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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4/06 사순절 제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4. 3. 17:1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43:16-21

      응송 | 시편 126

    2독서 | 빌립보서 3:4b-14

    3독서 | 요한복음 12:1-8

     

    # 설교음원

    https://naver.me/GlJfRWLa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RCexZuM7OB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1850)

    울며 씨 뿌리는 길, 가시겠습니까?

     

    1.

    오늘 1독서 구약본문인 이사야 43장은 영적인 통찰을 가지고 있던 선지자가 기원전 587년 바베론의 포로로 끌려와야만 했던 포로민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대언하는 말씀입니다. 비록 말씀의 표현은 희망이 담겨있고 늠름하지만, 선지자는 지금 이미 희망을 포기했거나 오랜 포로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이들을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출애굽이라고 하는 구약의 사건을 언급합니다. 강한 팔로 우리를 구원해내셨던 하나님을 기억해내라는 겁니다. 거기다가 한술 더떠 조상들이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마주하게 될거고 합니다. 이런 말씀이 잘 들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미 포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과거를 기억해냈고 예언의 말씀대로 자유민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겠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며 돌아올 날을 꿈꾸며...’ 라는 시편 126편의 노래는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정말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던 한강 작가의 말은 옳은 것 같습니다. 

     

    2.

    문제는 우리 편입니다. 이런 놀라운 말씀과 말씀을 경험해낸 일들의 고백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고스란히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고백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들이 처했던 삶의 형편이나 상황과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고 해도, 막상 그런 현실, 믿음으로 응답해야하는 상황에 떨어지고 나면 우리의 믿음은 혼란스러워질 뿐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경험했던 것인지 제대로 이해조차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똑같이 믿어보겠노라고 결심을 해보아도 되지 않으니 그런 일은 말 뿐인 거라고 무시하거나, 나는 않된다고 포기해야할까요?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신앙에서 돌이킨다고 해서 뾰족한 다른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걸어갔던 많은 증인들을 통해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줌의 빛처럼 예수께서 열어 놓으신 길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렇게 이미 예수가 진리이시며 길이고 구원이라는 기독교 공동체의 고백에 참여한 걸음이니,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간 이들의 고백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논쟁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신앙’을 대하는 우리의 오해에 기인한다는 사실 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 되고 형통하리로다’ | 시편 128:1 - 2

     

    아마 지금의 우리에게 시편 기자의 이런 말은 도무지 감동이 되질 않을 겁니다. 온통 수고하는 대로 거둘 것이라는 환상으로 눈을 가려왔던 세상의 강요탓이기도 하지만, 실은 벼락부자라도 되고 싶은 한탕주의의 탐욕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신앙을 대단히 쉽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쉽게’라고 말씀드린 것은 ‘신앙생활을 게으르게 한다’는식의 말이 아닙니다. 신앙의 지향과 내용에 대해 좀처럼 진중한 앎을 가지려 들지 않고 오히려 무관심하다는 뜻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신앙이란 것이 동전만 넣으면 원하는 것을 내어놓는 밴딩머신처럼, 교회만 출석하고, 예배만 나오면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신앙은 절대적으로 거짓된 빛을 끄고, 어지럽히는 소리를 끄는 수고를 해야만 하는 길입니다.

     

    3.

    다시 한번 시편기자의 고백을 읽어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 시편 126:5-6

     

    시편기자의 이 노랫말 안에서 우리가 미쳐 듣지 못한 채 흘려버리고, 아니 어쩌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대목은, ‘울며’라는 대목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씨’를 뿌리는 일이란, 애당초 ‘울면서’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8:16 - 18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대해 말하던 ‘바울’사도의 편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 보십시오. ‘영광’을 거두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은 고난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자녀라는 것이 다름 아닌 ‘성령’이 친히 증언하시는 내용인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의 삶이란 것이 ‘울음’을 우는 시간, 더 정확히는 울며 씨를 뿌리는 때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않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그안에서 울고 있는 이들 때문에, 또한 그들을 울게 만드는 이들 때문에 울고 계신데, 우리만 홀로 느긋한 웃음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 얄팍한 신앙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당신 아들에게 가져다 주셨던 참된 ‘영광’이란, 울며 씨를 뿌린 다음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해 본적없는 전혀 새로운 영광이라면, 이전의 아픔, 절망, 상처, 그리고 모든 눈물이 지나가야만 경험될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여전히 ‘울음’을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견디어 낼 힘조차 없는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4.

    일단 ‘바울’사도의 증언을 읽어봅시다. 그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 3장 5절부터 6절까지 예수 이전의 자신이 붙들던 것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빌립보서 3:5-6


    오늘로 바꿔 말한다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성공적인 삶의 조건들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교회, 많은 성도를 얻는 것을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것 대신에 다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근거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 빌립보서 3:8c - 9

     

    ‘바울’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뿐입니다. 그것만이 그에게 성공한 인생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말들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어렵고 불편합니다. 까닭이 있습니다. 마치 고기잡이 배와 그물, 아버지를 버려두고 나를 따라라던 말씀처럼,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한 일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던 말씀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또한 그랬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 우리보다 훨씬 더 그 긴장감이 컸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의 세계는 ‘예수’로 가득차게 되었을까요? 이제 복음서 말씀입니다. 

     

    5.

    오늘 말씀의 배경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다니’라는 지명은 히브리어로 ‘베다니’ 또는 ‘벧아나니야’에서 왔다고 합니다. ‘집’이라는 뜻의 ‘벧’ 과 ‘가난, 슬픔, 비참’이라는 뜻의 ‘아니’로 또는 ‘벧’과 ‘아나니야’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느헤미야 11:32에서 ‘아나니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정착하게 된 베냐민 지파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고난을 당해 슬픔과 비참함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집, 또는 그런 아나니야 후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날도 그곳 마을, 정확히는 ‘나사로’의 집에서는 죽었던 그가 살아돌아오게 되었던 그날처럼, 또 다시 기쁨의 잔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셨으니까요. 우리 마음에도, 삶 가운데도, 이 땅에도 그런 기쁨이 가득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잔치가 한창 고조에 달했을 때 참으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곳에 모여 흥겨움에 취해있던 사람들 모두가 사색이 될 만큼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예수와 함께 음식 먹는 이들 사이에 끼어있던 ‘마리아’가 나드 한 근을 가져다 느닷없이 예수의 발에 남김 없이 부어버렸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정성껏 닦아 드린 겁니다.

     

    그들은 예수를 찾다가, 성전 뜰에 서서 서로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명절을 지키러 오지 않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알거든 알려 달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 | 요한복음 11:56- 57

     

    이미 예수를 잡고자 하는 사특한 무리들의 위협이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예수를 두둔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도 고초를 당할 수 있는 판에 그도 모자라,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위험천만한 행동을 저지른 겁니다. 

    당시는 남성들을 유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여인들은 머리카락을 포함한 신체 노출이 금지당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닦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을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녀가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마리아’의 행동은 로마가 지배하는 이 시기에, 지금 이곳에서 ‘메시아’를 추앙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흥겨웠던 잔치 자리가 로마군인들이 쳐들어와 모두를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할 수 있는 끔직한 죽음의 자리로 바뀔 수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장면입니다.

     

    6.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 요한복음 12:7b

     

    마리아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는 것은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기다리는 ‘죽으러 가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마지막을 위해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드리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이미 주님은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지 각색이라는 것이, 그런 상황에서도 정작 제자인 유다는 뜻박의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 요한복음 12:5

     

    요한은 그가 돈자루에 들어오는 것은 제 것으로 여긴 탓이라고 그의 속내를 고발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도 제 각각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돈 생각만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고, 생명에 관해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생명을 주시는 주님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물론 ‘유다’의 숨은 의도야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뱀의 혀처럼 능숙한 그의 논리는 딱히 부정하지 못할 만큼 정당하게 들립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 요한복음 12:8

     

    다른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기억될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이건 이 여인의 영웅적인 면모를 숭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들은 모두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를 꿰뚫어보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사람이란 일이라도 이득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자유를 얻고, 생명을 얻는 길이라면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알고도 여러분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7.
    묵은 날을 지나지 않고는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없듯, 지나치지 않고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붙들던 것들을 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말 겁니다. 허울좋은 풍요나 거짓된 권력과 명예같은 사특한 탐욕의 속삭임을 뿌리치고 지나치십시오. 그것들을 놓치는 것이 아깝고 오늘을 서럽게 만들 만큼 눈물이 난다고 해도, 울며 씨를 뿌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마주하고, 하늘을 경험하고, 영광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고, 오랫동안 참아내야 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봐야만 하는 일입니다. 세미한 숨소리를 듣게 되는 것처럼 ‘성령’의 기운이 우리를 둘러싸고 계심이 느껴지고,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 안에 있다는 하늘의 위로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리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뿌릴 씨가 있다는 것에 기뻐하시고, 그렇게 썩어 없어질 육신에 생명의 씨 뿌리는 이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고, 반드시 결실하게 하시는 이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에 또한 감사하며 사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갈라디아서 6:9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주님께서 이 작은 수고의 씨앗들 위에 뿌려진 우리의 눈물을 거름삼아, 풍성한 거둠으로 갚아주실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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