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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3/17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3. 12. 13:3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31:31~34

      응송 | 시편 51:1~12 혹은 시편 119:9~16

    2독서 | 히브리서 5:5~10

    3독서 | 요한복음 12:20~33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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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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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remiah sits amidst the rubble of Jerusalem”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잔해에 앉아 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

     

    1

    구약본문인 ‘예레미야’서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메시지입니다. 그는 ‘요시아’ 왕때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요시아’는 망해가는 유다를 일으키기 위한 불꽃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를 통해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아직 유다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므깃도 전투에서 속절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희망의 불꽃이 채 타오르기도 전에 속절없이 꺼저버린 겁니다. 그가 죽은 뒤, 유다는 짙은 절망과 어둠으로 덮이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 세워진 허수아비 같은 왕들에게서는 소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은 참담했습니다.

    이제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 말고는 다른 희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외치는 ‘심판’은 단순힌 심판을 위한 심판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무서운 메시지였지만, 실은 이렇게 망할 수는 없으니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눈물의 호소였던 겁니다. 선지자의 외침대로 그들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심판이 아닌 구원이, 위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예레미야를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은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제부터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예레미야 31:31

     

    그런데 왜 ‘새로운’ 약속일까요? 모세의 때에 맺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가 이미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서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고 진실되게 이행할 때만 유효할 수 있는 법입니다. 나는 아무리 지키고 싶어도 상대가 약속을 어기는 순간, 반대로 상대가 아무리 성실해도 내가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 관계는 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관계의 증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과 계명을 주셨고, 그것을 언약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 레위기 26:11~12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사이에서 언제나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내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그들에 자신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3

    철썩같은 약속을 깨트려 버린 상대에게 섭섭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싶을 만큼 화가 날법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이 관계를 포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책임을 묻는 대신, 다시금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을 위한 새로운 차원의 구원과 위로를 그들에게 베푸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인 겁니다. 그러니 패망 앞까지 내몰렸던 이스라엘은 이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포기하시지 않으려고, 이번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언약을 체결해주신다고 해도, 이 계약의 관계는 결국 다시 파기되고 말 것이 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체결된 언약을 지켜낼 능력 뿐만 아니라, 선한 마음이나 의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해도, 여전히 그분의 말씀과 계명, 무엇 하나도 지켜낼 수 없는 형편없는 실존적 한계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이 관계는 애당초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식의 율법과 계명을 언약관계의 근거로 삼는 한 우리는 또 실패하고 말 겁니다. 물론 나름대로 따라가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은 해보겠지만 결국은 절망과 정죄, 가식에 떨어질 것이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으로는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것은 둘째치고,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낸다는 것 조차 불가능합니다. 평소에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잘 지켜내었다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 믿음 좋고, 신앙 좋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의 시련이나 위기만 찾아와도 무너지고 맙니다. 들어왔던 말씀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애당초 없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뿌듯하게 자랑했던 신앙적 업적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에 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결국은 꼭꼭 감추어있던 조급함, 두려움, 근심, 절망, 연약함들만 드러나게 될 겁니다. 

     

    4

    그런데 예레미야는 놀라운 말을 전해 줍니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예레미야 31:34

     

    하나님께서 이번에 주실 새 언약은 이전처럼 돌판에 새겨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 예레미야 31:33b

     

    이번에 하나님께서 주실 새로운 언약은 가슴속, 마음판에 새겨넣어 주실 것이기에, 다시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가 되면 누가 와서 일일이 하나님을 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34절)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패망은 모두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비롯한 것들입니다. 스스로는 꽤나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귀로는 듣고 머리로는 알았는데, 마음으로 그분을 이해하고 아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하나님을 모른 척 할리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있음으로 불러내시고, 죽은 자를 살아있는 자로 불러내시는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었는데도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분이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여전히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렇게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모르거나, 그런 약속을 지켜내실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하나 뿐입니다.

     

    5

    그런데 말씀을 읽다보니 재미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언약의 기초이며 근거인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히브리어로 ‘레브’라고 읽습니다. 그 뜻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의 관계를 체결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 위해 주셨던 ‘법’이란, 사실은 그들을 향한 절절한 당신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과 ‘계명’안에 담겨있는 핵심은 보지 못한 채, 자신들에게 부과된 지켜내야할 의무나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겉으로는 말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드렸고, 성전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언약을 파기한 책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몰랐고, 율법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던 탓입니다. 해야할 의무는 남았는데, 정작 하나님은 잃어버린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법을 찬찬히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힘으로는 지켜낼 수 없어 늘 깨어질 수 밖에 없던 계명들을 하나 하나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여전히 정죄감이나 부끄러움, 막막함만 느껴지신다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마음이 무엇이고, 그분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때만 비로서 참된 언약관계, 그분의 ‘마음’안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정의와 공의를 이행하라는 법을 주셨으니,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 온 땅을 통치하시는 분이 분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 인애와 긍휼의 법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절절한 마음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법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 수록,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마음이 따듯하고 영혼이 풍성해지게 해줍니다. 그분의 다함없는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6

    사람의 속 마음을 아는 것도 불가능한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 절로 될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박해 받으셨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내몰아 살해했습니다. ‘우리’라고 주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을까요?

    ‘복음서’ 이야기 안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말씀 조차 우리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자신앞에 놓여 있는 운명인 ‘십자가’를 향하시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 요한복음 12:4b

     

    주님께 말씀하신 ‘영광’이 지금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광’이라고 하면 ‘명성’이나 ‘성공’을 떠올리는 우리에게는 분명히 들었지만 들리지 않는 말씀일 뿐입니다. 망하는 길이 ‘영광’이라니요. 하지만 주님이 이어가신 ‘겨자씨 한 알의 희생’이라던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만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옳고 바르고 좋은 것임을 알더라도,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손해를 보고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길이라면 쉽게 외면하고 마는 우리가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선택한 이유도 따지고보면 ‘나’ 잘살고 ‘천국’가겠다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마음은 원한다고 하더라도, 육신은 따르지 못하고 말 겁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7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 요한복음 12:8b

     

    ‘이 잔을 비켜가게 해달라’고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을 만큼, 주님께도 ‘십자가’ 죽음은 두렵고 회피하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괴롭고 죽을 것 같을지라도, 주님은 이 길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길의 끝이야 말로 주님의 삶이 지향하는 목적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외면하지 않고 걸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 | 요한복음 12:11b

     

    주님은 그것만 믿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실 것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마음으로 나아오는 누구라도 받아주시는 분이심을 ‘부활’을 통해 입증해 주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처럼, 당신이 걸어가신 이 길을 통해 이제 우리도 함께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으니, 우리도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합니다. 믿어지지 않고 무섭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습니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이 길이 되어주셔서, 우리는 마침내 그 길을 걸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주님을 따르고, 어떻게 겨자씨 한 알처럼 땅에 떨어지고 결실하는 걸까요?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튼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걸까요?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서 증명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 요한복음 12:6

     

    우리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미워하는 일에 실패한 탓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받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나’를 살려내는 것에만 천착하는 ‘자기애’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방식을 거절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과 운명을 맡기셨던 주님의 믿음을 본받는 것이 ‘자기 목숨’을 미워하며 사는 겁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과 두려움, ‘어떻게 해야할까?’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통해 영원토록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해 내시는 그분의 마음과 만나십시오. 변치 않는 그분의 마음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선물,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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