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5/03/30 사순절 제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3. 28. 13:2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여호수아 5:9~12

      응송 | 시편 32

    2독서 | 고린도후서 5:16~21

    3독서 | 누가복음 15:1~3, 11b~32

    # 설교음원

    https://naver.me/FSw0Qsz0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whXYA8hxSx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돌아온 탕자>, 1663-65



    '자유',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이들

     

    1

    오늘 함께 읽은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은 무척이나 유명한 본문입니다. 소위 집을 나간 ‘탕자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흐름으로 읽혀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게 된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읽는 것이 첫번째이고, 다른 한편은 ‘두 아들’이 아닌 ‘아버지’를 중심으로 읽는 겁니다. 이렇게 읽으면 두 아들의 과오나 회개와 무관한 조건없이 용납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핵심이 됩니다. 비교적 성서기자가 의도했을 본문에 충실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에서는 성서일과 본문 전체의 주제와 연결해 이런 해석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2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계시는 데도 둘째 아들은 제 몫의 유산을 챙겨 떠납니다. 그렇게 떠난 길이면 잘 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 꼴로 돌아오게 됩니다. 괘씸했던 둘째 아들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 것처럼 통쾌한 까닭은, 우리들의 ‘정의’관념에 부합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종’으로라도 받아주기를 바라던 고백처럼 우리는 이제부터 둘째 아들이 쌔가 빠지도록 고생하며 철이 들기를 기대하지만, 다음 단락에서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둘째가 돌아오던 그날, 마을 사람들이나 집안의 종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불효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렸습니다. 단 한사람! 그의 아버지 만은 마치 지난 일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린 것처럼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를 반겼고 환대해줍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몸성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지극 정성인 사랑이 감동스럽습니다. 하지만 비록 남의 자식일이라고는 해도 그저 아비의 재산에만 눈독을 들이고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린 채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받아주기만 하니 저 모양 저꼴이 된 것은 아니겠는가? 슬그머니 불편해집니다. 책망없이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것까지도 뭐, 그럴 수 있다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들을 시켜 둘째 아들에게 좋은 ‘옷’을 내어주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워주고,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까지 벌입니다. 모든 것은 주눅들어 있을 ‘둘째 아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실추된 그의 명예를 추켜세워주려는 아버지의 배려입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첫째 아들의 입장으로 장면이 전환됩니다. 그날도 그는 아버지의 밭에 나가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된 그의 마음에 동생을 향한 불같은 분노와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그는 지금껏 아버지를 섬기고 말씀을 어긴적도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효자라고 칭찬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한번도 걸맞는 보상이나 칭찬을 해준 적이 없습니다. 이 비유속의 아버지는 아무리 보아도 자식을 ‘차별’하는 이로만 보입니다. 대체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3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접할 때, 십중팔구는 둘째 아들을 향해 저런 나쁜 녀석이라고 분노했을 겁니다. 우리 자신은 첫째 아들처럼 성실하고,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이입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우선 둘째 아들이 어쩌다가 그토록 처량하고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불행이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가 방탕하게 살지 않고 유산을 잘 관리했다고 해도 그리고 정말 운좋게 오히려 받은 유산을 더 불리우게 되었다고 해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재산이라는 것은 어제는 있다가 오늘은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놓아야만 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첫째 아들은 어떤가요? 아버지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는 ‘나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해를 두고’라는 그의 말속에서 우리는 그의 열심의 동기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이전에도 늘상 아버지 곁을 지켰던 것은 아님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산을 모두 상속받기 위해 아버지의 눈에 들려고 몇 해 동안 열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런 사특한 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열심의 동기가 아버지의 인정과 보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든 그의 열심도 결국은 멈추어질 때가 옵니다. 오늘처럼 마음이 상하거나 지칠 때도 있고, 아무리 진실된 마음이라고 해도 손하나 꿈쩍할 수 없는 날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로, 자신의 기대처럼 삶을 지켜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안에서 속상한 것은 둘째 아들 뿐만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도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가 살아온 시간이 인정받지 못하고 모두 부정되어버렸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것도 둘째만의 일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도 아버지의 곁에 없었으니까요. 물론 첫째는 둘째처럼 방탕하지 않았고 열심히 일하기 위해 밭에 갔을 뿐이지만, 아버지만 홀로 집안에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리감이 가까울 수는 있지만 첫째 아들의 마음도 둘째처럼 아버지에게서는 멀리 떠나 있습니다. 여기에 본문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벌어진 고난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가 아버지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 첫째 아들의 지난 시간이 모두 부인되고 평범해야 했던 그의 하루가 온통 분노로 떨어진 까닭 또한 그가 아버지의 집에 머물고 있었을 뿐 아버지와 함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것 말입니다.

     

    4

    이미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던 그 순간부터 둘째 자신은 아버지 집의 ‘종’이 되어 연명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고,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포함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그의 과오에 대한 적절한 처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과거에 ‘아들’이었던 그가 ‘종’으로 전락하는 ‘수치’를 짊어지게 된 겁니다.

    아버지는 그런 ‘수치’에 내몰린 둘째 아들에게 하인들을 통해 ‘옷’과 ‘신’과 ‘반지’를 내어주고 그를 환영하고 용납하는 ‘잔치’ 벌여 주었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그에게 건낸 것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가’는 아버지가 이 못난 아들에게 건낸 ‘옷’을 ‘스톨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왕이나 제사장 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걸맞는 고급진 옷입니다. 또한 그 당시에 노예나 종은 ‘신’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에게 ‘신’을 신긴다는 것은 그가 이 집안에서 ‘종’이 아니라 ‘자유인’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반지’는 상속자, 즉 ‘아들’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증표인 셈입니다. ‘종’이 되어 마땅한 그를 모두가 ‘존귀한 이’로 대우해야 하는 ‘신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만 할 수 있고, 또한 아버지이기에 할 수 있던 일입니다. 집에 돌아오고 난 이후, 사실 둘째 아들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탕진해 버린 재산은 복구되지 않았고, 이미 제 몫의 유산을 다 날려버렸으니 그에게 돌아올 몫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예상과 달리 누구에게라도 ‘종’처럼 여겨지는 수치를 받을 일은 없다는 것 뿐입니다. 그건 모두 ‘아버지’의 배려와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여러분은 둘째 아들이 탕진한 유산보다, 아니 다른 상속받을 재산은 없더라도 다시금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복이라는 이런 이야기가 실감이 나시나요? 본문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재산’이’나 ‘인정’ 그리고 ‘보상’ 같은 것 보다 훨씬 근원적인 행복의 근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물질과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탓입니다.

     

    5

    그런데 오늘 1독서 본문에도 ‘수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1독서 구약 이야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을 목전에 둔 출애굽 공동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십 년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야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까지 도착하고 보니 추억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것이지, 지난 사십 년은 참으로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시련으로 가득찬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의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질 않고, 광야 부족민과의 갈등에서 생존해야만 한다는 위기감과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과연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있는 것인지와 같은 회의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금송아지를 만든 일 때문에, 한날 삼천명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침내 닿은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 건내신 첫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 여호수아 5:9b

     

    이 말씀은 단순히 여기까지 오느라 그 동안 고생 많았다는 위로가 아니라 이런 목적 때문에 너희를 ‘가나안’ 땅까지 이들을 이끌고 오셨다는 확인이며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부터 하나님이 야곱의 후예들에게 주실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풍요롭고 풍성한 재산도, 안락한 삶도 아닙니다. 이 땅에 들어왔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준비된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가나안’의 부족들 틈바구니안에서 그들은 생존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먹을 것을 염려해야 할 수도 있고, 평안이나 안전을 위협받거나, 불확실한 운명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그들을 노예를 대하듯 윽박지르거나 강요하며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유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장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잇대어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약속하셨고, 성경은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한 본질이며 근거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복’이라는 이런 고백이 상투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빕니다.

     

    6

    애굽의 ‘노예’였던 야곱의 후예들이나, 아버지 집의 ‘종’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던 둘째 아들 뿐만 아니라, 정작 우리 자신도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첫째 아들처럼 성실하게 살아서, 혹은 비록 결국 유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기는 했지만 둘째 아들처럼 많은 것들을 쌓음으로 ‘내일’을 잘 살아내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낯설고 불편한 ‘내일’을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복음서 말씀안에서만 보아도 열심히 수고함으로 인정받으려 했던 첫째는 하루 아침에 둘째만 못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것에 수치스러웠고, 거지꼴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역시 집을 떠날 때와 달리 ‘수치’스러운 형편에 떨어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 만큼 엉터리 같은 모습으로, 또는 저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모습으로 살면서도 별일 없이 무탈한 이들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우리 기대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전히 갓 태어난 아이가 왜 불치의 병에 걸리는지, 의롭고 선한 이들에게 고통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는 이들에게 찾아온 시련은 무엇 때문이고, 반대로 악하게 사는 이들의 기쁨과 풍성함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내일을 지켜줄 수는 없고, 이 만큼이면 저 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던 우리의 예상과 기대는 언제나 어긋나기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더 많이 가지면 가질 수록, 더 많이 해내면 해낼 수록 결국은 경험하게 될 ‘수치’는 더 커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염려, 근심, 절망, 두려움, 그리고 결국은 ‘죽음’에 의해 드러나게 될 ‘수치’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생이 비루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만 가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7

    여전히 우리들은 ‘나는 이 만큼 밖에 못했으니’라고 정죄감에 주눅이 들어 있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이 만큼 했으니’ 라며 우쭐 거리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잃은 둘째 아들 같은 세리와 죄인들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처럼 신실하고 거룩함을 지켜가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모두가 ‘수치’를 당하게 되는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똑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손에 쥐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채워갈 수는 없고, ‘생명’이 없으니 결국 우리중에 누구라도 예외없이 ‘수치’를 당할 운명을 벗어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궁극적인 사태 앞에서 무능하고 무력하고 그러니 결국은 ‘수치’를 당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잘났다고 으스댈 것도, 비하하고 정죄할 것도, 부러워하고 시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 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은 지나간답니다. 가난도, 무능함도, 비천함이나 부끄러움, 힘들고 어려운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음’ 마져도 우리를 지나간답니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더 이상 내일 ‘수치’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거나, 그런 ‘수치’에서 벗어나려고 노예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슬퍼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인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는 한가지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신앙생활하고 교회 잘 다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믿으며 산다는 말,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삶의 형편속에서도 ‘예수’믿음이 ‘죽음’의 수치를 깨트리고 환희와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과 한 운명으로 살고 있음을 또한 그렇게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실 것을 믿으면 됩니다. 모든 생명이 그분안에 있으며 그분안에는 죽음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마르지 않는 충만한 생명이 있으니, 주님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생명을 빼앗길 일이 없고,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피하오니, 내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나를 건져 주십시오.’ | 시편 31:1

     

     

    수치를 면케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이 약속의 말씀을 주님은 반드시 지켜내실 겁니다.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야 말로 이 절망과 두려움이 '수치'를 강요하는 땅에서, 그분을 믿음으로,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불안을 강요하는 권세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분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고, 그분의 은총 아래서 새로운 생명을 맛보며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자유인’들입니다. 충만한 생명으로 채우시는 주님께서 죽음앞에서도 ‘자유’한 인생과 삶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_ 아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