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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2/15 주현 후 마지막 주 | 변화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6. 2. 13. 12:2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24:12~18

      응송 | 시편 2 혹은 시편 99

    2독서 | 베드로후서 1:16~21

    3독서 | 마태복음 17:1~9

     

    * 설교영상음원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James Tissot, The Transfiguration (제임스 티소, 변모), 1886-94

     

    영광의 민낯, 들여다보기

     

    1.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을 참 쉽게도 소모합니다. 찬송가의 갈피마다, 기도의 마디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영광이 내 비루한 일상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게되면, 마치 꿀먹은 벙어리처럼 답변을 잃고 궁색해지곤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남보다 잘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내 자식이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어버립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성공 신화'가 복음의 탈을 쓰고 교회 마당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일과 세 본문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안락하고 찬란한 신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시커먼 구름과 맹렬한 불꽃, 인간을 압도하여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거룩한 두려움',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만이 뒤섞여 있습니다.

    오늘 이 낯선 텍스트들의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껍데기뿐인 종교적 수사를 걷어내고, 우리의 안일한 실존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진짜 영광'의 민낯을 마주해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2.

    1독서 구약 본문은 출애굽기를 읽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서구 사회에서 배척당해왔습니다. 그런데 1세기 교회 공동체는 그런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을 고스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약의 텍스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예수가 서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출애굽기의 모세와 마태복음의 예수가 산 위에서 겹쳐지는 장면은 이러한 구약의 약속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마주치게 되는 놀랍고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같이 타오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신비로운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상하곤 하지만, 당시 광야를 떠돌던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들의 여정은 아무런 대책 없이 광야로 던져진 채로 시작되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정착할 땅도 없는 그 결핍의 상황속에서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압도적인 '하나님의 영광’의 체험이었습니다. 율법은 다름 아닌 그 영광 속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하나님 경험의 증거인 셈입니다.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제사장 그룹이 몰락했을 때에도, 유대교를 지탱했던 것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시내산의 영광은 눈을 사로잡는 신비롭고 화려한 장면이 아닌, 척박한 광야와 가혹한 역사속에서 생명을 지켜내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해준 흔적이었던 겁니다. 영광은 화려한 빛의 잔치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붙드는 하나님 기억입니다.

     

    자본이 모든 것을 삼키는 현대의 광야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세상의 영광인 돈과 권력과 안락함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으로 신앙을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오늘 우리 영혼의 평화를 지탱하는 것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일까요? 혹시 통장의 잔고나 세상이 던져주는 것들은 아닙니까? 오늘의 우리에게 하나님은 너무 멀기만 하고 현실의 문제에 자꾸만 숨이 막혀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세상의 영광에 휘둘리고 있는 탓은 아닐까요?

     

    3.

    이번주도 복음서 말씀으로 마태복음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9장 32절은 베드로와 두 제자가 잠을 이기지 못해 졸다가 깨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상에 눈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이 전승은 초대교회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믿으며 또 가르쳐왔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달리 아마도 당시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교회공동체 사람들이라면 모세와 엘리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곧장 그들의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가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바로, 본문 말미에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대목입니다.

    잠에서 깨자 마자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반응이 걸작입니다. 황홀한 종교적 체험, 압도적인 신비를 경험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제도화하고 소유하어 하는 것이 인간 봉성입니다. 베드로 역시 그 자리에 머물러 영원히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을 겁니다. 로마의 압제,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세상,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산 아래의 골치 아픈 현실로 내려가기 싫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베드로를 꾸짖기라도 하듯 단호한 하늘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마 17:5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들으라'고 합니다. 인간의 행위 중에 비교적 수동적인 것이 바로 듣는 겁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따르려고 하는 사람만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울림은 제자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일이 다 있고 난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 닿기 전에 넌지시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 마 17:9b

     

    침묵명령입니다. 왜 침묵일까요? 괜히 으스대고 떠벌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제자들도 산 아래 가서 이 놀라운 경험을 늘어놓을 생각 뿐이었을 겁니다. 물론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 사건이 됩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무관심한 세상에서 그 말이 들릴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삶은 결국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오롯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걸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의 빛은 종교적 현상에 불과하고, 어둠 없는 '빛'이란 허상일 뿐인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 없는 영광은 가짜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산위에서 제자들이 보았던 '빛'은 예수를 통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산 위에 박제해 두고 구경하는 전시품이 아니라, 반드시 어둠에 덮인 산 아래 우리의 비루한 일상을 밝히기 위해 가지고 내려가야 할 등불입니다. 애당초 빛은 어둠을 밝히기 위한 것이니 그렇습니다.

     

    4.

    산 아래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2독서인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맞닥뜨린 정황이 딱 그랬습니다. 그들은 “곧 다시 오겠다던 예수의 약속이 대체 어디 있느냐?”라는 세상의 비아냥거림 앞에 서 있었습니다. 재림은 지연되고, 박해와 조롱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 틈을 타 교회 안으로 기어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달콤하게 속삭였습니다. "예수의 재림이나 능력은 다 꾸며낸 신화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라.”

    이 속삭임은 오늘날에도 대단히 세련된 논리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기독교에서 ‘신화’를 걷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구름 타고 오신다는 식의 비과학적인 이야기는 무시하고, 그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고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진짜 신앙이 아니겠느냐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종말이나 재림 같은 거북한 이야기는 치워버리고, 현실에서 세련된 교양인으로 살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정말 기독교가 ‘바름’이라는 도덕이나 닦는 윤리 공동체입니까? 세상에서 칭찬받는 삶이라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정체성의 전부일까요? 물론 우리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의 재림과 종말론적 심판,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초월의 차원을 거세해 버린다면, 교회는 그저 그런 고상한 강연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성서기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명확합니다. 신앙은 허무한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산에서 직접 목격했던 ‘하나님의 영광’ 위에 서 있다는 겁니다. 초대교회가 세상과 충돌하면서도 끝내 비굴해지지 않았던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긴장감에서 비롯했던 겁니다. 기독교인에게 ‘예수의 권능’, ‘하나님의 영광’이란, 당장 눈앞에 통장 잔고가 채워지지 않아도, 세상이 조롱하는 실패자의 자리에 떨어진다 해도, 결국 하나님이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재림을 신화로 치부하며 초월을 지워버리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안락함에 안주하고 싶은 영적인 패배주의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눈은 저 너머의 완성을 향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이라는 광야를 늠름하게 가로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서 살아낸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신앙을 살아냈던 겁니다. 이번 한주간,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지금 이 결정은 이 세상의 논리를 따르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가?" 그 질문 하나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여러분의 일상을 제자들이 보았던 영광의 빛으로 물들일 겁니다.

     

    5.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산 위에 올랐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심히 두려워하며 엎드렸습니다. 그 압도적인 임재 앞에서 탐욕과 욕망뿐만 아니라 합리성과 이해득실을 따지고, 비교에 내몰려 조급함으로 무너지는 얄팍한 자아까지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따스한 생명의 빛으로 갈무리 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비틀거리는 우리 삶에 먼저 찾아오신 것도, 산 아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분도, 빛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먼저 찾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우리를 줄 세우고 평가하며 낙오시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영광이 백성을 굴복시킬 때, 예수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은 넘어지고 깨어진 모든 상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꽃피우시는 분입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 마 17:7

     

    그래서 예수와 마주치는 이들이라면 결국 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어둠속에서도 일으켜 세워내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 그 신실한 약속외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영광이란 없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제자 공동체가 직면했던 산 아래, 일상의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춥고 어둡고 막연하며 불확실합니다. 영광이 아닌, 빛 한줌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내일의 생존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때로는 신앙이 부질없다는 권태와 회의가 짓눌러 오기도 합니다. 산 위의 황홀경은 찰나였고,우리가 살아내야 할 산 아래 삶은 지독히도 길고 힘겹기만 합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에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부동산의 숫자, 권력의 단맛, 박수갈채 같은 세상의 헛된 성공신화에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결국 해진 옷처럼 낡아지고 말 것들입니다. 대단한 기적을 쫓아다니며 신앙의 허기를 채우려 하지도 마십시오. 가난하고 무력하며, 무너지고 버려진 이들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던 예수의 말씀을 지팡이 삼아 오늘을 살아내십시오. 십자가라는 외진 길 앞에서도 주님을 이끌었던 그 영광이, 오늘 예수의 말씀, 하늘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여러분의 내일을 넉넉하게 이끌어주실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 요한복음 11:40a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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