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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성탄후 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2. 28. 15:2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61:10 - 62:3
응송 | 시편 148
2독서 | 갈라디아 4:4 - 7
3독서 | 누가복음 2:22 - 40
# 설교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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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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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보는, 신비
#01
오늘은 성탄후 첫주이며 또한 202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 세상적으로도 참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습니다. 때로는 슬펐고, 고독했고, 힘겨웠지만 우리의 곁에서, 우리와 함께,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로 마침내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가올 시간이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지나온 시간도 우리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모쪼록 아픔과 절망, 실패로 곱씹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나온 한해의 시간을 통한 배움이 있기를 빕니다. 다시금 하나님께서 새로운 날들을 허락해주신다면, 그 배움을 통해서만 믿음안에서 은혜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본문 안에는 온통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독서인 ‘이사야서’도, ‘주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으니 주님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이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61:10)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즐거워한다’는 것은, 피상적 즐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닌 언제나 목마르지 않고, 부족함이 없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말씀을 우리가 처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씀을 자꾸만 상투적으로 듣게 되고, 현실에서는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성경이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우리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는 까닭은, 말씀을 사건으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탓일 겁니다. 지난 한해, 과연 내 영혼이 즐거워하고 있다고 실감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언제, 무엇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하셨나요? 아마도 기껏 우리가 떠올리는 것들이라면, 자동차나 새집 같은 것이나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거나 얻었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자녀들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정도일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금새 사라지고 그래서 지금은 없는 것들 뿐입니다. 적어도 ‘내 영혼이 즐거워할 만한 일’들이 아닌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우리 영혼이 우울하고 핍절되어가는 이유입니다.
#02
그렇다면, 정말 ‘영혼의 만족’이라든가 ‘영혼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은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1독서에 등장하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 같은 사람이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 이사야 61:10b
이건 그가 매우 특별한 능력의 선지자라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어떻습니까? 그는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찬양에 동참해야한다고 초대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해와 달과 별, 바다의 심연, 불과 우박, 눈과 서리, 세찬 바람, 산과 언덕과 들짐승들과 날아다는 모든 것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임금과 백성들, 고관과 재판관들과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스라엘도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편 기자의 노래를 들으면서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은 다 기뻐할 수 있다고 해도, 시편기자의 삶이라는 것은 포로기에서 돌아와 여전히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상황과 닿아 있습니다.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능력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03
복음서 이야기에서 ‘누가’는 갓난 아기의 몸으로 이 땅에 찾아오신 주님의 행적을 쫓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결하게 하는 날’이 다 지나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면 삼칠일을 지키는 우리네 옛 전통과 비슷한 겁니다. 그들 부부는 ‘맏아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규정대로 주님께 올려드리는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 자체보다는 주님과 어떤 이들 사이의 만남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안나’라는 과부였습니다. ‘누가’는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먼저 시므온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 누가복음 2:25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실 주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의 전통과 닿아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안에는, 로마의 식민 치하라고 하는 똑같은 상황속에서도 우리가 ‘왜 이런 상황에 떨어지게 되었는지’에 관한 반성이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라고 하는 물음에 서로 다른 답을 찾던 다양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말씀을 잘 지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자는 경건주의자들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무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겠다고 항전했던 과격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들과 달리 우리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오히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저 주님이 가져다 주실 위로를 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땅의 침묵자’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시므온’은 말 없이 하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리던 땅의 침묵자였던 겁니다.
#04
두번째는 사람은 ‘안나’입니다. 그녀는 ‘예언자’였습니다. 누가는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여 일곱해를 살았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여든 네살이 될때까지 ‘과부’로 살아왔을 그녀의 안타까운 삶을 가늠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여튼, 그날 성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이 둘만 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아기 예수와의 특별한 만남?을 가졌던 사람은 이 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해주시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둘을 성전에 준비시켜두어야만 했던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이나 어떤 범죄라도,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그 일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 | 신명기 19:15
이스라엘에서는 증언이나 증거가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을 필요로 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증명하고 싶으셨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기 예수 안에 ‘주님의 구원’이 담겨 있다는 것과 모든 유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달아 알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하지만, 두 명의 신실한 증인이 세워졌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증인으로 세워졌던 이 두사람만이 ‘구원’을 경험하게 된 겁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 누가복음 2:29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자신의 이름 뜻처럼, 드디어 오늘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수십년을 홀로 살아내야했던 여 예언자 ‘안나’도 아기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둘을 통해, 드디어 ‘성전’ ‘하나님을 찬양’하는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은 겁니다.
#05
여기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젋은 부부의 품에 안겨 있는 젖먹이 아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태어나자마자 손을 쓰고 두발로 걸었다고 하는 ‘석가모니’처럼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스스로를 드러낸 것도 아닙니다. 아직 예수는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고 당연히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어미의 품안에 안겨있는 작고 여린 아기일 뿐입니다. 눈을 씻고 보아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표징이나 이적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시므온’이나 ‘안나’는 이 아기 안에세 무엇을 보았길래, 그리고 어떻게 만민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엿보았다고 했던 걸까요? ‘시므온'과 ‘안나',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두사람 위에 ‘성령’이 임하였다는 겁니다. 25절은 성령이 ‘시므온’위에 임하였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나’는 ‘예언자’라고 하는 그녀의 신분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예언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요셉이나 마리아도 보지 못한 것을 ‘성령’에 의해 감동된 이 두사람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령’이야 말로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요 14:26)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자주 읽느냐가 아니라, 성령께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실 때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06
바울 사도는 서신서 말씀을 통해, ‘이사야’ 선지자나 ‘시편’ 기자, ‘시므온’과 ‘안나’ 뿐만이 아니라, 이제 교회인 우리도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예배의 행렬에 서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예수를 믿기로 했다면 이제 우리 중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어야만 한다고 외치는 까닭은 한가지 뿐입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걸 교리적으로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것을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때로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믿습니다’라는 나 자신의 고백외에는 근거가 손에 잡히질 않기도 합니다. 말이든, 행실이든 아니면 신앙적 삶이 되었든 어떻게 해서든 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결국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근원적 사건은 바로 ‘아들의 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누구이신지, 그렇다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성령’의 감동안에 있을 수 있는지 알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성령’은 정리하고 알아야 하는 ‘정보’가 아니라, 만나야 하고 경험해야하는 하나님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같을 수는 없는 겁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라면, 예수님 말씀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더 이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 염려나 근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만큼 넘치는 기쁨과 희락과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자녀만이 누리는 관계인 겁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만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주신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하늘이 두쪽 난다고 해도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07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포함해 그날 성전에 올랐던 사람들중에, 시므온과 안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평범한 아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므온과 안나는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으니 찬양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젖먹이 아기 예수안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리고 눈으로 보듯 하나님의 구원을 볼수 있는 종말의 날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은 늘 이런 방식으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안에 은폐되어 있을 겁니다. 아직은 약속된 그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함께 하던 이들이었던 ‘시므온’과 ‘안나’는 삶과 역사를 관통하며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 아이다’라는 성령의 말을 들었고,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말하였을 뿐입니다.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성령과 함께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던 ‘성령’은 우리도 또한 주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사실에 운명을 맡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겁니다. 아직은 손 안에 들어와 있지 않지만, 다가올 영생을 기다리고 희망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은 성령 뿐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이 옳다는 사실에 기대며 살아아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힘에 의존하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를 자녀로 용납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사는 생명의 사람들로 세워가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한분 하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과의 일치가 실제가 되는 순간, 우리 영혼이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지는 ‘구원’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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