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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12/24 대림절 넷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2. 20. 16:2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7:1-11, 16

      응송 | 누가복음 1:47-55

    2독서 | 로마서 16:25-27

    3독서 | 누가복음 1:26-38

     

    # 설교음원

    http://naver.me/GsPbtxqN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fXDsf-fGms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시모네 마르티니, '수태 고지',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국제 고딕 양식의 태동을 주도한 시에나 화파의 거장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 고지'입니다. 지금까지 봐왔던 '수태 고지'들의 원형처럼 보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

     

    1

    대림절 넷째주 주일입니다. 오늘로 사주간의 대림절 기간은 모두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제 내일이면 우리는 교회가 그토록 기다리던 기다림뒤의 기쁨과 마주하게 될 겁니다. 기다림 그리고 간절한 교회의 소망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독서 구약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사람 ‘다윗’입니다. 한때는 사울에 의해 도망자로 전락했었지만, 이제 그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가나안의 여부스 족 수중에 남아있던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허락하셨던 가나안의 모든 땅을 마침내 되찾았으니 통일 왕국의 왕이 된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 모두가 다윗에게 찬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을 따르던 세력들 처럼 다윗 왕조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들의 마음까지 얻어야만 다윗 왕조는 진정한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곧장 '기럇여아림' 땅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겨왔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보게 될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누구라도 이 왕조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법궤'를 성공적으로 옮겨온 뒤 다윗은 또 다른 숙원을 품게 됩니다. '성전 건축'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왕궁에 머무는 자신과 달리 여호와의 궤가 여전히 누추한 장막에 머무르는 것이 안타까워 하나님께서 머무실 성전을 짓겠다는 겁니다. 기특한 마음이고 대견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하신 하나님의 응답은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입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 사무엘하 7:8b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며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신 것은 하나님이셨고, 그가 지금의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특해 보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일 뿐입니다. 

     

    2

    인류는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 이후로, 시대를 무론하고 끊임없이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강화해왔습니다. 애굽의 피라밋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고대 바벨론의 ‘지구랏트' 까지, 동서 고금의 문명안에는 정점에 이른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지위, 망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비록 성경이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또한 성경이 어떤 인물도 영웅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않됩니다. 성전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모습안에도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의 권위와 왕위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불온한 욕망이 숨어있는 겁니다. 성경은 ‘성전건축’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고 비판적입니다. 본문에서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꿈은 하나님에 의해 거절당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의 말로도 결국은 패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전’이 있으니 우리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던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절정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누가복음 21:5-6

     

    ‘공간’을 숭배하고 거룩하게 여기는 것은 애굽이나 가나안의 이교도들의 종교행위였습니다. 광야 사십년간 이스라엘이 경험하고 믿어왔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내일까지도, 어디를 가든지 이스라엘의 운명과 함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날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복받았다는 식으로 성경을 왜곡하며 곳곳에 번드르한 교회 건축이 한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일의 결국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 만큼 믿음을 지켜왔고’, 그래서 ‘이 만큼 이루었다’는 자기만족과 영광을 포장할 뿐입니다. 성전 건축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촛불을 아무리 많이 밝혀도 태양빛을 가리울 수 없는 것처럼, 애당초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덧 씌워드릴 수 없습니다. 

    다시한번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성전을 건축해 올리겠다는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신 하나님의 바램이 읽어지시나요? 제 눈에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무너지지 않도록 '다윗'을 지켜내려는 하나님의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만 보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아니라, 다윗이 지금처럼 하나님께만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는 겁니다.

     

    3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은 ‘내 삶의 모든 영역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예외'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남보다 못한 상황이나 형편, 내 마음이 흡족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행이나 고난같은 것들은, 신앙의 힘을 통해 극복하고 벗어나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나 저주일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 내몰린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이끄시고 가르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신뢰에 있을텐데, 늘상 ‘주님의 뜻과 말씀이라도 내게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않됩니다’라는 식일 뿐입니다. 피하거나 극복해야할 시험인지, 아니면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과정인지를 내다볼 능력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따져묻으실 수도 있겠지만 이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고, 외면하고, 불신할 수록, 자꾸만 삶이 피폐해지고 무질서해진다는 겁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고,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존재여야 하는데, 그런데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내 삶에서 몰아낸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 생명의 환희가 있을리 만무한 겁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듣는 것이야 말로 ‘복’임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서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이는 대림의 한 복판, 우리 기다림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본문의 시작은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메시지로부터 시작합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 누가복음 1:28b

     

    대체 그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은혜’가 뭘까요? 사람들이 주로 감동이나 위로를 받을 때 혹은 오랜 바램이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뜻하지 않은 화나 위기로부터 벗어났을 때, ‘은혜’나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 만족이나 감상에 그치는 것들일 뿐입니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나, 심지어는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언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입게 되는 은혜’란 무엇일까요?

     

    4

    천사는 마리아를 ‘은혜를 입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인사나 호칭은 자신에게 과분할 뿐만 아니라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신분이 얼마나 비천했는가를 고려한다고 해도 십대의 가녀린 소녀인 ‘마리아’의 형편에 어울릴 수 없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호칭을 그것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천사가 전한 소식 때문에 오히려 ‘마리아’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고 심각한 상황에 떨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 그녀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무턱대고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무책임하고 폭력적으로 들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천사의 말대로라면, 이제 마리아는 혼인전에 아이를 임신한 탓에 자칫 부정한 여인으로 종교재판에 내몰릴지도 모릅니다. 남편이 될  요셉의 결정 여부에 따라서는 내침을 당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율법에 따르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도 태중에 있는 생명이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그녀가 기댈 곳은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불행해 보일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면, 그건 그녀가 태중에 ‘아기 예수’를 잉태했다는 한가지 사실 뿐입니다. 따지고보면 누가보더라도 태중에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며 유쾌하지 않은 '스캔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태고지’가 그녀에게 은혜가 될 수 있는 걸까요?

     

    5

    그녀의 몸으로 찾아오실 ‘예수’님을 들여다 보십시오. 특별한 변고가 없는 한, 마리아의 헌신적 사랑을 통해 그 아이가 자라고 결국은 그가 짊어진 십자가와 그가 열어놓은 부활을 통해 세상은 구원을 얻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그녀를 통해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겁니다. 그녀는 천사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는 결국 그녀가 ‘하나님의 구원’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마태복음 1:23

     

    그녀가 품게 될 ‘하나님의 구원’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고보니 천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그녀를 부를 때, 덧붙였던 것도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미 마리아를 통해 ‘구원’이라는 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아멘’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더 얻어서도 아닙니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야 말로, 인간 구원의 핵심인 겁니다. ‘은혜’가 ‘구원’의 경험이고, ‘구원’이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경험이라고 정의한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맞을까요? 마리아처럼 ‘하나님 경험’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겁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누가복음 1:38

     

    수태고지를 전해 들은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야 말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험하게 된 사람들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녀는 자신의 운명 전체가 하나님의 손길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길임을 깨달았으니, 주어진 운명을 맡기지 않을 수가 없을 수 밖에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가는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미쳐 경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셔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주님이 아니라, ‘돈’이나 ‘성공’, ‘자기만족’을 삶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갑자기 찾아온 우울감이나 내일에 대한 염려나 걱정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비교에 내몰려 한 순간에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신앙이 깊어질 수록 평화를 경험하고 은혜가 깊이 체험하기도 하지만, 은혜는 메말라가고 자기 업적이나 만족에만 배고파하다가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하면서도 그렇습니다.

     

    6

    우리는 ‘주님’이라고 기도하면서도, 스스로는 ‘종’이 아닌 ‘주인’처럼 살고 싶은 욕망으로 쉽게 기울고 맙니다. 주인행세라도 해야겠다는 조급함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경험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기만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여전히 ‘주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비굴해지거나 비참해지는 것 즈음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전한 천사를 통해 그리고 아기 예수를 통해,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기꺼이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던 겁니다. 이런 마리아의 모습은, 그로부터 오신 예수님이 처하게 될 운명과 겹쳐있습니다. 마리아는 가장 비참한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미혼모라는 말을 들어야했고 자신보다 먼저 아들을 죽음 가운데 떠나 보낸 상처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내야했던 어미였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이 없고 핍박과 환란에 내몰렸지만 하나님 나라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살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누구도 마리아를 불행한 여자라고 하지 않고, 그 어떤 사람도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천년전 유대땅에 가녀린 소녀 마리아는 이 사실을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복중에 잉태되어 세상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 사실에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마져도 맡기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생명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 롬 16:27

     

    온 교회는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그분을 송축합니다. 주님이 하나님께 그리하셨듯, 우리 또한 주님을 믿는 방식으로 살겠다는 고백을 담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의 기간, 이 말씀을 짊어지고 살아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는 이들,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은혜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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