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6/03/01 사순절 제2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6. 2. 23. 10:1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12:1-4a

      응송 | 시편 121

    2독서 | 로마서 4:1-5, 13-17

    3독서 | 요한복음 3:1-17

     

    * 설교음원 영상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됩니다.

    Abraham's Journey to Canaan, Pieter Lastman, 가나안을 향한 아브라함의 여정, 피터 라스트만 작품

     

    '믿음', 길 위에서만 피는 '꽃

     

    1.

    오늘 1독서 구약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아브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서 기자는 그의 길떠남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떠나게 되었는지, 떠나기전까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저 딱 한줄, ‘그는 떠났다’는 말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짧은 문장을 통해 그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가졌는지, 또는 그가 얼마나 용감한 결단을 내렸는지만 이야기하려고 듭니다. 남다른 영웅적 신앙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작 아브람이 무엇을 두고 떠났던 것인지 의미를 깊이 들여다 보지 못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그가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고 언급합니다.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들입니다. 안정된 기반, 든든한 관계망, 성공한 삶으로 증명된 방식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가르쳐온 것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손에 넣고, 지켜내고, 계속해서 되물림해내기 위해 기꺼이 삶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바로 그런 것들을 뒤로 남겨둔 채 떠난 겁니다. 세상의 상식과 기준으로만 본다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곧장 실패로 간줄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기어이 망하는 선택을 했다고 수군거렸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누군가 안전한 것을 놓으려 할 때마다, 쌓아온 것을 포기하고, 움켜쥐기 보다 펴고, 성공이 아닌 행복을 선택할 때마다, 그런 수군거림은 어김없이 반복됩니다.

     

    2.

    우리는 아브람의 이 이야기를 하나님이 부르셨고, 아브람이 응답했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읽어왔습니다. 그리곤 습관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여기 있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삶에 간섭해 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당초 그가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대체 무엇인 걸까요?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분이지만, 언제나 먼저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와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만남은 문자 그대로의 음성이 아니라, 느닷없이 찾아오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들이 모두 잘 살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모두가 부러워 할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무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그렇게 많은데도 채워지지 않은 내면의 불행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존재를 뒤흔드는 이런 물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아브람과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채하는 우리와 달리 그는 이 물음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개 우리는 이런 물음 앞에 설 때마다 더 채우고, 더 벌고, 더 쌓는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바빠집니다. 떠오르는 물음을 지워버리기 위해 시끄러운 소음을 키워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통렬하게 문제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았고, 결국 그 동안 자신이 그토록 붙들어온 것들이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났습니다.

     

    3.

    ‘자유’는 주로 선택과 거부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강요를 뿌리치고 자기 몫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두려움에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걸어낸 걸음만이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자유할까요? 내가 살고 있는 이 방식이 과연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망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여기까지 몰아온 걸까요?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했던 자유란, 사실 너무 무겁습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 되어 버리니 그렇습니다. 아무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고, 어디에도 기댈 수 없으며, 삶의 의미조차 스스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니 그가 말한 자유는 해방이라기보다, 차라리 혼자 짊어져야하는 형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군중 속으로 숨어들고,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그 무게를 덜어내려 하는 겁니다. 아브람이 경험한 자유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생명이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사르트르의 자유가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자유'라면, 아브람의 자유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에서 오는 자유'였습니다. 전자가 무게를 떠안는 자유라면, 후자는 짊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 앞에서 인간은 결국 도망치거나 무너집니다. 그러나 약속 위에 선 자유에 기댄 인간은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다른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걸음을 홀로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만 해당하는 특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선택 보다는 그 뒤에 따르게 될 책임이 두려운 나머지 자꾸만 자유로부터 도망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합니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적어도 혼자 틀리지는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비교와 경쟁으로 작동하는 구조 안으로 들어가면 적어도 고민하지 않아도 정해진 대로 따라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탓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왜 학생들은 이과 아니면 문과중에서만 선택을 해야하는지, 왜 월급의 크기로, 아파트의 평수로, 자녀의 성적으로, 내 삶의 행복 여부가 평가되어야하는지, 무언가 그 기준이나 잣대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문이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안에서 인정받으려 순응할 뿐입니다.

    사순절은 이런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직면하는 계절입니다. 잘못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무엇에 끌려다니는지, 무엇이 무서워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정직함이 없으면 눈물은 감정의 배설로 끝나고, 예배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어제와 같은 자리로 돌아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손을 놓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홀가분하게 손을 놓고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내딛였을 뿐입니다.

     

    4.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람 이야기를 다시 꺼내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 로마서 4:3

     

    우리는 '의롭다'는 말을 도덕적 탁월함 정도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ἐδικαιώθη'는 정죄받지 않는다, 비난당하지 않는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의해 어떤 기준으로도 낙오자로 판정받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비교와 경쟁이라는 구조 안에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정죄당하는 고통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손가락질이 따라옵니다. 채움의 방식안에서는 아무것도 충분한 것은 없습니다. 조금 앞서 있으면 더 앞서 있는 사람이 나타나고, 무언가를 이루면 또 다른 무언가가 기준이 되고 마니, 누구도 의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브람은 그런 억압의 틀을 깨고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업적과 행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 로마서 4:13

     

    아브람이 운명을 걸었던 것은 세상이 내 삶을 정죄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내일은 불투명하고 막연하여도, 내 삶이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잃지 않는다는 약속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것이든 신앙적 열심이든 내가 쌓아올린 것으로 삶을 완성해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다는 약속을 붙드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지식으로 아는 것과 이것을 삶의 토대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수십 년 읽고, 설교를 수백 번 들었어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면 불안하고 비어있으면 실패처럼 느끼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약속은 늘상 막연하고, 반대로 현실의 결핍은 너무 선명해 보입니다. 그렇게 작동하는 세상안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길들여져왔기 때문에, 이걸 단순히 의지나 결단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약속에 기대어 이런 식의 익숙해진 것들을 거스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건 한걸음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용기야 말로 참으로 당신을 향한 신뢰라고 받아주셨던 겁니다.

     

    5.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용감하게 응답했던 사람이 또 있습니다. 복음서가 소개하는 유대의 지도자 니고데모입니다. 계속본문인 요한복음은 그를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파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이름 니코데무스 Νικόδημος 는 ‘백성의 승리자'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낮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지위, 영향력, 사회적 명성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인정받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밤이라고 하는 장면은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그의 내면이 그 만큼은 어두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어둠은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끝을 알 수 없는 공허함, 더 쌓으면 나아질까 매달려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명성은 얻고 있었지만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인생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규정짓곤 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제 삶에 어둠이 내려앉고나면 갈피를 잃은 사람처럼 암울해지고 마는 우리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핍 자체를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간 것처럼, 우리도 그 어둠을 뚫고 주님께로 나올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는 그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세속적 가치, 성취와 인정과 제 안에 쌓아두기만 하려는 소유로 살아서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좀 다르게 살아야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진지하게 응답해본 사람이라면, 어찌하면 좋을꼬? 절망할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짓눌린 삶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비교와 경쟁, 소유에 집착하는 방식으로만 살아온 사람에게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돈으로만 인생의 행복을 가늠하던 사람에게 배고픈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주님 말씀처럼,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한 일 수밖에는 없는 겁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니 결국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거기에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했던 구원을 성령이 가능하게 해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어떤가요?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거듭남’을 오해해왔는지 실감이 나시나요? 주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조금 더 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썩어 없어질 것 너머에 감추어진 생명을 볼 수 있는 것, 생의 절망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마는 허탄한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들여다보는 눈을 갖는 것,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6.

    이 모든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7절에 닿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3:17

     

    매우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왜곡된 이미지를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부족하면 벌하고, 채우지 못하면 외면하는 심판자로 그려왔고, 또 그렇게 믿음을 강요받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도 세상 앞에 설 때처럼, 이 만큼 해야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를 썼습니다. 거룩하게, 신실하게, 하나님 백성답게와 같은 조급한 수사들이 우리의 신앙을 성과주의의 늪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생을 팽개쳐두시는 분이 아니라, 망한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생명으로 이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야말로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밑둥까지 내몰린 예수를 찾아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슬퍼런 세상에서도 용기내어 살아가도록 지지해주는 약속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약속에 기대어 살아가는 겁니다. 아브람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삶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가 그를 떠나게 해주었던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어디쯤 왔는지 모르고, 얼마나 나아가야 할른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의 길을 보니 영 볼품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연함이나 불안감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 습관이거나 타성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의심하면서도 걷는 것, 확실하지 않아도 손을 내미는 것, 그래서 걸어낸 시간과 삶의 흔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루의 걸음을 걸어낸 우리의 용기를 하나님은 ‘믿음’으로 받아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버려두시지도 않으실 겁니다. 삶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가 걷는 그 길 위에 주님은 함께 계실 겁니다. 그 약속에 기대는 것이야 말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용기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오늘 이 길을 걸어갈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무엇을 근거 삼아 용기를 내겠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성공입니까?

    우리는 우리 앞서 걸어간,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려두시는 일이 없음을 입증해주신 예수님의 인생을 통해 살아갈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멘.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03/15 사순절 제4주  (1) 2026.03.10
    26/03/08 사순절 제3주  (1) 2026.03.04
    26/02/22 사순절 제 1 주  (1) 2026.02.17
    26/02/15 주현 후 마지막 주 | 변화주일  (1) 2026.02.13
    26/02/01 주현후 4 주  (1) 2026.01.29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