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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8/25 성령강림후 열 넷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8. 21. 13:4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열왕기상 8:(1,6,10-11)22-30, 41-43 혹은 여호수아 24:1~2a, 14 ~ 18

      응송 | 시편 84

    2독서 | 에베소서 6:10-20

    3독서 | 요한복음 6:56-69

     

    # 설교음원

    http://naver.me/GbDcRerd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3brvSwxHRY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David Roberts, 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Under the Command of Titus. 1850

    '너희도, 가려느냐?'

     

    1

    오늘 우리는 드디어 지난 7월 28일 성령강림후 10주부터 읽어왔던 ‘예수는 생명의 빵’이시라는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참된 지혜’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깨닫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으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과연, 이 지혜의 말씀은 오늘 우리 안에서 지혜가 되고 있을까요?



    2

    오늘 1독서 본문의 등장인물은 계속해서 ‘솔로몬’입니다. 이미 지난주 설교에서 열왕기서 기자가 ‘솔로몬’의 영광이 아닌, 그가 왜 무너졌는지에 대해 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딱히 그에게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무실 ‘성전’을 완공한 후, 하나님계신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마다 들어달라’던(29,30) 그의 기도는 유대교 신앙의 핵심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전, 정확히는 성전에 놓여진 ‘언약궤’위에 하나님이 머무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비록 성전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성전에서 분향제사를 드리던 아침 9시와 오후 3시가 되면 예루살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성전 신앙의 흔적은 성경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 다니엘 6:10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다 무너져내렸지만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도 이런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 사도행전 3:1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도 여전히 저녁 상번제가 드려지던 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갑니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요? 오늘도 목회자들은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성도들의 신앙을 독려합니다. 오늘 이런 신앙의 태도가 옳은 것인지 장황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것 만큼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성전’이 아닌, ‘우리를 성전 삼아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계신다거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들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며, ‘함께’함으로 기도가 형식적이고 느슨해지도록 하는 것들을 뿌리치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튼 ‘우리의 기도를 들어달라’던 솔로몬의 기도는 자뭇 신실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무래도 함께 주어진 선택본문인 여호수아서를 읽어봐야, 성서기자의 의도가 드러날 것 같습니다. 본문인 여호수아 24장은 ‘세겜 언약’으로 불리우는 대목입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목적지인 ‘가나안’ 초입 ‘세겜’에 이르렀을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12지파를 불러모았습니다. 군중들은 이제 힘겹던 사십년 모든 여정이 다 끝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여호수아에게는 이제야 말로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였습니다. ‘가나안’은 풍요와 평안을 자랑하는 ‘우상’들의 땅입니다. 자칫 ‘하나님’만 믿으며 달려온 출애굽 훈련의 시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조급해진 그의 마음은 ‘너희들이 섬길 신을 선택하라’는 외침으로 이어집니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 여호수아 24:15



    자, 솔로몬이 드렸던 기도와, 여호수아의 설교에서 무언가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셨나요? 하지만 이게 잘 보이지 않으실 겁니다. 둘다 훌륭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차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애매해져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복음서 말씀으로 건너가겠습니다.



    3

    기억하시겠지만 오늘까지 읽은 요한복음 6장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앙의 유무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이런 식의 기적에 쉽게 열광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자신의 현실에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요행을 구하고, 신앙인들은 기도로 그런 일을 구할 뿐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세상살이는 풍족하게 먹고 마시고 안락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들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돈’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이유도, 직장인들이 고달픈 직장생활에 내몰리는 이유도, 여전히 피로에 지친 세상이 멈추지 않고 바쁘게만 돌아가는 이유도 그리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결국 신앙생활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절실한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썩어없어지고 말 것들’이라는 평가를 타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우리는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체 절명의 운명앞에서 우리가 구하던 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이런 것들을 얻음으로  ‘안식’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더 얻어내야 한다는 강압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때문에 날마다 염려 근심으로 내몰릴 뿐입니다. 마치 도파민에 중독되는 것처럼 더 많이 갖고 더 자극적인 것만을 찾다보니, ‘생명의 빵’ 되시는 당신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머리로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매일 주어진 모든 것에 충분히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닥 매력이 없는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요한복음 6:60



    제자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길,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그런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매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투정하고 있습니다. ‘어렵다’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스클레로스’는 단순히 이해하기 난해하다는 말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동의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몸은 비록 주님 곁에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우리 현실이고 우리의 위기가 아닐까요.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 요한복음 6:66



    마음이 떠나자,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부모 형제도 버린 채,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던 제자들도 결국은 주님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그들이 왜 주님 곁을 지키고 따르는 일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이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여러분이 얻어야 하는 답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4

    물론 따르던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믿음이 없거나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십자가’라고 하는 종착역에서는 한명도 예외 없이 다 똑같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싸잡아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제자’삼는 일에 실패한 예수님의 책임이라고 해야할까요? 하지만, 그들이주님을 떠나게 된 이유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고, 그분이 걸어가시는 삶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자신들의 탐욕이나 욕망을 채워주길 바랬던 겁니다. 거창하게 소명이나 비젼을 품던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은 늘상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을 향했습니다. 결국 그분에게서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을 수 없고, 남는 것이 없다 싶으니,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다를까요?

    마음은 이미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기울어졌음에도 언젠가는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머물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결국 주님의 곁을 떠나게 될 겁니다. 주님이 향하시는 것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주님이 꿈꾸시던 것을 함께 꿈꿀 수 없다면 누구라도 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은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그리고 왜, 중요한 분입니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이 믿으셨던 하나님과, 예수님이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나라’에 간절할까요? 우리 믿음과 예배는 참으로 예수님이 이유이고 목적일까요? 많은 경우에 ‘예수 믿고 천국가겠다’고 고백은 하지만, 천국을 금은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집이나 풍성한 상급처럼 그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확장하는 수준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에서, 예수님은 그저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된 겁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기다렸던 천국은 언제나 다시오실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와 ‘부활’로 정의되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은 이 땅을 떠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가난하고, 깨어지고, 박해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그곳이 ‘천국’이었던 겁니다. 이 말씀이 실감이 나시나요?



    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이 폭로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나, ‘그분으로 인해 역사가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 그날에 주님과 함께 맞이하게 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는 식의 간절한 열정이 없다면, 비록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지, 혹은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결국 언젠가 우리도 실족하게 되고 말 겁니다. 



    5

    이제 1독서 구약 두 본문의 의미와 차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솔로몬’은 분명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는 기도하고 있었지만, 그는 기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안에는 ‘응답’만 가득차 있을 뿐, ‘어떤 기도를 드릴 것인지’ 또는, ‘무엇을 구할 것’인지와 같은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드리는 것임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기도에서 한참을 어긋나 있습니다. 이제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엇이든 구하기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 ‘도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의 설교는 어떻습니까?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 여호수아 24:15b



    하나님을 통해 구하고 얻을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 ‘솔로몬’과 달리,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의 터위에 세워진 사람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우상’들처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수단이 아닌, 인생의 걸음을 함께 하신 자신의 구원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들거나 자기 뜻대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편이 될 뿐입니다. 이건 모두 ‘솔로몬’이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응답’보다 귀하다는 것을 몰랐고, ‘여호수아’는 ‘가나안’보다 소중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던 차이겠지요

    다시 복음서로 돌아갑니다. ‘오병이어’에 열광하며 따르던 그렇게 많은 제자들이 하나 둘 주님 곁을 떠나고, 다시 처음의 열 둘만 남았습니다. 애틋한 표정으로 주님이 ‘너희도 떠나려 하느냐?’물으셨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 요한복음 6:68



    베드로의 답변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 부분을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어디로 가오리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던 것과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베드로’는 남았습니다. 그가 바라던 것은, 예수님안에서 발견한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그랬듯,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나,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원하신다면 ‘돈’버는 길을 찾으시는 것이 낫습니다. 주님은 또한 마음의 평안이나 위로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오신 분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바라신다면 친구를 사귀고 여행이나 여가를 즐기며 사시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은총으로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우리를 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얻어야 할 것은, 생명 경험, 즉 하나님 경험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생명’의 결핍을 실감하게 되는 막다른 삶에 내몰리지 않는 한, 그러니까 ‘제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 한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설교’에 머물고 말 겁니다. 그러니 애당초 저는 여러분을 설득해내거나, 변화시키거나,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하지 말고 침묵하는 편이 나을까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않으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생명의 빵으로 먹고 마시며, 영생하게 하는 생명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해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작정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허락되어 있으니, 치열하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길 뿐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지만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목이 마르다'는 것을 절감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살 뿐입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다른 것으로 살아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엿보았으니,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가 약을 찾듯, ‘영생하는 생명’을 찾아 마음과 영혼을 다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부활’하신 주님께 집중하며 나아가십시오. 제 아무리 대단한 성전도, 마귀와 대적할 신령한 전신갑주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이 말씀에 잇대어, 오직 우리의 능력되시는 주님과의 일치를 향하여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 에베소서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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