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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1/26 주현후 3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 22. 18:3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느헤미야 8:1~3, 5~6, 8~10

      응송 | 시편 19

    2독서 | 고린도전서 12:12~31a

    3독서 | 누가복음 4:14~21

     

    # 설교음원

    http://naver.me/5jJfZSuw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L0qwkJUNcI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제임스팃소,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

     

    '말씀',  '사건'이 되다 !

     

    1.

    오늘 1독서 구약본문인 ‘느헤미야’안에서 읽게 되는 ‘이스라엘’의 절절한 신앙의 모습은, 가뜩이나 교회가 외면당하고 ‘복음’이 손사레를 당하는 시절이라 그런지  잠자고 있던 우리 마음을 다시 뛰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감동적입니다.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기적처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깨어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그 동안 갖은 방해와 시련, 급박한 생존의 문제에 내몰리는 일도 수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다 ‘꿈꾸는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좌절’과 싸워내야만 했습니다. 1차 포로 귀환 이후 그런 시간이 백년이 다 되어갈 때즈음 꿈만 같던 성벽 재건이 끝이 났습니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날이 온 겁니다. 수문 앞 광장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단에 올랐습니다.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현실 문제에 내몰려 ‘하나님’조차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너나 할 것없이 모여든 사람들이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사람들이 이러는 것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이 순간 만큼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밖에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거기 그곳에 늘 함께 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모진 박해와 세상의 조롱과 힘겨운 삶으로 서럽고, 눈물나던 지난 시간 모두가 한순간에 위로받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

    거기에는,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 느헤미야 8:2b

     

    성서기자의 고백처럼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참으로 ‘말씀’이 들리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로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과, 들리는 ‘사건’이 되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 요나 4:11

     

    같은 신앙안에 있고,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극심한 갈등과 분열과 혼란에 내몰리고 있는 요즘 한국 사회와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교회와 신앙인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이방땅 ‘니느웨’를 향했던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지목했던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하나님 말씀에 응답하던 ‘이스라엘’과, ‘광장’으로 몰려나가 저마다의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우리의 신앙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 느헤미야 8:8

     

    저들이 말씀 앞에서 마음이 열렸던 것은 들을 때,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아듣는다’는 대목의 히브리어 ‘샤칼’의 뜻은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학사 ‘에스라’가 읽기만 하고 군중들은 덮어놓고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 추론’을 통해 ‘진리’를 실감하고 깨닫는 지적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말인 겁니다. ‘광장’에 모여든 그들에게 ‘말씀’은 통역, 즉 ‘해석’되고 가르쳐졌으며, 그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은 실감나고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말씀 경험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해되고 깨달아지는 ‘사건’으로 경험되어야 만 하는데, 오늘 우리의 신앙안에는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사건’이 부재합니다. 지금 우리는 손쉽게 ‘설교’를 접할 수도 있고, ‘큐티’나 말씀을 ‘묵상’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정보’가 아닌 진지하게 ‘공부’하는 분들은 드믑니다. ‘사경회’와 같이 이땅에 ‘부흥’의 물꼬를 텄던 ‘말씀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은지 이미 오래이고, 맹목적으로 듣기만 하는 설교나 기도회, 찬양집회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말씀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피상적인 교리를 ‘정보’로 외우는 수준에 그칠 뿐,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싶어하지 않고, 깨달은 ‘진리’를 거울 삼아 생각하고 반성하는 일도 귀찮아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고 말하던 ‘바울’사도의 외침을 흘려 들을 수가 없습니다. 

     

    3.

    본문의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 보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대력 ‘일곱째 달’에 지켜야 하는 절기가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일곱째 달의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에게 예배하는 초막절이다. 초막절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 레위기 23:34-35

     

    ‘초막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회중 모두가. 2절의 ‘일곱째 달 초하루’에 모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이때 학사 에스라가 가져온 ‘모세의 율법’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초막절에 대한 ‘신명기’ 31:10-13 본문이었을 겁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일곱 해가 끝날 때마다, 곧 빚을 면제해 주는 해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뵈려고 그분이 택하신 곳으로 나오면, 당신들은 이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읽어서, 그들의 귀에 들려주십시오. 당신들은 이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만이 아니라 성 안에서 당신들과 같이 사는 외국 사람도 불러모아서, 그들이 율법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하는 땅에 살게 될 때에, 이 율법을 알지 못하는 당신들의 자손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시오.’ | 신명기 31:11 - 13

     

    ‘초막절’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은 모두가 함께 모여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축과 예배여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고 ‘약속’된 그 말씀이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수문앞 광장에 모여있던 이들이 흘렸던 ‘눈물’은 ‘함께’ 감동하고 ‘함께’ 기뻐함으로 ‘응답’할 수 밖에는 없던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 본문을 읽으면서 감동하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대체 우리는 언제쯤 이렇게 ‘모두’가 ‘함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까?싶은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4.

    명백하게 겉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우리 안에도 이런 식의 ‘소외’와 ‘차별’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고, 저런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라는 식의 편협한 기준과 생각은 반대편에 있는 어떤 이들은 실패하고 저주받은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의사, 변호사, 사업가, 부자 같은 사람을 동경하고 그런 이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는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런 형편에 떨어지는 것을 혐오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예배는, 결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고, 저런 사람과는 결코 하나될 수 없는 그런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2독서인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 그분의 지체이며 하나된 ‘한몸 공동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본래가 그런 공동체입니다. ‘바다’안에서는 작은 강도, 큰 강도, 심지어 깨끗한 물도, 더러운 물도 모두가 하나의 ‘바다’가 되듯, 모든 ‘다름’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됨’을 경험하는 공동체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안에서는 마땅히 차별이나 소외는 있을 수도, 있어서는 않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향해서도 또한 그러해서는 않됩니다. 이건 단순히 ‘사람’을 어떤 식으로 처우하고 대하느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쁨안에서도 동일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오늘 ‘교회’는 세상이 염려할 만큼 심각하게 갈리지고 대립하고 분열되어 있습니다. ‘평화’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면서도, 자신만 아니라 세상을 가르는 일에도 ‘교회’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라면, 어쩌면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지 못한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무엇보다 ‘교회’와 ‘성도’에게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분별’은 어떤 이보다 ‘영적’이고 어떤 이보다 ‘거룩’해지는 ‘차별’적 능력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인지, 또한 반대로 어떻게 하는 것이 ‘차별’과 ‘소외’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 누가 ‘차별’과 ‘소외’를 부추김으로 ‘한 몸’되는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지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분별’하는 신앙인이 되는 겁니다. 대체 그 동안 한국교회가 저런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그래서 우리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겨왔던 ‘기준’이나 ‘가치’는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요? 말씀이 ‘죄인’을 정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죄인’도 용서하고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5.

    오늘 복음서 말씀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셨다가 돌아오신 이후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주님께서 경험하셨던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마귀’의 모든 시험을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쳤다는 겁니다. 적어도 ‘예수’께 ‘말씀’은 ‘마귀’의 유혹과 권세를 물리치고 삶을 살아내게 하는 구원의 ‘능력’으로 경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때부터 주님은 가시는 곳, 머무시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놀라운 사건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얻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질병에서 나음을 얻습니다. 죄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용납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예수님안에 함께하며, 머무는 곳이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기쁨과 감격과 놓임과 해방의 사건들을 가져다 준 겁니다.

    그런 주님께서, 당신께서 사셨던 고향 ‘나사렛’의 회당을 찾으셨고, 그곳에서 ‘회당장’으로부터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받아 특히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사실 ‘읽었다’기 보다는 모두를 향해 선포하셨다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누가복음 4:19

     

    21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오늘’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하는 말씀이란 ‘주님(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그랬는지 우연이었는지,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주님께서 읽지 않고 ‘누락’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보복의 날’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 이사야 61:2

     

    대체 그 ‘보복’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읽지 않으셨던 걸까요? 뭉클했던 탓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박해하던 고향 사람들 앞에서 차마 ‘보복’에 대한 말씀을 읽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더불어 ‘은혜의 해’가 선포된다는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읽지 않으셨던 ‘오늘’은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란 것이 아직 주님이 경험하지 않으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은 왜 ‘하나님 보복’의 날이 되는 걸까요? ‘보복’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나’를 중심으로 반대하거나 섭섭하게 한 ‘원수’들을 폭력적으로 쓸어 버리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을 박해하고 멸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그렇게 갚아주신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로 내모는 이들에 의해 순순히 살해당하심으로 오히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부활’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예수’께서 옳으셨다는 것을 입증해주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모든 거짓과 불법과 기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복’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예수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종말’은 바로 이런 일이 모든 인류와 역사안에 드러나게 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옳았다는 것,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져있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확인받는 감격스러운 날인 겁니다. 

    사실 주님은 ‘이사야’의 기록된 말씀을 다 읽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열기 위해 ‘십자가’로 향하시던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오늘’에 이루어가고 계셨던 겁니다. 성경은 첫번째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이 ‘진리’를 입증해주셨기에, 주님은 또한 우리 믿는 이들의 ‘진리’가 되시는 겁니다. 

     

    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 수 없이 많은 말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거짓과 기만과 선동과 부패한 말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도 세상에 쓰레기를 더하듯 알게 모르게 그런 말을 쏟아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들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음과 영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 말들이 편을 가르고, 거짓을 선으로 둔갑시키고, 악인들의 길을 세우는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 머물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 말씀을 해석하고 공부하고 깨닫는 일에 성실하게 임하십시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그리하시듯, ‘성령’에 의해 깨닫게 되는 사건으로 말씀을 경험할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부활’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의 말씀과 한 몸이 되셨던 예수님을 따라, 바로 ‘오늘’ 하나님 말씀에 잇대어 걸어가십시오. 힘겹더라도 결코 변하거나 사그러들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되는 신실하신 말씀을 마음의 중심,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가십시오. 믿음으로 ‘말씀’과 동행하는 매일의 그 걸음이 쌓여 갈 때, 물이 포도주가 되었던 것처럼 참된 주님의 말씀이 어느새 내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또한 삶을 바꾸어냄으로 참으로 우리의 인생을 포도주향 보다 짙은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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