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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9/15 성령강림후 열 일곱번째 *창조절 3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9. 12. 10:2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잠언 1:20 ~ 33 혹은 이사야 50:4 ~ 9a 

      응송 | 시편 19 혹은 116:1~9

    2독서 | 야고보서 3:1 ~ 12

    3독서 | 마가복음 8:27 ~ 38

     

    #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교부들이 그리스어 원문으로 적힌 니케아 신경을 든 모습을 묘사한 이콘

     

    '나'를 말하는, '너'는 누구인가?

     

    1

    교회 공동체가 ‘곧 다시오마’라는 약속을 주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기다린지 벌써 2천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날이 언제인지, 이 기다림의 끝이 언제인지를 묻는 세상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빈정거리는 질문앞에서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늘에 속해있으나 땅에 살고, 땅에 발딛고 있으나 하늘에 닿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자신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십중팔구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다’라고 했던 마태복음 16장 16절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떠올리실 겁니다. ( 오늘 복음서 말씀인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생략되고, 주님은 ‘그리스도’시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튼, 이 고백의 터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이 고백안에서 모인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1세기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이런 고백의 터위에서 살아갔고, 정말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을 논하려면 언제나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중심에 있다는 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고백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고 하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세상으로부터 ‘맹신주의자’라던가 아니면 지독히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보도를 통해 사회의 타락하고 부패가 알려질 때마다 드러나는 신앙인들의 치부와 민낯 때문에, 정작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편의 평가가 되었든, 지금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는 겁니다.

     

    2

    오늘 성서일과 1독서 계속본문인 ‘잠언’을 기록한 성서기자는 ‘지혜’의 요청에도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의 답답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트리거나, 넘어트리려는 사특한 말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할 만큼 유익한 ‘지혜’의 말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는 까닭은, 아마도 ‘나’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신은 참으로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듣기 원하는 사람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독서 선택 본문인 ‘이사야’서는 내용상 1, 2, 3 이사야로 세분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50장이 담겨있는 40장과 55장까지는 제2 ‘이사야’라고 하는데, 그 기록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포로’로 끌려와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주된 내용입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겁니다. 하지만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찾아간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 백성이라 일컫던 ‘유다’백성들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를 가지고 온 선지자가 그들로부터 매를 맞고 수염이 뽑히고 침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결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일이 무너져 망했었건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을 마음이 없습니다. 망하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애굽, 앗수르, 바벨론 같은 외세에 기대어 살 수 있을까?에 내몰렸었다면, 이제는 그저 포로생활에 익숙해진 이땅에서 먹고 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하나님의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괜시리 선지자가 전해주는 ‘해방’이나 ‘자유’ 같은 불온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다, 오히려 바벨론에 의해 핍박이나 박해에 내몰릴지도 모릅니다. 평안한 삶이 깨어지는 것이 싫었기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던 그 때에도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 요한복음 1:11 

     

    3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는 오늘 ‘잠언’서에 등장했던 ‘지혜’를 외면했던 사람들이나, ‘이사야’서가 고발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거절하는 유다 백성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황제 숭배를 위해 거대한 신전이 건축되어 있는 호화로운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뜬금없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첫번째 물음이었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이 주님에 관한 사람들의 평가나 정보라고 한다면, 사실 두번째 물음은 주님이 아닌 질문을 받은 ‘제자’들이 자신의 누구인지,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의 응답이 바로 설교 첫머리에서 확인했던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고백이었던 겁니다. 주님에 관해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응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신이 걸어가셔야 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길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마자, 그는 예수님에 의해 혹독한 꾸지람을 받고 곧장 ‘사탄’을 불리우는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2절입니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 마가복음 8:32

     

    방금전에 주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그가, 주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항의하다’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원형 ‘에피티마오’는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엄히 경고하셨다’는 30절에서 사용된 단어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주님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주님의 선택과 길을 어리석다고 꾸짖고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가 미치기라도 한 걸까요? 어떻게 한 입으로 이렇게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이 ‘베드로’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었을까요? 열심을 다하고, 그 만큼 간절하였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마음을 다하던 예배는 어떤가요? 우리의 기도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아멘’으로 받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듣겠다는 기도였을까요? ‘주님을 믿습니다’라거나, ‘응답해 주실 수 있음을 믿는다’던 우리의 고백안에는 ‘그러나 그렇게 하시면 않되고, 그러나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는 불손한 ‘베드로’의 불만과 섭섭함과 억울함이 담겨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주님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4.

    같은 입에서 찬양이 나오기도 하지만, 또 한순간에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마져 죽음에 이르게 할 말큼 ‘독’을 뿜어내는 것이 우리의 ‘말’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날선 말씀이 지목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말이 그러했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약속과 소망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 내 삶에 육화되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은, 마치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급박한 환경이나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순간 속절없이 쏟아내던 ‘원망’과 ‘불평’, ‘절망’과 ‘불신’같은 우리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입으로 내뱉은 그 말들이 우리 인생을 이처럼 비루함으로 떨어지게 만든 겁니다. ‘베드로’ 사도보다 더 똑똑하고 큰 목소리로 ‘주님은’이라고 술술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인데,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베드로’처럼 온전히 듣지 못하고, 기쁨으로 받지 못하는 걸까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마가복음 8:33b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밑바닥까지 추락할 만큼 실족했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사람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 요한복음 6:28- 29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이것 하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을 믿습니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 요한복음 6:27

     

    ‘영생’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 우리 자신은 ‘구원’에 대해 그닥 갈급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외쳐야 할 교회가 오히려 ‘죽어서 갈 천국행 티켓을 얻었으니 다 되었다’고 무관심합니다. 그리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만 삶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구원을 주시는 ‘주님’께 무관심하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탄아’라고 꾸짖던 말씀이 아니라 덧붙인 말씀, ‘내 뒤로 물러가라’던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람과 맺으신 관계를 결코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자들은 언제나 ‘주님’을 말씀의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내 뒤로’ 앞에는 ‘주님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읽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가 물러가 있어야 할 곳은, ‘주님께 듣고, 주님을 믿으며, 뒤 따르는 자리’가 됩니다. 주님께 내침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가장 주님 가까이로 초대를 받은 셈입니다. 그곳에 있어야 ‘주님’에 관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께로부터 듣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능력있고 잘난 사람이 아니라, 실족하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의 뒤를 맡기신 사람을 ‘제자’로 삼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또다시 세상의 부러움이나 절망앞에서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 마가복음 8:35b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다면, 결국은 그럴싸하게 신앙고백은 했지만 ‘베드로’처럼 또다시 실족하고 말 겁니다. ‘십자가’는 던져 놓고 먼저 믿겠다고 큰 소리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에는 믿음도, 능력도 없습니다. 먼저 죽지않고 ‘부활’하는 법은 없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한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이 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해야할 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없다고, 은근슬쩍 보기 좋은 ‘부활’로 치장해서는 않됩니다. ‘십자가’는 죽을 것 같고, 미칠 것 같고, 돌아서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운 ‘죽음’ 그대로 직면해야만 합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인들이 꺼리고, 헬라인들이 어리석다’고 말한다고 했겠습니까. (고전 1:23b) 

    그의 말대로라면 예수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은 ‘로마’라고 하는 세상안에서 바보가 되고, 망하고, 실패할 것이 뻔한 삶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원치 않고, 바라지 않는 길입니다. 세상이 성공과 행복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저런 것들을 주시고,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면서도, 그런 것이 없어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주님만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꾹꾹 삼키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 먼저 살 생각부터 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을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예수 잘믿어 성공하고, 예수 잘믿어서 부자되고, 예수 잘 믿어서 형통해지는 그런 길은 없습니다. 죽는 것이 먼저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문제에 대해 죽고, 억울함에 대해 죽고, 탐욕에 대해 죽고, 죄에 대해 죽고, 결국은 ‘나’에 대하여 죽는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주님의 ‘십자가’를 들여다 보십시오. 죽음이 시퍼렇게 보이더라도 외면하지 마시고 똑바로 들여다 보셔야 합니다. 그런데도 걸어가시겠습니까? 

     

    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 내가 조롱하겠다. 공포가 광풍처럼 너희를 덮치며, 재앙이 폭풍처럼 너희에게 밀려오며, 고난과 고통이 너희에게 밀어닥칠 때에, 그 때에야 나를 애타게 부르겠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겠고, 나를 애써 찾을 것이지만,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 잠언 1:26 - 28

     

    안타깝지만, ‘잠언’ 기자는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이 도무지 듣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말은 결국은 우리 모두 반드시 절절하게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자기 무능, 절망과 한계를 직면하게 되는 때입니다. ‘나’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을 실감하는 그날이 오면,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시선을 땔 수가 없을 겁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게 될 겁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뒤를 쫓게 될 겁니다.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세상마저 무너지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날이 가깝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도적같이 임한다는 사실에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주목하고 묵상하십시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천둥처럼 큰 소리로 듣게 될 때, 삶을 뒤덮고 있던 모든 어둠의 그림자들은 떠나갈 것입니다. 이 기적같은 일을 이루시려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이 찾아와 계신 겁니다. 아멘.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 스바냐 1: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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