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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10/13 성령강림후 스물 한 번째 주일 (* 창조절 7주 )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0. 9. 12:1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계속) 욥기 23:1-9, 16-17 혹은 (선택) 아모스 5:6~7, 10 ~ 15

      응송 | 시편 22:1-15

    2독서 | 히브리서 4:12-16

    3독서 | 마가복음 10:17-31

     

    # 설교음원

    http://naver.me/5oE1bvtD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qpPPq-kvRD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mann, 1824-1911), <그리스도와 부자 청년>, 1889

     

    '버릴 것'인가, '따를 것'인가?

     

    1.

    오늘 함께 읽은 복음서 말씀은 사실 ‘은혜롭다’기 보다는 우리 마음을 찜찜하고 부담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실족하고 돌아섰던 ‘부자’청년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마가’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부자’라고만 기록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뭐가 되었든 우리들은 ‘부자’만 된다면 인생에 아쉬울 하나 없겠다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 한밤중에 남들 눈을 피해 주님을 찾아왔으니 어색해 보입니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만큼 그는 간절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마가복음 10:17b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아쉬움’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는 ‘영생’ 그러니까 ‘구원’을 얻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에 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여러분은 영생에 대한 이런 질문을 언제 던져보셨나요? 그런 기억은 있으신가요? 아니면 지금도 그 물음을 붙들고 씨름 중이신가요? 다 이룬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들이 아닌,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그로 인한 헛헛함을 안고 주님을 찾는 그의 걸음에 제 마음이 다 흐뭇해지니, 주님은 더 얼마나 기대감이 컸을까 싶습니다. 함께 동거동락하고 있는 제자들도 정작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해 누가 큰 사람이 될 것인지 같은 것에 매달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찾겠다고 제발로 주님을 찾아왔으니 오죽하셨을까요? 게다가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계명을 지키고 행하며 살아왔을 만큼 신실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를 만한 ‘제자’로 이만한 사람이 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를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마가’는 21절에서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안에서 사사건건 ‘바리새인’들과 대립하고 갈등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서 ‘율법’에 호의적이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주의’에 떨어져버린 ‘바리새인’들의 가식과 허상을 깨트리려 하셨을 뿐입니다. 

     

    2.

    종교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구원’의 길을 찾겠다고 나선 그의 걸음은 귀합니다. 게다가 그 걸음이 주님을 향하였으니 방향도 제대로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세요.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마가복음 10:17b

     

    무엇이 눈에 들어오나요? 율법의 한계에서 돌이켰다고는 해도 여전히 그는 ‘율법주의’에 길들여진 시선에 치우쳐있을 뿐입니다. 그가 주님께 물은 것은 ‘무엇이 구원의 길’인지가 아니라, ‘그 자신이 해야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인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지키고 행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에 오랫동안 길들여왔던 탓일 겁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치명적인 함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지켜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있으니,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아서라’는 말씀이 전부입니다. 주님께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일 뿐, ‘율법’도 절대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비롯해 ‘율법’을 무시하고 어기는 ‘불법한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던 겁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시던 주님께서 그에게 남긴 결론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씀에 넘어져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훌륭한 랍비라고, 자신의 헛헛함에 답을 줄 수 있을 만한 분이라고 찾아왔지만, 주님의 말씀을 넘어 설 수는 없던 겁니다. 주님을 떠난 그를 보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니까 마땅하다 싶을 뿐, 이게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주님의 말씀은 무척 불편해질 겁니다. 실족하게 될른지도 모릅니다. 사실 지금 우리는 가진 재산을 다 판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통해 무어라도 하나 얻으려는 마음 뿐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닌 척하면서 주님 곁에 머물고 있으니, 적어도 오히려 슬퍼하며 주님을 떠나간 이 부자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3.

    부자 청년은 떠나갔지만, 제자들은 남아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 사실 ‘부자’ 청년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 들으라고 기록된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떠나가는 이들과 달리 ‘주님의 제자’됨에 관한 말씀인 겁니다. 그리고 그속에 유명한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낙타’의 비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 마가복음 10:25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에 널리 통용되던 격언이었습니다. ‘낙타’ 대신에 ‘코끼리’나 ‘밧줄’을 사용한 변형된 버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늘귀’가 비유나 상징인지, 아니면 당시 실제로 성안으로 들어갈때 사용되던 ‘문’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 자체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말 그대로 ‘부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그 만큼 힘들다는 말을 과장되게 설명하셨을 뿐입니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주님 말씀은 뒤집어 읽으면 그만큼 ‘가난한 사람’은 구원받기 쉬운 말이 됩니다. 하지만 정작 제자들은 주님 말씀에 손사레를 칩니다. 그런 식이라면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호감을 갖고 있던 ‘부자’ 후원자나 신자들을 얻을 길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만이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이유는 한가지 뿐입니다. 사실은 그들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을 속물보듯 보지는 마십시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부자’가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복’받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게다가 사실 우리도 마음 저 한켠에 이런 마음을 감추어 두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곧장 제자 ‘베드로’의 뜬금없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 마가복음 10:28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렸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건 그들 자신이 아닌 이어진 29절 주님의 답변을 통해 드러납니다.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그리고 논밭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이런 것들을 버린 이들은 백배의 축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주님께서 밝혀주신 ‘보상’입니다.

     

    4.

    이제 우리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 공동체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해주셨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여전히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에서 자유롭지 못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못 읽으신 겁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버리라’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치채셨나요? 정작 중요한 것은 ‘따르라’는 말씀에 있는 겁니다. 문제는 정작 우리 자신이 왜 주님을 따라야 하는지?와 같은 필요성이나 근거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 모르니, 자연스럽게 ‘어떻게 내것을 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만 눈에 들어올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싶다는 마음은 진실일 겁니다. 하지만 ‘말씀’ 자체의 소중함을 모르니 자꾸만 신앙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싶은 마음에 내몰리게 된 겁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안에는 언제나 오직 ‘주님만을’ 이라는 타협불가한 명령이 ‘전제’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버릴 것’이 그만큼 많으니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는 자리입니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본문의 말씀처럼 로마 치하의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던 삶을 포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셨나요? 복음과 주님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던 치열한 갈등은 무엇이었나요?

    많은 경우에 본문은 ‘버리라’는 말씀에 넘어진 ‘부자 청년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자연스레 ‘재물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라’는 식의 메시지로 본문 설교가 마쳐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한 욕망 자체를 끊어내고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을 벗어나는 문제입니다. 제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큰 욕심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크든 적든 우리는 재물에 대한 관심이나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재물’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정말 그것이 핵심이었다면 우리는 세상과 등을 진 체 살아야만 할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 결별한 채 깊은 산이나 외딴 섬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제자들을 ‘세상을 향해’ 보내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그러나 언제나 주님을 따르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길이 될 수 밖에는 없는지 모릅니다.

     

    5.

    다시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주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말과 동의어였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얻거나, 누리려면, 심지어는 그것이 ‘구원’이라고 하더라도 더 열심히, 더 많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이런 사고에 의해 세상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다보니 믿음에 길에 들어선 우리 또한 이 만큼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그만큼 못하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자기의’와 ‘업적’에 천착하는 율법주의적 타성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똑똑하고 거룩했던 부자 청년은 새로운 생명의 길을 선택하지 못한 채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무식하고, 실패 투성이에, 여전히 헛발질인 제자들은 여전히 ‘생명의 주가 여기 계시니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며 주님의 곁을 머물고 있습니다. 무엇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이들, 주님께 잇대어 살아가는 이들만을 제자라고 하는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불법한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도, 깨끗한 사람도, 거룩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하면 살 수 있을까요? 애당초 ‘생명’이란,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살기 위해 정신없이 구하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같이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억만금이 있다고 해서 ‘생명’을 살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임시로 필요한 것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이 사로잡힌 탓에 ‘부자’청년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 ‘생명’의 나라로 오라는 초대에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바울이 말했던 썩어 없어질 것들에 집중되던 시선과 관심을 돌리십시오. 그런 것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하고 쓸모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다 버려야 할 것들일 뿐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지, 정작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는 겁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운명에 우리 영혼을 걸고, ‘나를 따르라’던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어가는 겁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부자청년처럼 또다시 전도하고, 헌신하고, 신앙생활하고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것들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떨게 하셨기 때문이지, 내가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 | 욥기 23:9, 16, 17

     

    1독서 계속본문인 욥기 23장에서 ‘욥’이 치명적인 고통에 떨어지게 된 근원적인 원인은 다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어디를 둘러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부재’ 때문에 그는 처참합니다. 그렇다고 그를 찾아온 재앙이 가볍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떨어져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시련 뿐만 아니라, 운명 전체를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기쁜 일이든지 슬픈 일이든지,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피하고 싶던 것인지와 무관하게, 자기 운명 전체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들여다보고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욥’에게 찾아온 견딜 수 없는 재앙이나 고통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시련에 휘둘려 삶을 체념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짓밟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어둠에 떨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신앙,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믿음’은 이런 겁니다.

     

    6.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눈에 들어오고, 주님의 말씀이 심중에 들리고, 주님의 구원이 믿어질 때가지, ‘십자가’위에서 살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 구원 사건에 집중하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나를 따르라’던 그분의 말씀에 운명을 걸고 걸어가십시오. 썩어 없어질 거짓된 생명을 ‘버리고’,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 아모스 5:14

     

    살고 죽는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만을 따르는 이들의 운명을, 기꺼이 ‘부활’하신 당신과 한 몸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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