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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9/29 성령강림후 열 아홉번째 *창조절 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9. 26. 23:1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에스더 7:1-6,9-10, 9:20-22 혹은 민수기 11:4~6, 10~16, 24~26

      응송 | 시편 124 

    2독서 | 야고보서 5:13-20

    3독서 | 마가복음 9:38-50

     

    # 설교음원

    http://naver.me/G8srp7Ki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nBLkk08MDw8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해방의 날, '부림'의 기쁨

     

    제자됨의 '감격' 과  '위기'

     

    #01

    오늘 복음서 말씀은 짧은 세단락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첫번째 단락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에 관한 38- 41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오늘로 치면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번째 단락은 42-48절까지로 주님을 믿는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머지 결론처럼 주어진 49 - 50절까지의 말씀은 제자들간의 관계에서 주님께서 요구하셨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당신을 따르려거든 교회밖 사람들에게도, 작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화목하라는 주님의 명령앞에 서 있는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닌척하려고 해도 지금도 교회안에는 크고 작은 갈등과 소란이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썼던 ‘고린도서’만 보아도 극심한 당파로 분열하고, 갈등하던 교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게 어제 오늘일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라고는 하지만 관계의 문제는 어렵기만 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과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속으로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면서도 겉으로는 천사처럼 웃으며 아무일 없는 것처럼 지냅니다. 그도 아니면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지레 모르는 척 포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신앙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처럼 속편하게 되는대로 살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02

    이제, 세 단락의 상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 단락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으레 사람들은 ‘귀신’이라고 하면 무언가 초월적 존재만을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억눌림’과 ‘생명파괴’를 초래하는 세력을 뜻합니다. 과학과 실증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귀신’은 여전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귀신입니다. 이미 ‘돈’은 이 시대의 ‘신’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으며, ‘돈’이 없으면 삶은 곧장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돈’의 위세에 내몰리고 짓눌린 이들을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면, 그것은 모두 ‘귀신’을 내어쫓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매우 귀한 일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밖의 사람들일 때입니다

    저희 아버님 동네 무료 급식 단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불교신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운영되는 단체였는데, 후원자 명단을 보면서 부끄러워지고 말았습니다. 개인으로부터 단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른 종교단체도 후원을 하고 있었지만, ‘교회’의 이름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아닌 ‘불교’나 ‘천주교’ 같은 이웃 종교와 경쟁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함께 손을 맞잡고 돕는 일에는 너무나 자주 인색하고 옹졸합니다. 주기도문은 고백하면서도 정작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번째 단락은 주님을 믿고 있는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작은 자’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교회 공동체나 믿음의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지만 굳이 ‘교회’안에 있는 이들로만 제한하여 해석할 까닭은 없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 나와있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향한 믿음있는 것이 아니듯, 교회 밖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열심, 칭송받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만 못한 이들을 보면 ‘죄인’다루듯 윽박지르고, 심지어는 복음으로 ‘저주’를 쏟아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보다 연약하고, 힘이 없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이나 문제에는 돌처럼 굳은 마음을 지닌 사람처럼 무심합니다. 때로는 무관심을 넘어 냉혹하고 잔인하게 굴때도 있습니다. 회심이나 개종을 조건이나 구실 삼아 도움이라는 명목아래 당장 배고픈 이들을 채근하는 경우가 그렇고, 당장에 사회보장비용 부담 때문에 비정규직 근로자들이나, 사회에서 낙오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비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정체성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차별받고 내몰린 이들이나 그런 이들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를 먼저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규정, 교단법을 들이대며 네가 먼저 ‘회개’하고 우리편이 되면 용서하거나 사랑하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그때 마다 ‘믿음’안에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작은 자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짓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을 개역개정 성경은 ‘실족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자신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첫 번째 부론에서 ‘절망’이야 말로 ‘죄’라고 정의합니다. 아무리 깨어지고 상해있어도,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조롱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이 겨우 겨우 붙들고 있던 이들을 ‘절망’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큰 ‘죄’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무심한 말과 행동으로 연약한 이들을 절망에 떨어트렸던 사람들은 지체 높은 분들을 대할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성 비위나 횡령 같은 형편없는 ‘죄’가 드러나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며 한없이 친절하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힘있는 자들과 적당히 타협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득볼 것도, 잘보여야 할 것도, 눈치 볼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단락은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들 사이에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이처럼 가까운 관계가 훨씬 어렵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야 얼마든지 친절하고 겸손하고 선하게 보이도록 치장할 수 있지만, 가까운 관계일 수록 이게 잘 않됩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감추어진 것들이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03

    손이나 발, 눈이라도 뽑고, 차라리 연자맷돌을 짊어지고 죽는 편이 말씀이 이런 죄를 지으면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협박’처럼 들린다고는 해도, 주님의 말씀이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제 아무리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고, 심지어는 손과 발을 찍어낸다고 해도 여전히 내면안에 남아 있는 비굴함으로 떨어지는 본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덧붙이신 ‘소금 이야기’는 정작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미숙한 우리를 위해 가르침의 말씀 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5:13을 읽어보면 ‘소금’에 대한 말씀을 더 손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 마태복음 5:13

     

    맛을 잃은 ‘소금’은 버려질 뿐입니다. 맛을 잃는 순간 이미 ‘소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소금’은 문자 그대로 짠 소금이 아니라, ‘제자’들을 빗대어 사용된 단어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려지듯, ‘맛’을 잃은 제자들도 주님으로부터 버려지고 말 겁니다. 그 ‘맛’은 ‘제자다움’일 겁니다. 제 아무리 주님의 곁을 지키고, 모두가 인정할 만큼 큰 일을 해냈다고 해도 ‘제자다움’을 잃는다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일 수는 없다는 말씀인 겁니다. 그렇다면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요구되는 ‘맛’은 무엇일까요? 앞서 가시는 주님께로부터 듣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신뢰’와 ‘믿음’ 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더이상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다움’을 잃게 되고, 버려질 수 밖에는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이 심각하게 들리시나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있어 주님께로부터 버려진다는 것보다 더 위급하고 절체절명의 사태가 있을까요? 모두가 이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겠지만, 솔직히 큰 감흥은 없을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만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우리는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고 성취할 때, 더 큰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안에 얼마나 놀라운 기쁨과 자유가 담겨있고, 해방과 구원, 생명의 충만이 넘쳐나는지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04

    1독서 선택본문인 민수기 11장 말씀은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 백성이 되는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과 ‘규례’를 받은 이후 1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고, 시내광야를 출발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삐걱거립니다. ‘먹거리’때문에 불평에 떨어진 겁니다.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11:5-6 

     

    신분의 높고 낮음, 가진 것의 유무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땅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누구나 평등합니다. 제 아무리 자신을 자랑하고 으스대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무려 1년이나 척박한 ‘광야’에서 몰살당하지 않고 살아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늘 똑같습니다. 일단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워했었는지와 무관하게 ‘상투성’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마땅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만나’가 천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감탄하던 그들의 입에 ‘이것 밖에는 없다’는 불평이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어제’도 살고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당연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떨어지는 겁니다. 여기에는 누구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생명을 지켜내고, 일상의 평안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를 느끼지 못할 만큼 무뎌지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 삶은 비루함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귀한 것’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쾌락, 더 자극적인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을 만큼 감각이 무뎌지고 딱딱하게 굳어지니 행복해질 수 없는 겁니다. 

     

    1독서 본문인 ‘에스더’서는 삶의 환희에 대해 우리를 일깨웁니다. 악인이었던 ‘하만’은 유다 백성들을 멸절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날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매일이 다가오는 ‘죽음’만 보일 뿐입니다. ‘에스더’나 ‘모르드개’ 역시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른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을 날을 받아 쥔 그들의 운명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하만의 죄를 지적하는 에스더

    그러나, 제비 뽑혔던 그날 아침이 밝았을 때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된 환희의 날이 열린 겁니다. 돌이킬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날의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05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겠다거나, 제자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한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서 벗어났다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결심이 있어도 결국 인간은 누구라도 속절없이 ‘상투성’으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기적이 오늘은 별볼일 없어질 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상투성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걸까요? 그리고 반대로 무엇을 통해 우리 자신을 건져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상투성’에 떨어지는 까닭은, 주님과의 관계가 크게 보이지 않을 만큼 다른 어떤 것들에 시선을 빼앗긴 탓일 겁니다. 시선을 빼앗길 만큼 간절해지는 까닭은 내면에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두려움은 평안이나 안락함, 내가 붙들고 있는 것들, 그리고 이 정도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강요하는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광야’를 지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종족이 멸종될지도 모를 ‘부림’의 날,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지는 죽음에 내몰린 이들에게만, 평범하게 주어진 ‘오늘’이 ‘생명’을 얻었다는 넘치는 기쁨과 자유로 경험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직면하고, ’생명’에 집중하지 못하면 무료하고 건조한 상투성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혹시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이 볼품없어 보이고, 삶은 무기력하고, 억울함과 섭섭함이 밀려들고 있나요?

    먼저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의 맛을 실감하며 살고 있는지, 그리고 참으로 내가 그런 신앙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버려지지 않겠다는 절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나 구원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주님께로부터 버려지지 않는 일에 마음을 담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관심을 놓치게 된다면 결국은 곧장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도, 즐거운 사람도, 병들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성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언제나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 예수님의 제자인 겁니다. 이것을 놓치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높은 사람이 되려는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이들이라면, 예수 안에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교회밖의 사람들과도, 연약하고 작은 이들을 대할 때에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도, 능히 사랑과 겸손으로 하나됨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제자됨이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마음이나 시선을 일치시키는 것 뿐입니다.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이요, 그 맛을 지켜낸다면, 어떤 상황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겁니다.  주님은 오늘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잔치나 축제를 즐길 수 없는 형편에 떨어져있는 ‘가난한 사람들’, ‘작은 자’들에게 선물같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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