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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2/09 주현후 5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2. 5. 15:4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6:1~8, (9~13)

      응송 | 시편 138

    2독서 | 고린도전서 15:1~11

    3독서 | 누가복음 5:1~11

     

    # 설교음원

    http://naver.me/xIeTph2w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qfAgeiZj6Xs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버려야 따를 수 있는 '길'

     

    1.

    지난 주일에 구약 1독서 본문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명’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와 더불어 구약의 쟁쟁한 예언자 중의 한명이었던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를 함께 읽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사야’는 누구보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찼던 사람입니다. ‘예언자’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웃시야’왕이 죽던 그해,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올랐다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은 이 장면을 마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무척 사실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성경 곳곳에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던 장면도 그렇고, ‘모세’를 찾아가시는 대목이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목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존재한다는 이 말은, 곧장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처럼 ‘육’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서기자들의 기록은 거짓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그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것을 설명하려면, 결국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비유’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라는 말을 듣고 ‘거짓말’이라고 따져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 만큼 오래된 이야기’를 뜻하는 표현임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하나님’과 독대라도 한 것처럼 묘사된 말씀들은 고대 시대 성서기자들의 독특한 표현 방식일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경험하고 싶다는 식으로 막연하게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라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한다는 것은 ‘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 겁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영’인 존재가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어 주거나, 아니면 반대로 육체안에 갇혀 있는 우리편에서 ‘육체’를 벗어나거나 둘중의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을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이신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 이사야 6:5

     

    이전까지 무심하게 오고 가던 ‘성전’인데, 지금껏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렇게 밖에는 고백할 수 없었던 겁니다.

     

    3.

    여튼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예언자 ‘이사야’가 그날 어떤 식의 경험을 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을 자신의 운명과 역사안에, 살아계시며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깨닫게 된 ‘이사야’의 경험 만큼은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반응과 응답을 주목하고 쫓아갈 때, 그때 비로서 우리는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엿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경험을 한 당사자의 운명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과 같으니까요. 2독서인 서신서 말씀에서 그런 경험을 했던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그가 이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겁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써보낸 편지안에서 자신을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고(9), 심지어는  마치 ‘달이 차지 못해 난 자’와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모자란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지금 ‘자존감’이 없어서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오늘의 기독교 교리의 토대를 세웠을 만큼 ‘바울’은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빌립보서 3:4 - 6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 ‘바울’에게는 그런 모든 것은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다가 낫고 보니 ‘건강’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이제 그에게 ‘그리스도’외에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4.

    오늘 복음서 말씀은, 지난주 읽었던 4장 말씀에서 이어집니다. 고향 사람들의 박해와 위협을 피해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여러 회당을 돌며 전도하시던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닿으셨습니다. 회당이나 성전에서 앉아 마치 제 자신이 거룩한 존재라도 된 것인양 으스대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그곳에서도 주님이 하신 일은 오직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으로, 말씀이 필요한 그들의 삶으로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만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 일행은 이미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밤이 새도록 허탕만치고 돌아온 뒤였습니다. 상심하고 지친 모습으로 빈 그물을 씻고 있던 그들의 딱한 모습이 말씀을 전하시던 주님 눈에 들어왔었는가 봅니다. 그물을 씻으면서도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베드로’에게, 뜬금없는 말을 건내셨습니다.

     

    Raffaello Sanzio, The Miraculous Draft of Fishes, 1515-1516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 누가복음 5:4b 

     

    밤이 새도록 수고했음에도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닙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밤이 새도록 물에 젖은 손이 부루트도록 애를 썼짓만 헛수고가 되었을 뿐입니다. 따지고보면 인생이 늘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땀흘리고,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늘 인정을 받고 보상을 얻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추궁하듯 ‘왜 빈그물만 씻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얼핏 걱정해 주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이렇게 살게 된 것은 다 네탓’이라는 비난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내일’도 ‘빈 그물’만 기워내야하는 똑같은 서러운 인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지레 포기하고 낙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 누가복음 5:5b

     

    주님을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들은 한 말씀이 놀라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의 강요나 부정적인 스스로의 생각에 속절없이 휘둘려왔던 그들이 힘을 다해 ‘그러나’라고 응답한 겁니다. 그 후에 뒤에 친구들의 배를 가득채우고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는 일이 일어납니다. 

     

    5.

    그런데 이상합니다. 말씀에 응답해서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면, 자연스러운 반응은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라고 칭찬하거나, 하다못해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라도 해야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시선이 ‘고기’가 아닌 ‘주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 누가복음 5:8b

     

    우리는 이 고백을 눈여겨 보아야만 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이후에 그가 평생토록 주님을 뒤따르는 ‘신앙’의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던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늘상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언제나 자신만을 위하고, 자기에게만 집중합니다. 삶이 무겁고 비루한 까닭도 따지고보면 남의 일이 아닌 제 자신의 일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오르고 보면 땅밑의 일들이 하잘 것 없이 보이게 되는 것처럼, 천지보다 크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에게는 그토록 몰두하고 매달리던 자신이 속절없이 작게 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서 얽매이던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자신은 ‘죽었다’고 고백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경험인 겁니다. 그러니 ‘회개’란 내가 결심하고 각오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하나님’ 경험이 초래하는 결과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베드로’의 삶은 대체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그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아야만 하고, 더 큰 배를 사야하고, 더 많은 그물과, 더 많은 인부를 고용하고, 그렇게 사업체를 늘려야만 하는 방식에 매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못잡으면 괴롭고, 그물만 기우며 살아야 하는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참 빛’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삶’을 바라보는 그의 ‘지향’은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 누가복음 5:11

     

    주님을 경험하게 되니, 막상 다시금 그물을 내리면서도 ‘또다시 비어 있으면 어쩌지’ 한숨부터 지으며 어찌해서든 얻고 채우려고만 했던 그가 마침내 버려둘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경험한 이들이 고백하는 ‘회개’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도 자칫 그물과 배를 송두리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앞에 엎드린 ‘베드로’를 향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죄 짓지 마라’가 아니라, ‘두려워하지 마라’(10)였던 겁니다.

     

    6.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입니까? 직업이나 맡고 있는 일, 그리고 인생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며 달려가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안에서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 살아계시는 분으로 경험하고, 이제는 이제는 그분을 뒤따르며 ‘제자’로 살아간다는 말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통해 보게 된 것처럼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란 뭔가를 더하고 쌓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고 빼는 삶입니다. 그러려면 ‘소유’를 강요하는 세상을 가로질러 ‘버림’에 익숙해져 있어야 할텐데, 과연 지금 우리가 ‘버림’에 자유로울까요? 이것 아니면 않되고, 저것을 해내야만 한다는 조급함으로부터,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싶을만큼 가벼워져 있는지 그리고 혹시나 ‘신앙’ 조차도 성공하고, 출세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더 많이’를 통해서 채워가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업가나, 유명인이 되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일에 불러주셨습니다. 그 ‘사람’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을 길어 올리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삶에 지친 ‘베드로’ 일행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깊은 데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물론 여전히 ‘정말 괜찮을까?’ 두려움과 염려가 발목을 붙들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래도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곳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처럼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것들이 아닌, 삶과 영혼을 길어내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걷는 모든 걸음입니다. 그곳에서만 우리는 ‘그물’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벌써부터 ‘밤이 새도록’ 그리고 ‘열심히’ 그물을 던질 것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노력’과 ‘수고’가 아닌, 던지라 하신 분이 계시니 그분을 믿는 ‘믿음’의 방식으로 성실하게 그물을 칠 수만 있다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너는 네 몫의 인생을 ‘살라’ 우리 각자를 보내신 주님을 믿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물을 던지는 것 보다, 그물을 던지라 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 우선입니다.

    주님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세상 가운데서(이사야 6:9-10), 당신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남겨진 ‘거룩한 씨’로 불러내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해 내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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