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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 4/ 20 그리스도 '부활' 대축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4. 18. 11:2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65:17-25

      응송 | 시편 118:1-2, 14-24

    2독서 | 사도행전 10:34-43

    3독서 | 요한복음 20:1-18

     

    # 설교음원

    https://naver.me/xyTrxQsS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fUs7koSU0is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위젠 뷔르낭(1850~1921), <두 제자>, 유화, 1989, 오르세 미술관, 파리

    '부활' (‘죽음’을 거스르는 ‘항거’)

     

    1.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주일아침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이 기쁨에 동참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프고 치열했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부활’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11년 전 ‘부활절’은 몇주 후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기 위한 근거이면서 동시에 안수를 받을 수 없겠다고 포기하려는 ‘절망’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생떼 같은 자녀들이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을 손놓고 바라 보아야만 했던 어미들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다시 사셨다’는 이야기를 전할 만큼의 뻔뻔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죽음’과 ‘슬픔’의 흔적만 가득 남아 있는데 대체, 예수의 ‘부활’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집요한 물음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벌써 세월이 이 만큼 흘러 그때로부터 열 한번 째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저는 오늘 다시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들고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제 자식 잃은 어미들의 슬픔이 다 지워졌기 때문도 아니고, 이 만큼 위로했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무심한 명분 때문도 아닙니다. 여전히 자식잃은 부모들의 가슴이 미어지고, 그런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여전히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되풀이 되는 세상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저마다의 삶을 위협받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침에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상이라도 우리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벅찬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2.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국과 중국, 강대국들의 힘싸움에 내몰려 앞으로 어떻게 생계가 위협받게 될른지도 모릅니다.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의 터무니 없는 실수로 버튼 하나만 잘 못 눌러도 전 인류가 공멸할 위험천만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우성치고 있는 지구 환경은 당장 내일이라도 지진과 쓰나미, 인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를 만큼 위기에 내몰렸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른지 수단도 의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건 우리가 무언가 잘못해서 일어나게 될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해에 ‘우주 비듬’이라 일컬어 지는 ‘운석’이 5200톤이나 지구로 쏟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용케도 지구를 초토화 시킬 만큼의 거대한 운석들은 다른 별들이 막아주어 비켜갔지만, 만약 그것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지구로 돌진해오게 된다면 말 그대로 끝장이 나고 말겁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꺼져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고, 다시금 내일을 맞이하게 될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생명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기에서 벗어날 뾰족한 대책은 우리에게 없는 것만 같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쟁에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내몰리자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려고 애를쓰고, 가난에 내몰리지 않으려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채우고 쌓아 두려고 합니다. 질병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좋은 것을 먹고 돈을 들여 운동도 합니다. 성공한 ‘셀럽’이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몸부림도 계속됩니다. 여전히 ‘저 사람보다 더’라고 하는 경쟁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생존을 위해 타자를 파괴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저 사람만 못하다’는 비교에 내몰려 자괴감이나 열등감에 떨어지는 불행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전쟁에 내몰려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치명적인 질병 때문에, 사회와 체제안에서 소외됨으로 인해, 패망하고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세상은 불행하고, 내일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탐욕은 ‘공멸’의 위험에 둔감하고, 오히려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죽음의 위험성으로 몰아넣는 일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길위에서 인류는 늘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걸어가 본적도 없어서인지, 도무지 멈추려고 하질 않습니다. 

     

    3.

    지금껏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사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말해왔지만, 정작 누구도 그런 세상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 참으로 이상한 세상입니다. 이전보다 더 화려한 무엇, 이전보다 더 놀라운 무엇, 이전보다 더 편한 무엇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보다 행복한 사람, 행복한 인생도 그 만큼 많아져야만 할 텐데, 어째서인지 우는 이들의 눈물이 마를 틈이 없습니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배고프고, 여전히 어떤 이들은 고통을 강요받고, 또 어떤 이들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삶 조차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사람들이 말해왔던 ’이상 세계’라는 뜻의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이 애당초 ‘그런 세상(topos)은 없다’는 뜻이었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통찰이 아니었을까 싶을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개선하고 조금 더 고쳐서 모두가 행복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들이, 애당초 문제의 핵심을 전혀 들여다보지 못한 우매한 선동이었을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모두 그런 거짓된 망상에 사로잡혀 헛된 수고에 내몰린채 살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신들의 노여움을 받고 거대한 돌덩이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고 다시금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금 산 위로 오르는 헛된 노동을 반복하던 신화 속의 애처로운 ‘시지프스’처럼 말입니다.

    ‘시지프스’의 삶을 비루함과 고통으로 밀어넣는 것은 무거운 돌을 밀어 올려야 한다는 ‘수고함’ 자체가 아니라, 아무리 애를 쓰고 산위에 올려두어도 결국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헛됨’ 때문일 겁니다. 직장인들이 월요일부터 주일에 이르기까지 가장 힘든 날을 꼽으라면, 정작 돌을 굴려야 하는 ‘월요일’이 아니라 또다시 돌을 굴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주일’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건이나 환경,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그렇게 끊임없이 수고함으로 존재하는 이들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입니다. 그러니 어제도 수고했고, 오늘도 그렇게 수고하고 있으며, 내일도 다시금 수고로움에 내몰리게 될 겁니다. 

    하지만 거룩한 영의 감동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내시는 세상을 엿보았던 ‘선지자’는 이런 우리의 운명을 거스르는 소식을 전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게 땀흘리며 씨를 뿌려도, 정의롭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사회를 탓하고, 모든 수고를 허사가 되게 만드는 뜻하지 않은 낯설고 당혹스러운 ‘내일’을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이 땅위에, ‘하나님께서 그런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고 오실 것’이랍니다. 

     

    4.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을 것이다’ | 이사야 65:22 - 23

     

    밑빠진 독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빠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채우고 또 채우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지 않겠느냐는 헛된 바램과 수고로 내몰리는 안쓰러운 영혼들에게, 씨를 뿌리면 뿌리는 대로, 수고하면 수고하는 대로 거둘 수 있는 세상을 가져다 주실 것이라니 이보다 좋은 ‘복음’이 또 있을까요? 이제 비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누구라도!’, ‘누구의 인생이라도!’ 지나온 시간과 걸음이 무시되거나 헛되이 파괴되지 않고, 누구라도 제 몫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가지고 오실 것이라는 말씀에 잔뜩 기대하며 금이나 은 같은 보화가 가득한 모습을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척 허탈하실 겁니다. 하지만 별 수 없습니다. 그건 그 나라가 허무해서가 아니라, 아직 삶을 충일하게 채워주는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생명의 기쁨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이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따지고보면 제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루고 살아간다고 해도 밥 세끼 먹고 사는 것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에 더 본질적인 것은 ‘억만 금’이 아닌 ‘일용할 끼니’인 겁니다. 비록 ‘산해진미’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해도, 하루 세끼 먹고 사는데 지장만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비교에 내몰리지 않고 제 몫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를 누리기에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풍요와 과잉에 내몰려 살아온 탓에 그저 크고 작음, 화려함과 초라함 같은 외형에 쉽게 시선을 빼앗기고 맙니다. 배고픈 이들은 절절하게 경험하는 한 그릇의 밥에 담겨 있는 가치와 맛을 실감조차 못한 채 그저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하고, ‘내일’이 위협받는 사람들이 감격하는 ‘오늘’의 경이로움과 기쁨도 전혀 실감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내면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눈이 어두워져버린 탓에, 도무지 ‘감사’와 ‘기쁨’이라는 말은 낯설고 생소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아침임에도, 마치 남의 이야기 대하듯 좀처럼 우리 가슴이 냉담한 것은 같은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5.

    부활의 아침을 전하는 요한의 복음서 말씀안에서 제 시선은 이상하리 만큼 온통 여인들로부터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그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해 들은 두 제자의 모습으로 향하고 맙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요한복음 20:2b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다니요. 참담한 일입니다. 혹시 못된 유대인들이나 주님을 박해하던 패거리들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자리를 박차고 무덤으로 향하던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있습니다. 1896년 ‘외젠 뷔르낭'이라는 화가가 그린 ‘두 제자’라는 작품입니다. 걱정과 시름을 안고 무덤을 향하던 제들의 걸음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표정에 알 수 없는 불안과 다급함, 당혹스러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하지만 화가는 제자들이 걸음을 재촉한 까닭이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화가는 마치 앞부분이 잘려져 나간 것처럼 인물을 과도하게 크게 그리고 오히려 왼편으로 치우치게 배치함으로 그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들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게 구도를 배치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림 자체가 무척 답답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잘려져나간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의 정체를,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깊게 그들의 눈을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맞잡은 두 손, 벅차오르기 시작한 가슴을 만지고 있는 손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불안과 염려, 두려움이 아닌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한 벅찬 호흡, 놀라움으로 상기된 얼굴, 기도하듯 맞잡고 있는 두 손까지, 비록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그들이 ‘죽은 자가 살아난’ 사건을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요?

     

    6.

    우리 중에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담아낸 것이 어떤 몸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에게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부활’이 대체 무엇이길래?라는 아득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입니다. 빈 무덤을 향해 달리던 제자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배신하여 도망쳤고, 두려움에 내몰려 예루살렘을 탈출하는 것에 실패한 뒤로부터 지금껏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잔뜩 얼어붙어 있던 그들이 지금은 떠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으며 내달리고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근심에 어두워졌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들이 죽음이 짓누르던 공포를 극복하고, ‘생명’을 외치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광장으로 뛰쳐나가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예수와 한 패였다는 사람들의 고발에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님을 잡아 죽였던 산헤드린 앞에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행전 4:20) 그들은 당당하기만 합니다. 이 모든 걸음을 이끌었던 것이 바로 예수 ‘부활’의 경험입니다.

    우리는 첫번째 부활의 아침을 맞았던 이들에게서 ‘부활’이란 결국 ‘어둠’, ‘폭력’, ‘권위’ 그리고 ‘죽음’과 같은 모든 힘을 거스르는 ‘저항’과 기꺼이 그렇게 ‘저항’할 수 있도록 이끄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죽음’조차 윽박지르고 덮을 수 없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불의한 세상을 거스르며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대체, ‘부활’안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예수 뿐만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이들 까지도 죽음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될 수 있던 걸까요? 예수의 부활은 ‘생명’은 ‘죽음’에 의해 깨어지는 것이라는 죽음의 윽박지름에 내몰린 살아있으나 두렵고, 서러운 모든 이들에게, ‘예수’ 이후로부터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에 의해 홀로 버려지는 ‘죽음’이란 없으며 ‘죽음’을 무기 삼는 모든 권위가 깨어졌다는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되어, 거스르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 이사야 65:20

     

    ‘생명’이 죽음을 몰아내는 것임을 밝히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건 누군가에게만 일어나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누구도 우리에게서 '하느님'께서 제 몫으로 주신 '생명'을 파괴하거나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혹여 내 삶이 파괴되지는 않을까, 온갖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에 내몰리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의 ‘부활’안에서 모든 불의와 불법과 폭력을 깨트리고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가 그 사실을 예수의 부활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윽박지르는 세상은 끝났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깨트리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오실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슬픔도 아픔도, 이별도, 고통도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을 파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부활'은 '죽음'을 거스르는 가장 강력한 '항거'인 셈입니다. 이 아침, 예수 부활의 소식에 참여한 우리 모두는 ‘헛된 수고’에 내몰린 운명을 거스르며 다시금 돌을 지고 오르는 ‘시지프스’처럼, 여전히 제 세상인 것처럼 으스대는 '죽음'의 겁박과 위협을 거절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 여전히 죽음의 힘앞에 주눅들어 있는 모든 연약한 생명들을 향해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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