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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성령강림후 20주 (창조절 여섯째 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0. 4. 16:3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욥기 1:1, 2:1-10 혹은 창세기 2:18 ~ 24
응송 | 시편 26
2독서 | 히브리서 1:1-4, 2:5-12
3독서 | 마가복음 10:2-16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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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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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正直)한 이들에게, 허락된 나라
1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면 아름답고 평안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비극’인 것이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안에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시련’이라는 얼룩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언제 보아도 깨끗하고 반듯해 보이는 ‘인생’이 있다면, 그것만큼 거짓된 것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성서일과 1독서에 등장하는 ‘욥’은 이처럼 절망과 아픔에 고스란히 내몰려있는 인생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그의 삶을 덮친 어둠은 잔인할 만큼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욥’은 너무나 무력합니다. 이런 삶의 아픔과 절망의 문제를 대할 때마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교회안에서는 ‘인과응보’적인 신앙의 틀이 작동합니다. 격려와 조언이라는 명분으로 ‘기도해라, 믿음을 가져라’는 충고가 날아듭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현실의 고난과 아픔은 고스란히 ‘네 탓’이라는 비난이 감추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살아있음’ 때문에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문제가 예수를 잘 믿는지 아닌지, 그가 선한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청탁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존재’라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애당초 인생이란 것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나, 아직은 직면하지 못한체 살아갈 뿐 입니다. 이 세계안에 살도록 부여받은 생명이라면, 고난이나 절망은 누구의 삶이라도 차별하지 않고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왁스럽게 생명을 집어삼키는 어둠을 직면하게 될 때, 도망치다 지친 어떤 이들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결단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최후에 극단적 결단까지 내몰리게 만드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상황이 아니라 홀로 던져져있다는 극심한 외로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살에 실패한 분들께 들었던 말입니다.
참으로 홀로 살아가는 인생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애타게 찾았던 소중한 한 사람이, 오히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 처럼 평온했던 삶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애당초 그런 아픔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혼밥, 혼술, 그리고 결혼을 거부하는 것처럼 자발적인 ‘고독’을 선택하는 문화가 가속화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홀로’ 걸어가는 길은 가볍습니다. 그러나 잘 가꾸어져있고 평화로운 산책길이라면 몰라도, 사나운 폭풍이 몰아닥치고 어둠에 길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던져지게 된다면, 더 이상 콧노래를 부를 만큼의 여유를 부릴 수는 없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일지라도, 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실낯같은 희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당할 수 없는 무력한 우리 현실 앞에서 최선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가 아닌, ‘누구와 함께’인가라는 답을 찾는데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느닷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험악한 인생의 길에 내몰린 우리를 위해, 창조주께서 마련해 주신 선물이 바로 ‘함께 걷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성서일과 1독서 선택본문으로 주어진 창세기 2장 인간 창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달리,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숨쉴 수 있고, 발딛고 설 수 있는 땅도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조급함에 내몰리게 됩니다. 정작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채 달려만 갈 뿐입니다. 멈추어 서서, 느긋하게 삶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흔하지 않는 요즘입니다.
애써 빚어주신 생명이지만 홀로 있는 인간이 결국 스스로 설 수 없어 파괴되고 침몰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 하나님 눈에 여간 안쓰럽게 보였는가 봅니다.
2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 창세기 2:18
개역개정 성경이 ‘돕는 베필’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이 대목의 해석 때문에 한 동안 어리석게도 교회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당연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성 목사 안수를 거절하는 교단이 있으니,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무관한 과거의 일이라고 발 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본래 ‘돕는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남자’와 ‘여자’가 우열이나 차별적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서 작품같은 서로에게 걸맞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단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상대가 되어줌으로, 인간은 제 아무리 처연하고 극심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더라도 비로서 온전한 존재로 세워질 수 있게 됩니다. 비스듬히 서야 할 사람을 온전히 하늘을 향해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또한 비스듬히 서 있는 사람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됨’에 관한 창세기의 이 기사는 그래서 굳이 ‘가정’에 대한 이야기로 읽기 보다는, 새번역 성경처럼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 잇댄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알맞은’, 그리고 ‘꼭 필요한’ 존재로 지음받았다고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람은 사람 곁에 있을 때만, ‘사람’일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탄’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탄’이나 ‘귀신’은 생명을 파괴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빚으신 대로 서로를 생명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넘어트리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창조 사역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려는 겁니다. ‘사탄’이 사람을 넘어트리는데 사용하는 장기는 사실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끊임없이 거짓말로 속이고 참소하는 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을 참소하던 그는, ‘욥기’에서는 천상의 회의 장소에서 하나님께 인간 ‘욥’을 참소합니다. 하지만 백번 천번 ‘사탄’이 참소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앞에서라면 인간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되시는 하나님은 사탄의 궤계를 단박에 꿰뚫어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믿음에 넘어지시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참소하는 사탄의 달콤하고 치명적인 속임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신하고, 거부하고, 실족하고 떠나게 됩니다. ‘욥’의 아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욥기 2:9b
‘욥’의 아내가 던졌던 이 치명적인 비난은, 절망에 떨어질 때마다 우리 안에서 쏟아져 나오려고 했던 말들이었습니다. ‘욥’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어졌습니다. 극심한 고난의 때에 생명되시는 하나님께 잇대어 넘어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 지음받은 ‘사람’이, 되려 그에게 ‘하나님’을 고통을 가져다 준 분으로 불신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녀의 참소 때문에 지금 욥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졌습니다. 차라리 홀로였다면, 하나님께조차 버림받았다는 이런 비참함은 없었을 텐데요. ‘고난’을 헤쳐낸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보였던 ‘욥기’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인간’에게 꼭 알맞은 짝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존재 위기’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3
복음서 이야기안에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의 모범이 되었던 그들이라면 하나님이 지으셨던 아름다운 인간됨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신 보다 못한 이들,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일 때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에 있는 이들을 망신주고 정죄하기 위해 ‘말씀’ 조차도 서슴지 않고 도구처럼 사용했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해서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 신명기 24:1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는 그들의 발칙한 물음 속에는 마치 에덴에서, 욥의 비참한 삶에서 참소하던 ‘사탄’을 닮은 음험한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율법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주어진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혼증서를 써주지 않으면 과부로서 공동체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근거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말씀인 겁니다. 신명기 24장 이후의 본문들만 읽어보아도, 전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보호하라는 취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문제는 이 사람들이 이런 말씀의 정신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이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온전케 하기 위해 소중한 존재라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선물처럼 주어진 ‘아내’를 어떤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모세의 말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말이 고스란히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말보다, 그 말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말씀의 정신이 더 중요한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들의 물음안에는 부부간에 문제가 생긴 것이 모두 ‘아내’의 탓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습니다. 사탄에 속아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을 향해 ‘너 때문’이라고 비난하던 ‘에덴’에서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모든 것이 ‘네 탓’이니 마땅히 버려도 된다는 이런 생각안에는 ‘너’는 쓸모 없고, 필요 없는 대상, 나를 무겁게 하고 불편한 대상, 나를 넘어트리는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도구나 명분처럼 사용하는 이들과, 하나님의 말씀과 온전히 한 몸이셨던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는 시선과 기준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가복음 10:6-9
주님의 눈에는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너는 나와 다르다가 아니라, 한 하나님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한몸’이기 때문에 애당초 버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내 맘대로는 더더욱 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쓸모 없어 보이고 연약해 보인다고, 남들보다 못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내 몸을 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4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로 나아가려는 어린 아이들을 꾸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천국’을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무언가 우리와 다른 기준으로 보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어른들은 주님을 아이들에게 복빌어 주는 사람 쯤으로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랍비나 명망있는 어른께 데리고 나와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은 유대 관습이었으니 이런 오해를 나무랄 수 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입니다.
주님이 꾸짖으신 대상이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화를 냈다고 번역된 헬라어 ‘아가나크테오’의 의미는 ‘슬퍼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왜 제자들이 꾸지람을 받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며 서글퍼하셨던 까닭은 아마도 지금껏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여전히 당신의 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하신 탓일 겁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주님은 아이들에게 복빌어 주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하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눈에는 어린 아이들이 ‘사람’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듣고 배우면서도, 주님께서 사람에게 하늘의 복을 빌어 주는 일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게다가 주님이 사람을 가리거나 편애하고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조차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쓸모와 효용성,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와 같은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라도 ‘사람’은 ‘살아감’에 있어 ‘함께’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같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면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과연 오늘 주님은 우리를 보시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요? 온 맘을 다해 아이들을 축복하시던 그때처럼 기쁨에 차있을까요? 아니면, 제자들 때문에 섭섭했던 눈물을 흘리고 계시진 않을까요?
예수께서 오늘 유독 ‘어린 아이들’을 주목하신데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탐욕에 물든 어른들 같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복된 눈을 가졌습니다. 공부 잘하는 친구, 착하고 칭찬받는 모범생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다 조금이라도 득을 보려고 하는 어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람 됨됨이나 심지어 목회 조차도 겉으로 드러나는 이해득실로만 평가하려듭니다. 돈은 얼마나 모았는지, 사람들은 얼마나 모이는 교회인지, 건물은 얼마나 큰지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나 목회의 성공여부를 가늠지으려는 유혹에 떨어집니다. 그런 눈으로 보니 ‘하나님의 복’이 귀하게 보일리가 없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일리가 없으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도리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들에게 허락된 나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들처럼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존재들에게만 보여지고 드러나는 ‘나라’라는 ‘축복’의 말씀인 셈입니다.
5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며 사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막연한 언젠가의 일이 아니라, ‘지금’ 살아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단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나라’는 없다는 뜻이고, ‘하나님 나라’에 거한다는 것은, 또한 적어도 내 삶에 다른 왕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기준이나 ‘나’ 자신이 ‘주인’되는 인생을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에 운명을 걸고 살아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에 와있는 ‘나라’로 보고, 주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이런 전향적인 삶의 전환을 성경은 ‘회심’, ‘돌이킴’ 또는 ‘메타노이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회심하였는지, 지금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어제까지 세상안에서, 세상을 중심으로 마땅하다고 여기던 생각들이 바뀌고 있는지, 삶의 기준과 가치관이 바뀌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복음’으로 회심했다면, 자연스레 여러분의 말속에는 복된 말이 담겨있게 될 겁니다. 투박한 정죄의 말대신에 있는 그대로를 아름답게 보는 말이 담길 겁니다. 타박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는 말 대신에, 지지하고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는 복음의 말이 언어가 될 겁니다. 그렇게 삶으로 응답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뀔 겁니다. ‘나’와 다른 ‘너’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되어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면 기뻐하십시오. 있는 그대로 보는 '정직한' 눈을 가졌다는 것은, 이제 정직 나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니까요. 아이들을 영접하시듯 주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나라로 영접하시고, 힘을 다해 열렬히 하늘의 복을 빌어주실 겁니다. 우리는 삶의 벼랑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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