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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절 제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6. 3. 4. 10:2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17:1-7
응송 | 시편 95
2독서 | 로마서 5:1-11
3독서 | 요한복음 4:5-42
* 설교영상과 음원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합니다

평화 는 제국에서 피지 않습니다
1.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일상이 안전하고 견고할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정해진 시간에 각자에게 주어진 일터로 향하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또 때가 되면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돌아옵니다. 남들과의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내 생활을 유지할 수준의 잔고가 있고, 사회적인 관계망 속에서 그럭저럭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안온함’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행복’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여튼 적어도 그 일상의 테두리가 유지되는 동안 만큼은, 우리는 모두 제법 괜찮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삶을 지탱하던 터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 찾아옵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이 매우 특별한 날이 되고, 건강이 무너지고, 믿었던 관계가 바스라지며, 가난의 그림자가 턱밑까지 밀고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딛고 서 있던 것들의 실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살아있다고 생각했고, 이만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사실은 늘 죽음의 한편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7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그래서 오늘 우리의 이야기처럼 익숙합니다. 애굽을 뛰쳐나온 그들의 여정은 지금 르비딤 황무지에 닿았습니다. 하지만 마실 물이 없습니다. 입술은 바짝 타들어가고, 목구멍은 갈라지며, 등짝을 내리쬐는 태양빛이 뜨겁기만 합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찬양했던 입술에서 어느새 날 선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당신은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우리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 출 17:3, 7
우리는 이들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무나 익숙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할 말은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잔인하고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가난에 내몰리고 배고픔에 잠들 수 없는 이들의 우울한 삶 한가운데서, 도무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동안 교회는 이런 회의를 불신앙이나 불경건으로 배척해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그런 순간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왔지만 사실은 지금 삶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돈, 성공, 사람들의 칭찬, 부러움을 살 수 있는 지위나 업적 같은 것에 영혼의 닻을 내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도 그런 것들이 삶을 건져내고 지키며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의지해 왔던 겁니다. 느닷없이 그것들이 흔들리니, 하나님마저 계시지 않는 것처럼 절망한 적이 오늘만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며 주님을 믿는다고 말해왔는지, 무엇 때문에 지금 이토록 주님을 의심하게 되었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도 심드렁하게 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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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울은 2독서 로마서의 말씀안에서 치명적인 화두 하나를 던집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 롬 5:1
‘평화(Pax)’야 말로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제국 로마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는 무력과 힘으로 자신들이 전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로마의 심장부에서, 세상이 칭송하고 있는 평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듭니다.
로마가 이루어냈다고 하는 평화란, 상호 존중과 생명의 공존이 아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것은 '철저한 굴복'을 전제로 한 폭력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정복당한 민족들의 피맺힌 비명 소리를 칼과 창으로 잠재운 죽음의 '침묵'에 불과했습니다. 로마의 역사인 타키투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갈가쿠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약탈하고 도살하고 강탈하는 일을 제국이라 부르고, 황폐하게 만든 곳을 평화라고 부른다." 어떤가요? 그의 말대로 칼에 의해 강요된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가 없습니다. 로마가 말하는 평화란 정복자들의 특권이고, 이 행복은 고스란히 저항할 힘조차 없는 피정복민에게 끝없는 절망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누렸던 안락한 일상, 화려한 목욕탕과 검투사들의 경기를 즐기던 그들의 '행복'을 지탱한 동력은 한마디로 수없이 많은 노예들의 눈물과 피였습니다. 한쪽의 절대적인 희생과 착취 없이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구조적 폭력, 그것이 로마가 자랑하던 평화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이런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허튼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의 그 어떤 시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모두가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평화’를 자랑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야만의 시대가 모두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네온사인과 높게 솟은 건물들 사이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통계가 집계된 이래 우리 나라의 자살률은 거의 매년 OECD 국가 중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대학에 가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서, 열심히 돈을 벌게 되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행복지수는 곤두박질 치고, 마치 말라비틀어진 시체처럼 사람들의 영혼은 곤고해져버렸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쉼을 빼앗긴 노동자들의 추락하는 삶 위에 세워진 기업의 이윤을 '성장'이라 부르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타인을 밟고 올라선 자리를 '성공'이라 부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자유를 폐허로 만들어 놓고 평화라 부르던 로마의 야만과, 만족감을 경험할 수 없을 만큼 영혼이 파괴된 현실을 행복이라 부르는 자본의 야만이 대체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평화한 것입니까?
바울은 제국의 한복판에서 진정한 평화란,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로마'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그분과의 깊은 사귐안에 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 한 가지 뿐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말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오늘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시대에도 전적으로 바울의 말은 옳다고 믿습니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어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 이런 신앙의 언어라는 것이 한없이 무기력하고 비현실적으로 들릴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외친 그리스도안에서의 평화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생명을 잃은 박제된 신앙인으로 남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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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울이 전한 복음을 자신의 삶으로 경험해 낸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3독서 복음서로 읽은 요한복음입니다. 모두가 내리쬐는 뙤약볕을 피해 숨어들었던 정오에 한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물물을 길어내기 위해서였지만 단순히 육신의 갈증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말이지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조차 희미해져 버렸을 만큼, 불우한 날들이 계속되던 탓에 그녀는 몸도 영혼도 지쳐있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 때문에 타들어 가는 속을 우물물이라도 끼얹어야 살 것 같아 뛰쳐나온 겁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 요한복음 4:17 - 18
주님과 여인 사이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삶에 드리워진 갈증의 이유를 조금은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유대와 사마리아 땅의 여성들은 아버지나 남편, 아들 같은 남성의 보호 없이는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비루했습니다. 게다가 남편들은 요리를 못한다는 사소한 구실이나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일방적으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보수적인 사회였으니까요.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다는 말은, 그녀 자신이 이런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버림받은 뼈아픈 피해자였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이미 다섯 번이나 혼인에 실패하고 보니 더 이상 정식 혼인은 어려웠을 그녀가,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누군가의 첩이나 종이 되어 생계를 의탁하는 길뿐이었을 겁니다. 여인을 향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얼마나 잔인했을지 쉽게 가늠이 됩니다. 중동의 혹독한 태양보다 그 시선이 더 따가웠을 겁니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버린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던 겁니다. 하루 세끼를 먹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깊은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타들어 가는 속을 채울 도리가 없던 차에,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주님을 만나고 영혼의 갈함을 해소받은 여인이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성의 사람들 모두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먹고사는 형편이 조금 나을 수는 있지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세상으로부터 서러움 당하는 형편은 다를 바 없었으니까요. 그때 주님께 음식을 권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 요 4:34
주님을 대접하겠다고 몰려든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사실 그들을 향한,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한 뼈아픈 물음이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양식 삼아 살고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무엇을 가지면 든든하고, 무엇을 얻지 못해 조급하고 갈급하십니까?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입니까? 혹시 사람들의 평판이나 종교적 업적으로 자아를 채우려 매달리다가 오히려 영혼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허무를 애써 외면하느라 그런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만족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교에 내몰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 때만 평화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화는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어,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만,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우리는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혹시 로마가 자랑하던 거짓 평화를 구걸하고 있는 걸까요? 내 삶이 지금 ‘비교와 경쟁’에 내몰려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거나 비교당해 불안해하고 있다면, 혹은 남보다 조금 더 가졌다는 사실에서 안도감과 만족을 얻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답해봅시다. 과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삶에 얼마나 자족할 수 있습니까?’ 이게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하나님 일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 대신에 하나님의 일을 선택할 수 있느냐, 혹은 반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세상의 그런 모든 것을 하지 않거나 못해도 괜찮느냐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어찌해서든 자신을 채워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비교와 경쟁, 수치와 정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 예수를 만난 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참된 해방과 구원의 사건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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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며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촘촘한 비교와 경쟁의 트랙 위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성과를 쥘 때야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얄팍한 안도감을 가리켜 ‘평화’라 부르며 스스로를 속여왔습니다. 그러나 업적과 성과로 세워진 자아는, 나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룬 사람 앞에서는 끝없이 비굴해지고, 나보다 못한 이들 앞에서는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우상일 뿐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피정복민의 피를 먹고 자랐듯, 경쟁이 주는 거짓 평화는 결국 내 영혼과 타인의 삶을 착취한 대가일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버려두고 간 물동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은 단지 물을 긷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폭력적인 세상의 잣대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텅 빈 결핍을 채워보려 발버둥 치던 무겁고도 질긴 ‘생존의 무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적인 수용과 사랑을 경험한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도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비교당하고 상처받던 비루한 자신과 비로소 화해하게 되었고, 진짜 평화를 맛보게 된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세상의 갈채나 화려한 왕관으로 포장하고 증명하는 모든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는 그래서 오롯이 하나님의 은혜가 덮는 것만이 생명을 잉태하는 참평화라는 것을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사순절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따르수 있기를 빕니다. 어떻게 해서든 채워야 한다고 우리 자신을 옭아매던 물동이를 주님의 운명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적대적인 삶을 멈추고, 이제는 상처 입고 초라한 내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다함 없는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 은혜 안에서 나 자신과 깊이 화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요동치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결코 빼앗기지 않는 참된 평화, 곧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호흡하며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광야 같은 일상 속에서도 이 평화가 여러분의 영혼을 깊이 적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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