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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절 셋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2. 28. 12:2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20:1 -17
응송 | 시편 19편
2독서 | 고린도전서 1:18 - 25
3독서 | 요한복음 2:13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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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신앙과 '십자가'의 도
1
오늘 복음서는 유대 사람들의 명절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오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분노한 주님이 환전상을 뒤엎고,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휘두르신 탓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위한 제물을 팔고 환전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성전이 더렵혀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미쳐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채 성전을 찾은 순례자들이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제물로 드려질 소나 양 같은 가축을 판매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환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 오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하는데, 각지에서 몰려온 이들의 수중에 있는 로마나 이방의 화폐에는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성전세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화폐인 ‘세겔’로 환전을 해주어야만 성전에 오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한이 ‘성전 뜰’이라고 했던 곳은 사실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장사도 할 수 있을 뿐더러 이방인들이라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분노하신 까닭은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노예로 압제 당하던 그들의 조상들을 건져내어 자유와 해방의 나라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집중해야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저 할일에만 정신이 팔린 채, 정작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그들의 모습안에서,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성전’의 퇴락을 보셨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갑작스런 난리에 혼비백산 했지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곧장 주님께 몰려들어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무슨 권한이 있길래 우리를 책망하고 이 난리를 친 것이냐는 겁니다. 납득할 만한 ‘표징’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상황은 뒤집혀지고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2
표적을 요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뿌리 깊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닿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징’에 의존합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나, 광야 사십년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만나’와 ‘메추라기’같은 사건들이 그런 표징들입니다. 이민족에 의해 자유를 빼앗겼던 그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메시아’라고 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표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살해당한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표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탓에, 지금도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기도했더니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낫고, 막혔던 문제가 해결되거나,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표징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만 하려고 할 뿐, 정작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물론, 표적이나 표징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아닌 ‘표적’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정작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니 문제인 겁니다. 표적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가리키는 것일 뿐,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겁니다. 표적에 매몰되다보면 마치 돈만 쫓다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현대인들의 거짓된 신화처럼, 결국에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그래도 ‘표적’을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거나, 하나님도 믿고 그런 식의 ‘복’도 받으면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는 결코 '표적'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처럼 자신있어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안에는 ‘표징’이나 ‘표적’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던 것처럼 대학입시에 합격한 학생이나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이룬 사람을 보면, 이런 일들이 이후에 그 사람들의 운명을 어떻게 이끌어 갈른지 전혀 모르면서도 우리는 섣불리 이런 식의 표징을 ‘복’으로 결론 내리고 맙니다. 마치 성서기자가 ‘솔로몬’을 우상숭배로 인해 이스라엘의 패망의 문을 열었던 인물로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일천번제를 드렸던 열심이나, 그가 얻게 된 지혜, 부유함이나 명성같은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정작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믿음과 통찰이 없다면, ‘표징’이나 ‘표적’을 발견하거나 찾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3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경험했던 기적같은 표징들만 찾다보니, 그런 것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하는 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자꾸만 율법과 계명도, 선지자들이 전하는 외침도 오해할 수 밖에에요. 1독서 구약본문은 ‘십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정확히는 1계명에서 3계명까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정치 뿐만 아니라 신앙적 근간일 만큼 중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와 목적에 무지했습니다.
1계명은 3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이고, 2계명은 4절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1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참된 신이신 하나님 때문에 비로서 우리는 신처럼 또는 신 행세를 하며 삶을 강요하는 모든 세력을 거부할 수 있게 됩니다. 애굽도, 바벨론도, 권세도, 물질도 그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도 무릎꿇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그리고 얼핏 2계명은 1계명과 내용이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2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새긴 우상’은 1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표징’과 ‘표적’ 신앙인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3계명의 내용은 7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마라’는 겁니다.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을 독일 성서공회 성경해설은 ‘경솔하게 욕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설로 잘못 사용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마치 도구처럼 이용해서는 않된다는 계명인 겁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처럼 여길 수 있는가? 의아해 하시겠지만, 사람은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듯 하나님도 얼마든지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처럼 보여도 자칫 ‘주님’의 이름이나 하나님은 ‘제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는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듣지 않은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된 수단이나 확인되지 않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겁니다.
‘십계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명이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있음을 모른 채, 그저 스스로 계명을 잘 지켜냈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증거로 삼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켜냈는지에만 온통 마음을 쏟을 뿐, 하나님을 아는 일이나 하나님을 통한 자유를 얻는 일에는 무지했습니다.
4
오랜 세월을 표적과 표징에만 빠져살다보니, 어느새 유대인들은 그런 것 없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눈 먼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율법을 이루었다고 하는 ‘자기의’가 채워지지 않으면 도무지 하나님의 구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늘상 이 만큼 해내지 못하면 하나님께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가득할 수 밖에요. 자신들 곁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조차 알아보질 못할 만큼 눈이 멀어버린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마져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지난 구약의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전체가 가리키고 있는 분이 자신들 앞에 서 계신데도, 여전히 ‘표징’을 보여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고린도전서 1:18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십자가’는 능력일까요? 예수님이 매달리셨던 ‘십자가’니까 당연히 ‘능력’이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제 몫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우리도 짊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는 정말 ‘능력’이 되고 있습니까?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바울의 말은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십자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나 버렸고, 이런 상황이 극복되거나 역전될 것이라는 조짐이나 표징 따위는 모두 사라진 곳이 바로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입니다. 성공신화의 모든 가능성이 깨어지고,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곤두박질한 인생입니다. 이런 땅끝에서도 ‘십자가’는 능력이라고 말하려면, 표징인 ‘십자가’ 너머로 다른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길을 유대인들은 꺼리고 헬라인들은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이교도들의 생각이라고 폄훼하시면 곤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했던 이들입니다. 오늘로 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합리적이고 세련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애당초 ‘십자가’위에는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건 당연한 겁니다. 이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예수께서 하나님을 바라보시던 ‘믿음’이 아니라,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의 방식에 익숙해진 탓에 우리도 다른 능력을 기대해왔습니다. ‘복’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맞다면,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능력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들이 있어야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누구보다 잘되어야 하고, 성공해야하고,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좀처럼 큰교회 건물을 짓고, 부흥하고 영향력을 가져야 성공한 목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표징이 필요한 표적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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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하게 살해당하신 ‘십자가’가 대체 무슨 능력이 될 수 있을까요? 무턱대고 ‘십자가’를 종교적 수사로 치장해서는 않됩니다. 아니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니까 능력이라는 식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 해서도 곤란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곧장 부인할 수 없는 우리들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절망과 패망, 죽음이 드리워진 곳에서도 예수의 십자가를 표징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느끼고, 실감하고 계십니까?
‘표징’이나 ‘표적'은 신기루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말 겁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이야 말로 실제입니다. 그런 식의 표징들이 아무리 가득차 보인다고 해도, 결국 ‘십자가’는 누구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불행은 열려있습니다. 고난이 없고 불행이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마음으로는 힘을 내보아도, 실제로 이런 삶 자체는 힘겨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별 탈없이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인생이라도, 결국은 죽음에 굴복해야만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가 되면 자신 뿐만 아니라 함께 하던 모두가 슬프고 절망스러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되어야만 그렇게 해야만 살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욕망과 탐욕으로 눈을 사로잡던 표징들은 신기루와 허상처럼 가뭇없이 모두 사라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너머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이쯤은 되어야 하나님께 용납을 받고, 이 정도는 이루어야 구원을 얻고,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그런 표적을 구하라는 구속과 강요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더 이상 표적이나 표징을 쫓으며 살지않아도 됩니다.
혹여 불안과 염려가 밀려 올 때라면, 더욱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리로 이끌어 주실것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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