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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3/10 사순절 넷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3. 6. 15:3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민수기 21:4 - 9

      응송 | 시편 107:1 - 3, ,17 - 22

    2독서 | 에베소서 2:1 - 10

    3독서 | 요한복음 3:14 - 21

     

    # 설교음원

    http://naver.me/5Ht0kPBF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cGt6FC_Dx7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Moses and the Brazen Serpent(모세와 놋뱀), Sébastien Bourdon(세바스티앙 부르동), 1653-1654

    '놋뱀' '십자가'

     

    # 01

    사순절 넷째주일, 오늘 구약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불뱀’과 ‘놋뱀’ 이야기는 놀라운 이적과 기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갑니다. 일단 성경이 전하고 있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우리를 놀랍게 만듭니다. ‘정말 놋뱀을 보는 것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인지’ 슬쩍 슬쩍 의심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기적을 보고 싶고, 그런 표적을 볼 수만 있다면 두려움 없는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으레 ‘불뱀’사건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로 읽습니다. 하지만 삶의 형편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 모든 사람을 죽이고자 심판하신 것으로 읽게 된다면, 지금 우리 중에 안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사순절 첫주일 구약 본문이었던 ‘노아의 홍수이야기’처럼 오늘 본문의 말씀도 ‘심판’이 아닌, ‘구원’에 초점을 맞춰 읽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애당초 우리 안에는 절망과 죽음을 지나쳐갈 만한 의로움이나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에서 우리는 ‘불뱀'이나 ‘놋뱀’과 같은 이적 사건이 아니라, 어쩌다가 ‘가나안’ 목전까지 이르렀던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떼죽음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 02

    지금 출애굽 공동체에게는 무언가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 만큼의 큰 사건이 일어났던 것만큼 분명합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신앙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불뱀이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불뱀’에게 물려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집단적 절망에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갑작스런 고난이나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팔자나 재수니까 어찌할 수 없이 그냥 고통을 참아내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냐고 불평하고 때로는 자기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운명 앞에서 ‘민수기’를 기록한 성서 기자나 출애굽 공동체는 이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끌고 갔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들여다 봤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와 같은 대재해 가운데서도 생명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계시니, 아직은 망하지 않았고, 아직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살 수 있는 길은 남아 있습니다. 힘을 다해 하나님께로만 나아가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속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 백성이 살 수 있는 구원 방법을 전해주셨습니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어떠신가요? ‘놋뱀’이 정말 우리를 살게 해줄 만큼 능력이 될까요? 이런 식의 구원을 쉽게 받아들이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독사에게 물리면 독을 빼내고 치료를 받아야지, ‘놋뱀’을 보는 것만으로 해독이 될리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놋뱀’ 자체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당연히 ‘놋뱀’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놋뱀은 단순히 그런 방식으로도 구원해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징’일 뿐인 겁니다.

     

    # 03

    복음서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모세에 의해 들려졌던 ‘놋뱀’처럼 인자이신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14)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통해, 다시는 죽음에 내몰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15)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살아오신 지난 한 주의 삶을 돌아보며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삶의 염려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을 얻으며 살 수 있게 될까요? ‘십자가’로 향할 때 마다, 그런 구원을 경험하고 계신가요? 

    안타깝지만, 그리스도와 십자가 사건이 쉽게 믿음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보이는 것은 없고, 덩그러니 놓인 ‘십자가’와 그위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전히 무능력하고, 쓸모 없어 보이는 어두운 시간 말입니다. 물론 목사인 저에게도 이런 시간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길을 잃어버리고 휘청거릴 만큼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속절없이 비틀거리는 신세가 되고 마는 걸까요?

     

    십자가 처형 부분, 이젠하임 제단화 (1515), Mathias grunewald 1470 - 1528

    # 04

    다시금 ‘민수기’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서기자는 ‘불뱀’사건이 초래된 직접적인 이유를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기 때문이었고, 그런 상황에 내몰린 까닭은 먹을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애굽 공동체가 당장에 먹고 마실 것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줄 ‘만나’도 있었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마실 물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제는 ‘만나’가 진절머리가 날 만큼 보잘 것 없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만나’ 때문에 그토록 고맙고 감사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이들의 모습이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특별히 믿음이 없고 세속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중에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형편이나 사정에 떨어지고나면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과연 ‘불뱀’ 사건을 초래했던 그들이 처한 상황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 민수기 21:4

     

    성서기자는 그들의 원망과 불신이 시작된 것,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은혜인 ‘만나’가 형편없게 여겨진 것이 그들이 ‘길’을 걷는 동안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었길래, 그 길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 05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여정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번 여정의 출발지는 ‘호르산’입니다. ‘호르산’은 ‘가데스바네아’와 ‘아랏' 사이 가나안 땅 초입에 있는 산입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이 바로 이 부근에서 죽었습니다. 여튼 이 경계만 넘어서면 ‘가나안’이었는데, 오히려 남쪽인 홍해 길을 따라 반대로 내려가게 된 겁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중간에 있던 ‘에돔’이라고 하는 나라가 장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돔 땅 북쪽 국경을 따라 ‘왕의 대로’가 놓여 있기에 그 길만 따라가면 편하고 쉽고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돔’의 왕이 출애굽 공동체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섰습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에돔’은 영원히 ‘심판’을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이들을 비난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사안에서도 ‘왜’가 ‘조선'을 침략했던 1592년의 임진왜란도 사실은 ‘명’나라를 치러가기 위한 ‘길’을 열어달라는 ‘정명가도’라는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었습니다. ‘에돔’입장에서는 수백만의 무리를 들인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입니다. 그러니 울며겨자 먹는 심정으로 홍해길을 따라 남쪽으로 멀찌감치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광야’에서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고난단지를 뼛속깊이 알고 있는 출애굽 2세대들로서는 또다시 험악한 길을 향해 생고생을 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 앞이 캄캄해졌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 06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쯤 이 여정이 끝날른지 또다시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 떨어졌다는 겁니다. 건강한 남자 걸음으로 보름, 넉넉하게 잡으면 두달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이 길을 벌써 38년째 헤매었습니다. 그런데 또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정반대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길을 돌려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손에 잡힐 것 같은데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가나안’은 잡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더 헤매여야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런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다시금 생존이 위협받는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겁니다. 38년 전 홍해를 건넌 이후 ‘마라’ 에서 ‘물’ 부족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이후로 지금껏, 이런 일은 출애굽 여정 가운데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살 수 있겠다 싶을 때, 또다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이런 문제가 구약성경 전체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이 처했던 ‘역사’라는 것이 광야 40년 뿐만 아니라, 이민족에 의해 멸망에 내몰렸을 때에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는 운명에 떨어지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었을 만큼 늘 똑같았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통해 우리가 실감하게 되는 것은 그저 사람의 일, 살아간다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법이 없다는 것 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 염려와 근심만 가득한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생존의 밑바닥을 통과해야만 하는 겁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처자식이 굶는 것을 바라 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떨어지게 된다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그저 먹고 사는 생존 문제에만 매달릴 수 밖에는 없게 될 겁니다. 정의와 공의, 평화 같은 고귀한 가치나 심지어는 ‘신앙’ 조차도 모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뿐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 뻔합니다. 만약 ‘욥’과 같은 형편에 떨어져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낼 수 있다고 자신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이나 인생으로 내몰리게 되면, 우리는 곧장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될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겁니다. 아마도 제일 먼저 ‘내가 잘 못한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향한 정죄감에서부터 시작하겠지만, 이것은 곧장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저 사람 때문’라거나, ‘이런 가정에 태어나서’와 같은 환경이나 형편을 탓하는 것으로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결국 그 원망의 끝은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겁니다. 

     

    # 07

    죽음에 내몰린 ‘광야’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맡겼던, 출애굽 공동체의 삶을 가벼이 보지 마십시오. 혹여 지금,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으시다면, 하나님의 손길에 운명을 걸고 장대에 높이 걸렸던 ‘놋뱀’을 바라보았던 출애굽 공동체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힘을 다해 시선을 옮기십시오. ‘장대에 걸린 놋뱀을 보면 살 것’이라는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지만, ‘놋뱀’을 본다고 산다는 그 방식이 타당한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응답하지 않은 사람은 애당초 ‘불뱀’에 물린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음이 확정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처했던 운명이야 말로 ‘그리스도’ 이전에 우리 자신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보여도, ‘놋뱀’이 세워지기 이전에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이미 죽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에베소서 2:1)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응답하였다고 해도, 장대에 걸린 ‘놋뱀’은 볼 수 있는 사람만 살릴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구원’,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죽음’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삼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생명’이 있고, 거부하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3: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미 ‘생명’있음과 ‘생명’없음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 08

    제 힘이나 능력으로는 살 수 없는 절망의 장소가 ‘광야’인 것처럼, 모든 소망과 표적과 표징이 사라지고 끊어진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뒤집어 보면 ‘광야’는 ‘만나’가 있어서 살수 있던 곳이었고, 장대에 달린 ‘놋뱀’이 있어 살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천하고, 절망적인 곳, 척박하고 고독한 밑바닥인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밑에서도 ‘생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몰린 상황이라도 걱정하지 않으며 살 수 있습니다. ‘만나’가 아무리 하찮은 음식이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 마태복음 6: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르기를 몸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해야 살 것인가?’라고 하는 생존에 대한 원망은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고, 반대로 아무리 삶의 형편과 조건이 도무지 살 수 없을 만큼 어렵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지켜낸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삶이 온통 슬픔과 괴로움으로 덮인 것 같아도 찰라처럼 뚫고 들어오는 ‘살아있음’이라는 기쁨과 환희를 놓치지 마십시오. 목마름과 배고픔과 죽음앞에 내몰린 이들에게, 손 내미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값 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생명수 샘물을 베푸어주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에베소서 2:8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이것이 우리를 향해 ‘십자가’에 새겨놓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통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을, 영생을 주시는 약속으로 믿는 우리를 하나님은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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