며 마르지 않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천국을 맛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 한방울의 은혜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고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마감하실 그날에 이르러야 경험하게 될 영광을, 믿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그렇고, ‘신앙'하며 산다는 의미가 그렇습니다.
부활하셔서 늘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도, 주님을 마치 하늘 어딘가 저 멀리 가버리셨다가 이제 다시 돌아오시는 것처럼 여겼던 것은, 일상의 과잉에 내몰리고 탐욕에 눈이 멀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대림의 절기는 그 동안 주님을 잃어버린채 살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와 계시는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마음의 창문을 정성껏 닦아내야만 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분께 묻고, 그분께 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의 전부입니다. 대림절 사주간 매주일 하나씩 초를 밝혀가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먼저 어두워진 우리 마음을 밝힌다는 결단인 셈입니다.
# 5
_ 주님을 믿을 수 있으면 살고, 그럴 수 없으면 죽습니다. 믿음을 가진다고 뭐가 달라지느냐고 되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을 통해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다면, 그야 말로 일상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겁니다. 누구라도 지옥을 원치않지만, 또 누구라도 이런 지옥에서 벗어날 재간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괜찮다고 착각하거나, 괜찮은 척하며 살아갈 뿐 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재림’은 사실일 수 있고,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재림은 그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이고 역사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1독서 구약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선지자 이사야 같은 사람이 그런 부류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패망해 버린 암울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마르둑에 비해 하나님은 무능력한 신이 아니냐고 불신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그런식의 의심과 회의, 그리고 불신을 단호히 거절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 이사야 64:1
선지자 이사야의 눈에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이 모든 어긋난 현실을 심판하실 주님이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온 땅의 주인이시기에 마땅한 일입니다. 똑같이 암울한 상황과 현실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보는 눈을 가졌으니, 그는 주님이 강림하시게 될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을 겁니다. ‘교회’야 말로 이런 공동체이고 ‘성도’인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인 겁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임하여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꿰뚫어보고, 그 주님과의 만남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침내 온 땅에 드러날 그 날을 지금 여기에서 맛보며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엿보고 있는 나라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채우던 기쁨과 감사, 그리고 은혜가 사그러들고, 언제 믿음이 있었던 것인가 싶을 만큼 공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없이 주님을 향해 오롯이 걷고 싶지만, 여전히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기다림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하는 일, 대림절 기간 동안 집중해야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깊이 묵상하는 겁니다. 끝없이 도전해 오는 현실 앞에서 이런 묵상과 성찰을 게을리하게 된다면, 여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될 겁니다. 결국 신앙은 상투성에 떨어지고 교회는 단순히 신앙적인 친교모임이 되고 말 겁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현실이 고달프고 거칠더라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일단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예수가 지신 십자가와 부활에 마음과 뜻을 다해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현실은 하나님의 침묵이지만, 그 침묵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통해 교회는 재림하실 주님을 지금, 여기에서 만나고 사귀는 사귐의 공동체로 존재해 왔습니다. 대림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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