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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1/12 주현후 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 7. 22:5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43:1-7

      응송 | 시편 29

    2독서 | 사도행전 8:14-17

    3독서 | 누가복음 3:15-17,21-22

     

    # 설교음원

    http://naver.me/FK5zcMkK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NysCnmmD-g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스도의 세례>,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빛'안에서, 또한 '빛'으로

     

    1.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고 벌써 한주가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찔하기만 한 요즘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어렵게 된 것은, 따지고보면 다름 아닌 신앙인으로서 우리들 자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악마화’하고, 결국은 제 뜻대로 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과 불법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었음이 드러났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악의적 선동으로 유튜브 수익을 올리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제 배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며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과, 목적을 위해서는 진실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 상당수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뉴스’를 접하게 될 때마다, 저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과연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건강한가?’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막말을 쏟아내던 ‘전광훈’같은 이가, 그렇게 앞장서 대중들을 선동하고 있음에도 그를 꾸짖는 ‘한국교회’의 목소리가 들리질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방송이나 ‘뉴스’에서는 그를 ‘목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를 ‘목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평화’하게 하는 이들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그런 선동에 부화뇌동하며 세상을 혼란케 하는 이들을 우리는 과연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예배는 안녕한 걸까요?

     

    2.

    이런 유사한 논쟁이 이미 ‘교회사’안에도 있었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 직전까지, 로마는 제국의 안정을 위한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특히 주후 4세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 박해의 정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통치말에 제국의 위세가 쇠락하게 되자 그는 ‘로마’의 옛 신들에 대한 숭배정책을 통해서 제국의 부흥을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그 바람에 결국 대박해가 교회를 덮치게 되었고, 수 많은 성직자들이 추방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이 순교의 길을 택하며 신앙의 길을 지켜냈지만, 성직자 중에는 성경을 내어주며 배교의 길로 들어선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슬퍼랬던 그의 박해는 2년뒤 갑작스레 그가 권력에서 물러나게 됨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교회안에는 극심한 혼란과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다름 아닌, ’배교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때문입니다. 312년에 ‘카르타고’의 감독을 새로 선출하게 되었는데, 안수 위원 세명중 한 명이었던 ‘펠릭스’가 배교자였습니다. ‘감독’은 선출되었지만, 신앙의 ‘배교’를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람들은 결국 따로 모여서 ‘마요리누스’라고 하는 새로운 감독을 선출하게 되었고, 그의 사후에 그의 후계자인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됩니다. 강경한 ‘원칙주의자’들이었던 이런 사람들을 ‘도나투스’ 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앞선 박해의 시기에 ‘배교자’들에 의해서 집례되었던 성례, 성찬, 안수와 같은 모든 성사들의 ‘효력’을 부정했습니다. 

    순전한 신앙을 지켜내겠다던 ‘도나투스’ 주의자들의 주장은 일견 감정적으로 타당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곧장 ‘성례전’의 효력이라는 것이 과연 집례하는 ‘사람’에 의해서냐?는 반발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성례전’의 ‘거룩성’과 ‘효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3.

    3독서인 복음서 이야기는, ‘세례’에 대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본문은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라고(15절) 하는 ‘백성들’의 물음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심지어 평행본문인 ‘누가’의 복음서에서 주님은 ‘사람이 낳은 자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다’(28절)고 할 만큼 ‘요한’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던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이상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두 태워내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 주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종말을 가지고 오실 ‘심판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주님’께서 ‘죄인’인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주님’께 베풀었던 ‘세례’는 과연 효력이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니까 뭔가 특별하다거나, 그분의 ‘세례’에만 권위라든가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복음서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집례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은연중에 ‘예식’의 엄중함이라든가, 권위 있는 사제나 거룩해 보이는 ‘교회’에서 받아야만 ‘세례’답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왜곡된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늘상 ‘종교성’을 벗어나질 못하는 까닭도 이런 ‘율법주의’적 성향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초기 교회안에서도 이런 식의 오해와 편견으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그 곳도, 주님께 ‘세례’를 집례한 사람도, 심지어 주님이 침례를 받았던 물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달려나왔던 백성들에게 베풀어진 ‘세례’와 다를 바 없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이후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서 ‘삼위일체’되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모든 ‘세례’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좋아하시는 자녀로 용납되어지는 감격스러운 사건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4.

    2독서로 주어진 ‘사도행전’ 말씀은 이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참으로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곧장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했던 사도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기도했다는 내용이나, 16절의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는 언급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인데(마28:19), 대체 ‘성령’없이 베풀어지는 ‘세례’라는 것이 가능한 걸까요? 자칫 이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고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세례가 거짓 사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을 것은 틀림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말씀은, 이들이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세례’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음을 추측하게 해줍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신자’가 되면 천국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세례’를 받기는 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그 본질적 의미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사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자 곧장 그들은 ‘성령’을 받았게 되었다는 것(17절)이 그 증거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특별한 이들을 통해 ‘기도’나 ‘안수’를 받아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거나, ‘세례’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주어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 ‘사람’의 뜻이나 방법으로는 불가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모두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에는 ‘차별함’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기로’ 결단한 이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세례’와 ‘성례’로부터 차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5.

    ‘세례’와 관련된 이야기 한토막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누군가의 고백입니다. 그는 일본의 한 복음주의 교회에 등록하면서 자신을 세례받은 교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떤 권한을 가진 성직자가 세례를 주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답변은 짧고 명쾌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름날 오후, 그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게 되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안에서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거룩한 세례를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너무나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거주지에서 42km 이내에는 ‘세례’를 줄 수 있는 허가 받은 목회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 지역에 참으로 신선한 여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는 하늘이 직접 나 자신을 그 거룩한 의식으로 초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빗속으로 곧장 달려 나가 그곳에서 경건한 자세로 나 자신의 온몸을 ‘하늘의 물’로 흠뻑 적셨다. 이러한 세례 의식은 나의 양심을 만족시켰고, 그 때 이후로 우상을 숭배하는 동포들에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고백했다. 성례를 집도하는 인도자와 금으로 된 성배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이 일에 대한 나의 기호도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자유가 있기를!’

     

    이 이야기는, 메이지 유신 100주년을 맞아 일본 정부가 선정한 일본 근대화의 발전에 기여한 20명 중 하나이자 일본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또한 김교신, 함석헌 등에게 영향을 미쳐 한국적 기독교 사상을 일으키는데 공헌했던, ‘우찌무라 간조’의 ‘회심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저는 ‘간조’ 선생의 회심기를 처음 접했던 날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는 어떠했는지요?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던 그날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은 또 어떠신지요?

     

    6.

    1독서 본문인 ‘이사야’서 듣게 되는 짧은 한 문장안에서, ‘간조’선생의 ‘회심기’에서 엿보았던 ‘세례’의 감격을 다시금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 이사야 43:1b - 2

     

    ‘하나님’ 없이 살던 자신의 ‘죄’로 인해 망해버린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것이다’ 여기에서 ‘너’는 ‘우리 자신’을, ’내것’은 ‘하나님 것’을 뜻합니다. ‘너’ 대신에 자기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잠시만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큰 ‘위로’와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갑작스레 삶의 형편이 바뀐다거나, 팔자가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홀로’ 힘겨워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홀로’ 낙담하지 않아도 되며, 더 이상 ‘홀로’ 부끄러움 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선명하고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입니다. 이 한 말씀으로 우리는 비로서 우리 자신이 ‘사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용납되었다는 깊은 ‘안도감’과 ‘평화’입니다. 함께 하는 벗이 있다면 깊은 밤길도 두렵지 않고, 앞일을 도모할 수 없는 유배지로 떠나는 길이라고 해도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니 이보다 큰 기쁨이 있을까요?

     

    7.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우리는 ‘세례’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무한한 ‘용납’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 공로 없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우주적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고, 하나님께서 기꺼이 당신의 아들의 운명으로 우리 자신을 받아주시는 사건이 바로 ‘세례’와 ‘성례전’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에 감격하고 감동하는 것이 삶의 근거가 되고 바탕이 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이 아니시라면, 그 누구라도 그리고 어떤 ‘성례전’이라고 하더라도, 하늘의 경험,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성례전’의 주인은 삼위가 일체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현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공현절(公現節 "공식적으로 나타난 날") 또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고 하는 이 절기는 말 그대로 공식적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출현과 그의 신성이 드러남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서방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본문으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던 복음서 본문을 읽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던 본문을 독서합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예수’의 신성이란 것이 결국 ‘예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치 ‘빛’이 ‘어둠’에 잠겨 있는 것들을 향할 때만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그분의 신성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고스란히 담고 오셔서, 비로서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용납하셨고 인쳐주셨음을 깨닫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설교의 첫머리에 던졌던 물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자신이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그리고 목사로, ‘성도’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참된 ‘빛’되시는 그분으로 스스로를 비추고 있을 때만 우리는 빛일 수 있고, 그분안에 있을 때만 우리는 비로서 어둠을 몰아내는 ‘빛’일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정체성은 ‘빛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빛안에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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