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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2/25 사순절 두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2. 21. 12:2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17:1 ~ 7, 15 ~ 16

     응 | 시편 22:23 ~ 31 

    2독서 | 로마서 4:13 ~ 25

    3독서 | 마가복음 8:31 ~ 38 혹은 마가복음 9:2 ~ 9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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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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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람''베드로' 사이에서...

    1

    지난 주중, 교회에서 상처받고 힘겨워하고 계신 한분을 만났습니다. 퍽퍽하고 힘겨운 삶, 어렵게 찾아간 교회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저 사람은 봉사도 않하고 사역도 하지 않는다며 사람들의 핀잔과 책망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기 시작하고 눈엣가시가 되버린 탓에 더 이상 교회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씁쓸했습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섬기고 봉사하며 공동체 활동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생각과, 예배에 집중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냐는 원칙론은 여전히 우리안에서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만 본다면 기독교는 사실 다른 종교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는 세상 모든 것과 경쟁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인간 활동이라는 것이 따지고보면 모두가 ‘지금’에서 벗어나고 ‘한계’를 초월하고 싶은 바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이런 걸 ‘구원’ 지향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만이 가지는 차별성은 무엇일까요?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를 택할 수 밖에 없던 이유말입니다. 

    형식은 달라도 ‘예배’나 ‘기도’, ‘제의’ 같은 것들은 다른 종교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것은 차별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점에서는 다른 종교, 심지어는 이단 종파의 열심과 비교할 때,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오히려 느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본질적 차이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봉사나 헌신, 심지어는 기도나 예배 조차도, 따지고보면 모두 우리 자신의 열심을 근거로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얻게 되는 결과물들은 뿌듯할 만큼 보람도 있고 마치 구원이 손에 잡힌 것처럼 신앙적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담고,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결국 이쯤 하면 될 것 같다는 ‘믿음’과 이 정도 해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하고 돌아서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열심과 최선을 근거로 채워진 시간의 끝은 결국 피곤함과 무력함, 허무와 정죄만 마주하게 만듭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 신앙이 지향하는 ‘구원’은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살게 되었다는 ‘복된 소식’을 들었다, 보았다, 경험하는 길에 이르는 것이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능하게 하고 이루는 모든 것은 ‘나’나 ‘우리’가 아니라, ‘복음’ 뿐입니다. 오늘은 ‘복음’과 ‘믿음’에 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2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한장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십자가’를 향하시는 ‘그리스도’로 그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순절’이 깊어진다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할 것은 ‘십자가’라는 것이 단순히 낭만적인 종교 기호가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꺼져버린 가장 처참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주님을 따르며 걷는 ‘사순절’ 순례의 길이 ‘십자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구원해 낼 수 없는 무력한 우리 자신의 한계와 절망을 고스란히 직면하는 길이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을 앞에두고 보면, 우리 중에 누구도 너 잘나거나 못난 사람, 더 불행하거나 행복한 사람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 수 없고, 모두 죽는 존재이니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똑같이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무효’가 되고, 우리는 모두 쌓아 올린 어떠한 업적으로도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는 엄중한 하늘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십자가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원하여 그곳을 향한 순례의 길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패망으로부터 생명을 길어올리시는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위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걸어가신 주님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내몰린 예수님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지난 주일 말씀에서 읽은 하나님의 모습과 무척 닮아있습니다. 조건이나 업적을 따져묻거나 차별하시지 않고, 죽음에 내동댕치 쳐진 이들을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을 뿐인데,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살해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한 겁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특별히 악하거나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무지 살아가는 방식은 ‘사랑’의 원리를 따르려고 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업적, 평가, 실적으로 인정받는 세상의 원리를 따르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업적과 성과, 비교와 경쟁으로 작동하는 세상은 명확하고 손쉽게 보입니다. 하지만 ‘효율’이나 ‘성과’가 아닌 ‘사람’에 집중하고, ’지금’이 아닌 ‘내일’을 바라보는 ‘사랑의 방식’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더디고, 헛수고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사이가 깊어지고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사랑’의 법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믿음’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사랑’에는 미숙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에는 익숙한데, 용납하는 일에는 서툽니다. 과연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일과’에는 두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명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고, 또 다른 한명은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이 두 인물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교 신앙안으로 깊이 들어섰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살펴볼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를 향하여 가는 여정중, 그는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꾸지람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이후 사흘 후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벌컥하고 보였던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항의했다는 말을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읽게되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대하듯 핀잔을 주고 책망했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은 스승을 꾸짖는 베드로의 오만함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 했기 때문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고, 무엇이 사람의 일일까요?

     

    바로 앞단락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놀라운 고백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베드로’입니다. 그의 고백안에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에만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제 시선을 주님으로 가득채우고 있다보니 ‘나’는 없고 ‘주님은’이라는 고백만 남게 된 겁니다. 그런 그를 주님은 무척 칭찬하셨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이 이런 겁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주님의 말씀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럴 수 있느냐?’며 ‘결코 그리 하실 수 없다’고 따져묻고 있습니다.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일 만큼 투쟁적입니다.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주님이 틀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탓입니다. 얼핏 베드로의 큰 소리가 주님을 향한 대단한 믿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처럼 베드로를 닮은 분들이 많습니다. 절대로 그리할 수 없다, 이건 않된다, 혹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분들입니다. 이런분들은 늘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 제 기준, 깨지고, 상하고, 투박하고, 무식하고, 절망스러웠던 제 자신을 붙들게 되면, 정작 자신안에서 주님은 간데 없이 지워지고 맙니다.

    복음서 이야기는 주님이 아닌, ’베드로’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아닌 베드로가 더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르시는 주님과 달리,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가치관, 자신이 가려는 길만 보고 있고 심지어는 자신의 믿음을 주님께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일,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탄의 일’이란 것도 무언가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4

    1독서 구약 본문과 2독서 서신서에는 앞선 ‘베드로’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우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어떻게 우리의 ‘조상’일 수 있는가? 라고 어려워하는 분들을 위해 ‘바울’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 로마서 4:24

     

    그러니까, 그가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길’을 열어준 ‘첫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것은 오직 ‘믿음’ 한가지 뿐입니다. 처했던 상황이나 여건은 결코 믿을 만하지 않았지만,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믿었습니다. 이건 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기적처럼 바꾸어내실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떨어지더라도 ‘하나님만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씌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금새 알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을 가득채우고 있는 ‘내가’, ‘몸소’, ‘내가 세운, ‘내가 그에게’ 와 같은 말들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약속을 주신 분도,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건 단순히 이름을 개명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삶의 의미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아브람’이 믿음이 좋아서 이런 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되게 하신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통치행위라고 말합니다. 다시 읽어보십시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잘 믿어서 ‘아브라함’이 되었을까요? 본문 15절 이후에는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인생’이 바뀐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아내 ‘사라’입니다. 그녀 또한 ‘사래’에서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사라’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기준에 의해서, 그와 그녀는 새로운 운명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바뀐 ‘이름’안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는 높으시다’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큰 무리의 아버지(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사래’의 뜻은 ‘나의 공주’이고, ‘사라’는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스스로를 ‘아버지’와 ‘공주’로 입증해 내고 높여야만 하는 인간이, 그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 ‘만민의 아비’가 되었고, ‘열국의 어미’로 높여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5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신다.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 | 시편 22:2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부르짖는 사람’에게 언제나 응답하시는 분이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응답을 받기 위해 목이 터져라 부르짖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부르짖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응답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없다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던 김소월의 싯구처럼, 제 아무리 간절하고, 목놓아 부르는 부르짖음이라도 소용이 없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보다 더 우선되고, 믿음보다 먼저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 자비로움이 없었다면 이런 약속과 구원은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계약과 언약의 근거도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런 계약의 실행과 성취도 하나님 편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라는 길이 열렸지만, 그 길을 통한 구원의 보장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이겠지만, 본질적인 것은 이런 ‘구원’이 믿음으로 나아간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믿음에도 응답해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말이 별로 없습니다. 이 관계가 나에게 달려 있지 않고 자신이 따르고 있는 분께 달려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말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묵묵히 따를 수 밖에요. ‘잘 듣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듣지 사람이 아닙니다. 더더욱 그것은 틀렸고,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뿌리깊은 ‘자아’로부터도 듣지 않습니다. 열심히 듣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듣는 사람이 잘 듣는 사람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들으려면, 자신에게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통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아’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길삼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6

    ‘사탄아 물러가라’ 당신의 가는 길을 막고 나는 옳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붙들고 있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어디로 물러가야만 합니까? 주님께 책망받았으니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베드로’를 기준삼아 ‘어디로’갈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니 갈 곳이 보이질 않습니다. 낭패입니다. 하지만 ‘사탄아’라고 꾸짖던 주님의 책망은 결코 베드로를 면박주고 저주하고 내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마가’가 제시한 기준은 ‘주님’입니다. ‘주님’앞에 서는 사람은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러서야 하는 자리는 주님의 뒤가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을 가로막고, 주님을 앞서려는 교만한 ‘자아’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인 것처럼, 주님의 뒤를 좇는 이들을 ‘주님의 제자’라고 부릅니다. ‘물러가라’던 주님의 말씀이 ‘내 뒤로 오라’는 말씀으로 다시 들립니다. 혼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지 말고, ‘나’를 앞세우고 너는 나를 따르는 ‘제자’이기만 하면 된다는 위로의 말씀 말입니다. 박해와 혼돈에 내몰렸던 당시의 교회와 어찌해야할까 번민하던 제자들은 다시 기억해낸 이 말씀을 통해, 언제나 자신들 앞서 가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믿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부족하고 어리석다고 내치시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셨다면, 베드로와의 관계성은 이미 끝이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지어 ‘사탄’에 휘둘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던 걸음이라도, 주님은 다시금 있어야 할 자리, 주님의 뒤로 불러주십니다. 주님의 뒤편은 문제도 염려도, 세상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보이지 않고 주님의 모습만 보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낙망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에 의탁하며 살아가십시오. '믿음'의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만 남는 ‘십자가’의 길, 제자로서 우리가 있어야할 곳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믿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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