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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현후 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 30. 14:0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1:4 ~ 10
응송 | 시 71:1-6
2독서 | 고전 13:1-13
3독서 | 눅 4:21-30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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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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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召命), 하나님을 향하는 '삶'
1.
우리는 모두 ‘믿음’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고, 더 겸손하고, 더 거룩하고, 더 정결하고, 더 착하고 잘해내는 ‘신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거나 최소한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거룩하고 신성한 일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복음’을 ‘복되고 좋은 소식’이라 말하고 믿고 있음에도, 여전히 무엇을 더해야 하고 혹은 아직도 무엇을 못했다는 종교적 부담과 죄책감만 가득 남아 있을 뿐, 퍽퍽한 삶이 가져다 주는 불만으로 하루 하루 지쳐만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삶을 견인하고 지탱하며 이끌어주는 것이 마땅할 텐데,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종교적 부담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분명합니다. ‘어떻게’하는 것이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우리의 ‘예배’가 각자의 ‘삶’을 겉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막연히 저기 천상 어디쯤에나 있을 법한 것에만 열광하는 ‘이분법’적인 신앙에 길들여 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에는 ‘아멘’이라고 큰 소리로 답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일상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인입니까?’라는 물음 앞에만 서면 잔뜩 주눅들어 우물쭈물 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삶’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없고, ‘살아가는 것’외에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2.
1독서 본문은 멸망을 앞둔 ‘유다’의 역사 한복판에서 하나님 말씀을 외쳐야 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소명’ 이야기입니다.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도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을 보면, 우리와는 달리 대단한 신앙인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물론 선지자들이 동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과 달리,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시대를 내다보는 뛰어난 통찰을 가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이 어떤 뛰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다른 ‘삶’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이야기라는 것 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말씀을 좀더 들여다 보겠습니다. 분명히 ‘예레미야’는 ‘소명’ 즉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건 환상이나 착각, 관념이나 정보가 아니라, ‘예레미야’ 본인이 자신의 인격안에서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라는 고백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 말씀을 실감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로 아는 것과, ‘참으로’ 그렇다고 실감하며 사는 것은 다른 겁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고난과 역경속에서 의외로 쉽게 낙담하곤 합니다. 용케 일어선다고 해도, 또다시 찾아오는 시련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느닷없이 내 인생 전체가 또한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되고, 그때로부터 알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실감하게 되는 것,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튼,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 예레미야 1:7b
그를 향했던 ‘부르심’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누구’에게와 ‘무슨 명령을 내리든지’라는 표현입니다. 무언가 대단하고 중요한 일에 부름을 받았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셨겠지만, 결국 그가 보냄을 받은 ‘누구’라도 만나고, ‘어떤 명령과 상황’에라도 처하게 되는 곳이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삶입니다. ‘예레미야’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고, 예레미야가 말씀을 외쳐야 할 곳도 억울함, 답답함, 느닷없는 일들로 목이 죄어오는 것만 같은 우리의 삶인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눈에는 이런 형편이나 상황,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만한 껀더기가 보이질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거창한 뜻이 담겨 있다고 추켜세운다고 해도, 정작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고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믿음이 이것 밖에는 않되나? ‘자격지심’이나 정죄감에 떨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대단한 선지자 ‘예레미야’ 조차도 하나님이 불러내신 ‘소명’을 선뜻 받아들이진 못했으니까요.
3.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신다거나, 해가 될 것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것을 빼앗아 가는 분은 더욱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맹렬하게 거부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도 여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생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언가 손해나 낭패를 당하게 되거나 그런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피해의식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너무 작아 보이던 그것이 실은 큰 것이었고, 무겁고 거추장스럽던 것이 가볍고 자유한 것이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던 것들이 귀한 것이고, 뱉어버리고 싶던 것들이 알고보니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 경험’은 늘 그런 식입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 예레미야 1:9b
그러니 우리 신앙인들이 믿음으로 삶을 해석하고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근거는 이 말씀 뿐입니다. 천지의 모든 것을 ‘없슴’에서 ‘있음’으로 존재하게 하신 분의 말씀, 그 놀라운 창조의 세계와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을 때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고, ‘신앙’인일 수 있습니다. 모든 거절했던 것들이 용납되고, 절망과 슬픔 조차도 살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의 한결같은 증언입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에 나를 받아 주신 분도 바로 주님이셨기에 내가 늘 주님을 찬양합니다.’ | 시편 71:6
오직 자신에게는 ‘주님 뿐’이어서 언제든 ‘주님께로 향하겠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도 바로 그런 증언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슬픔, 좌절, 억울함, 설명할 수 없는 고난과 납득할 수 없고 버려진 것처럼 내몰려있던 바로 ‘지금, 여기’ 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참된 ‘믿음’,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4.
‘서신서’를 건너뛰고 먼저 ‘복음서’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일에 읽었던 누가의 복음서 4장을 이어 읽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지만, 구약의 ‘이사야’를 통해 읽게 되는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보복의 해’를 전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은혜’를 전하러 오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보복’처럼 두려운 소식을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까?
오늘 회당에서 주님곁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보복’의 해를 외치기 위해,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해코지 할 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으로 본 것이라고 여긴 탓에 화가 났고, 결국 주님을 자신들의 마을에서 내쫓고 벼랑까지 몰아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 때문에 복된 하늘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그들은 주님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마주하는 경험이 이처럼 다릅니다. 하지만 복된 소식으로 경험된 주님이나 보복의 소식으로 경험된 주님은 여전히 동일한 분입니다. ‘은혜’와 ‘보복’의 소식이 그분안에 담겨있지만, ‘복’을 ‘복’으로 받을 것인지 아닌지, ‘생명’을 ‘생명’으로 받는지 아닌지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왜, 복과 생명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요?
분명히 주님은 ‘사실’만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과부나 아람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따지고 보면 누구나 은혜를 입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믿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깔보려 했던 것도, 그토록 ‘분노’했던 까닭도 주님께서 거짓말을 하셨거나 없는 말을 지어내셨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늘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라고 언급하셨던 이들이 ‘이방인’들이라는 대목이 그들을 본노하게 했던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자신들 보다 못나고 열등하다 여겼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이방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도 말도 않되는 오만한 착각이지만, 무엇보다 정작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자기 자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복지’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포퓰리즘’인 우리를 닮았습니다. 당신이 죽는 것은 ‘순교’이고, 내가 죽은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내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기도의 ‘응답’이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시련’이 됩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사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믑니다. 제 아무리 큰 소리쳐도 바로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고, 하물며 인생을 먼저 살아본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그러니,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 아직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런 흠이 되질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듣고 배우면 그만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듣기를 싫어합니다. 특히나 잘 모르고 있다거나, 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 쉽게 분노하곤 합니다. 도무지 자신에 대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높이려 들게 되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을 결코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떨어지는 것이 위태롭고 불행한 이유입니다.
5.
바울 사도가 쓴 2독서 고린도서를 읽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위대한 ‘사랑’에 대한 예찬을 이어갑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3:12b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다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옳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건강’이 없거나, 바라는 것들이 없어서 ‘삶’이 비루해 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이 불행해 지는 까닭은 사람 사이에 살아가면서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사랑’받지 못함 때문이니까요. 운명을 앞둔 이들이 대부분 더 많이 갖고, 더 잘 해내지 못함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 좋은 증거가 될 겁니다.
‘바울’은 ‘사랑’이라는 것이 ‘지금은 다 알 수 없으나, 그날이 오면 분명해 지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려는 ‘사랑’이 ‘남과 여’ 사이의 사랑이나 ‘휴머니즘’ 같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자신 즉 ‘진리 사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주님’이라든가 ‘하나님’은 이라고 읽으면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삶에 ‘주님’이 없고, ‘믿음’이 없고, ‘소망’이 없다면 대체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생명’이 없다면,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던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왔던 뻔하고 식상한 말이다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아직 ‘기독교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경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 야고보 4:14
설령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주님을 잃어버리는 ‘인생’이란, 잠깐 있다가 떠오르는 빛과 함께 사라질 안개와 다를 바가 없다는 야고보 사도의 말은, 고스란히 반대로, ‘주님’ 덕분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잇대어진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하늘’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무엇에 의해서도 ‘비교’당하지 않고, 그 무엇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으로 인해 비로서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받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사랑’받았으니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오늘도 살아가게 하시는 까닭, 우리를 각자의 인생으로 부르신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마침내 온 땅위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은 이들인지 드러나게 될 그날까지,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으며 걸어가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하는 삶, 하나님을 위한 길입니다. ‘죽음’보다 강하고, ‘세상’보다 큰 ‘사랑’이 ‘생명’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지켜주실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잃어버리시지 않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시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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