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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3 사순절 마지막 * 종려주일 / 고난주간성서의 거울 앞에 2025. 4. 8. 16:4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50:4-9a
응송 | 시편 31:9-16
2독서 | 빌립보서 2:5-11
3독서 | 누가복음22:14~23:56 혹은 2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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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Tissot, <The Death of Jesus>, 1886 - 1894 https://www.brooklynmuseum.org/ko-KR/objects/4592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1.
사순절 마지막 주인 오늘은 특별한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십자가형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주님을 향해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일을 기념하며 ‘종려주일’이고 부르기도 하고, 이때로부터 한주간 주님의 그리스도로서 사역의 핵심인 십자가 ‘고난’이 시작된다고 해서 ‘고난’주간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겁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사순절의 마지막은 ‘고난’과 맞닿아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결론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 스러지고, 어둠에 삼킴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을 직면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번 한주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불쾌하고 불편한 시간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말없이 침묵하며 머무셨지만, 이와 달리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섣불리 기적을 말하거나 서둘러 부활을 준비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을 똑바로 직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안에서 순박한 ‘무력’과 ‘패배’의 아득함을 경험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간에는 ‘무얼 더 어떻게’?라는 식의 언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얼 더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생의 마지막 불꽃이 사그러지듯 마지막 거친 호흡에 내몰리고 나서야 비로서 인생이란 숨 쉬는 것 하나, 한 호흡의 따듯함마져도 모든 것이 주어진 것 뿐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러니 그분의 자비하심이 생명을 북돋아주시기 전까지 ‘죽음’ 처럼 적막한 시간을 지나가야만 하고, 그 시간은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단절’과 ‘부재’의 아픔으로 경험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무척 친근하게 고백하곤 합니다. ‘아브라함’이, ‘모세’가, ‘다윗’이나 ‘다니엘’,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이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듯,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이런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읽어왔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서의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같은 방식이라면, 오늘도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 부재’의 아픔을 경험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대체,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라고 하는 이 간극을 우리는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요?
구약 1독서 본문은 이사야의 예언서입니다. 보통은 40장에서 55장까지를 제 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50장은 제2이사야의 한 대목인 셈입니다. 2 ‘이사야’로 불리우는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가던 때였습니다.
포로로 살아간다는 것은 원수들에 의해 수염이 뽑히고, 뺨을 맞고, 침뱉음을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꾹꾹 삼켜내야만 하는 삶을 뜻합니다. 그런 상황에 내몰리고 보면, ‘하나님’은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신은 없던 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런 말도 없으시고, 이런 수치스러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질 않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펼쳐질 때의 숨막힘은, 패망과 절망에 내몰려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나고 나서 역사를 돌아보는 이들에게는 ‘이제 곧’이라는 말이 막상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막연하고 불가능한 긴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곧 하나님에 의해 자유를 얻고 포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선지자의 ‘위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어렵게만 들렸을 겁니다. 이젠 틀렸다는 자포자기하는 낙망에 떨어지던 그 때, 선지자는 전혀 다른 고백을 합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 이사야 50:8b - 9a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가장 멀리 계신 것 같은 바로 그 때야 말로 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라는 겁니다.
3.
그러나 그런 식의 형편이나 상황에 떨어진 시편 기자는 애닳은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 시편 31: 9 - 10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히고 나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듯 아무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충분히 삶을 피폐하게 만들 만큼 고통은 치명적입니다. 그렇게 희망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결국 뼈마디가 녹아 내리는 것처럼 죽음의 기운이 오히려 드세게 몰아칩니다. 그러나 애당초 믿음이라는 것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우리는 무력하기만 합니다.
4.
그러나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누가 나와 다툴 수 있겠느냐’며 당찬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이런 믿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까닭을 하나님께서 말하게 하는 입을 주셨고, 아침마다 일깨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귀를 깨우치고 열어 ‘학자’와 같은 사람으로 이끌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4-5절) 덕분에 그는 서러움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듣고, 깨우치고, 말하는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외침안에는 왠지 모를 외로움과 낭패감과 조급함이 가득해보입니다. 그의 외침에 힘이 들어갈 수록, 하나님을 찾아야 할 만큼 답답한 상황에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보입니다.
이건 단순히 괴로운 상황이나 시련에 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이런 세상에서는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이걸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그들의 역사가, 살아온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모르면 모른 채 지나칠 수라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이 계심을 믿게 되었으니 이제 그럴 수 없는 겁니다. 이쯤되고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도무지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는지 이해가 되질 않고, 사람들이 악에 동조하고 의를 배반하는 여전한 모습도 그들에게 아픔을 더 할 뿐입니다. 기쁨의 이야기속에 묻혀있던 속상한 이들의 눈물이 보이고, 그들의 아우성이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억울함에 내몰린 이들의 속상한 마음이 크게 보이고 도리어 우쭐거리는 이들의 오만함이 역겨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동안은 그러려니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데도, 정작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괴로울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 사도행전 7:55
귀가 트이고, 눈이 열려, 말하게 된다는 것이 곧장 세상에서 형통하게 사는 기쁜 일인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스데반’집사는 답답했고 그래서 말해야만 했고 결국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주님을 뵙게 된 이후로, 그분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믿게 된 이후로,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힘 앞에서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답답하고, 타는 듯한 목마름 때문에 울부짖을 때가 있었나요?
5.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고, 그분의 영광에 인생을 건다는 것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결국은 죽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 분은 또 있습니다. 종교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 분란과 소요를 싫어하던 무리들 모두가 그분을 싫어했고 때리고 침뱉고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그분은 그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았고 늘 그래왔듯 자신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 믿음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멈출 수 없는 걸음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싫어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내몰아 죽였습니다.
죽음에 내던져지게 되었던 그 날에 이르기까지, 정말 예수께서는 홀로 계셨습니다. 복음서 말씀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상세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부추겨 주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가 고발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 누가복음 23:2b
‘왕’을 사칭하여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이니 ‘빌라도’ 당신의 손으로 ‘예수’를 사형시켜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이들이 로마의 황제를 ‘왕’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이들이야 말로 거짓된 위선자들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권력을 대표하는 ‘빌라도’는 그분안에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도 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님을 죽음에 내어줍니다. 말씀에 능통하다고 하는 율법학자들도 맹렬하게 주님을 고발합니다. 군중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권세자들,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이들로부터 무지렁이 군중들에 이르기까지 어쩜 그렇게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모두가 눈이 어두울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의 길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해주실 분도,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도 오직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셨던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는 부끄러움에서 예수는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6.
복음서 기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 누가복음 23:46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그 말씀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말씀처럼 천군천사를 호령해서 상황을 뒤집거나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살아나거나, 곧장 하늘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모른 척하거나 피할 수 없는 실제입니다. 우리 모두 죽음앞에 서야 할 때가 곧 옵니다.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봄으로 삶을 위협하거나 미혹하는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갑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야 말로 가장 치명적이고 본질적인 것임을 깨달은 이들에게 여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은 부활하신 예수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부자가 될 것이냐, 문제의 해결이나 형통한 삶을 살 것이냐?가 아니라, 결국은 죽음앞에 있는 나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며 살아간다는 뜻이 됩니다.
그날 ‘예수를 잡아 죽이라’며 예수에게 등을 돌렸던 이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무리들과 여인들 그리고 제자 몇이 주님을 따랐고, 주님 곁에 매달려 있던 강도 중의 한명도 주님께로 회심했습니다. 비록 죽음 이후였지만 ‘백부장’은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운명을 걸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에게,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아갔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는 우리의 모든 고백이란 것도 그날에 가봐야 드러나게 될 겁니다.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워지던 그때 결국은 ‘예수를 잡아 죽이라’던 이들처럼 실망하며 ‘죽음’앞에서 예수를 배신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식의 삶을 선택하든, ‘예수’가 죽임당했듯 결국은 우리도 죽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7.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 빌립보서 2:10 - 1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야 말로 하늘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이들로부터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이해할 수도 없고 여전히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의 길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죽음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믿음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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