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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0/31 성령강림후 23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2021. 10. 26. 21:49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룻기 1:1-18
    •   응송 | 시편 146
    • 2독서 | 히브리서 9:11-14
    • 3독서 | 마가복음 12:28-34

     

    설교음원

    http://naver.me/5y4ZjAFz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HsoKCMYKpPM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당신은) 얼마나 멀리있습니까?

     

    1

    종교’(宗敎) 허무와 결핍에 내몰린 , 온통 폭력과 갈등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하면 바르고 합당한 길을 선택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과연 세상을 향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내놓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 무색할 만큼 세상에는 여전히 전쟁과 기근, 갈등과 혼돈이 가득하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종교가 이런 병폐를 강화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움직이고, 삶을 구원할' 어디에 있느냐는 이 물음앞에 어떤 답을 제시해주고 있을까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하나님의 나라 땅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사랑 실천적 삶의 지향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 허무한 세상속에서 당신 생명의 삼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주신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사랑 어렵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내 사랑은 퍼센트, 이백 퍼센트 순전하다 큰소리를 쳐도 곤고한 시간이 찾아오는 순간 그렇게 무력하기만 하고, 먹고 살기 바쁜 현실앞에서는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으리라던 각오도 싸늘히 식어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랑 하나님 나라 법으로 믿고 사는 우리 안에서도 증오와 폭력, 혐오와 차별, 갈등은 여전해 보입니다. 과연사랑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2

    복음서는 오늘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의 일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이세상의 중심(배꼽)이라 자부하던 성전이 위치한 유대교의 정체성 자체인 도시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어린 양이신 주님을 잡아먹으려는 사나운 이리떼들이 가득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넘어트리려는 사특한 이들의 논쟁이 주님이 성에 들어오시자 마자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런 논쟁 사이에 오늘 율법학자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그가 주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과연 613개나 되는 율법중에서 주님께서 어느 것을 골라내실지 율법학자가 던진 질문에 오히려 궁금증이 커져가는 것은 우리입니다. 잠시후 주님께서 돌려주신 답은 가지 말씀이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가복음 12:29 ~ 31

     

    신명기 6:5 말씀과 레위기 19:18 말씀입니다. 말씀이야 말로 구약 전체의 가장 핵심되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지위로 올려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란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분명히이웃 고아, 과부 그리고 자기 땅에 발딛고 살고 있는 외국인인 나그네에게까지를 이웃에 포함시키고 있음에도, 정작 유대인들은사마리아사람들,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이웃을 확장시키라는 주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또한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 주님의 말씀에도 사마리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좋고 싫음의 내가 그어 놓은 이웃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헤아려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번제와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율법학자의 답변은 기특하고 칭찬 받을만 합니다. 그도 역시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던 당시의 성전 제사안에 정작 반드시 선행되어야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고 생각해 왔었는가 봅니다. 어쩌면 그가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제사장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튼 이들의 대화는 대형 쇼핑몰처 화려한 교회건물을 짓는 일이나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지켜내겠다는 신앙적 열정뒤에, 굶주리고 소외된 이들, 도움이 필요 이들에 대한 자비의 손길, 선교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 한국교회를 향한 날카로운 충고처럼 들립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동안 복음서에 등장했던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이례적인 모습에, 주님이 그에게서 소망을 발견하셨던가 봅니다.

     

    3

    그런데 의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귀신들린 이들을 자유케 해주신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라고 하셨던 것과 달리, 율법학자에게는아직오지 않은 나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첫번째 답변인 신명기 말씀은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이라는 히브리어로 시작됩니다. 모든 계명을 포함하는 하나의 가장 계명인,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힘을 다해 그분의 말씀에 자신들의 삶을 조율하고 맞추고 기대며 살았고, 안에서 위로와 소망과 삶의 기쁨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그 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보기 힘든 신앙적 열심입니다. 요즘은 신앙적 열심을 냉소적으로 보거나 혹은 비현실적이라던가 미신적으로 여기는 시선들도 있습니다. 예배 드림은 형식만 남았을 의미는 축소되고,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과연 시대가 지나고, 지식이 쌓이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앙적 열심은 이렇게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지다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적 열심이 중요하지만, 형식주의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주와 객이, 본과 말이 뒤바뀌어서는 않됩니다. 신앙적 열심을 잃어버리면 허무해지고, 신앙적 열심에 치우치면 열광주의로 떨어질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 첫머리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여전히사랑 미숙합니다. 도무지 사람은 사랑할 없다고 말할 이유를 아직도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내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아마도 대부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고, 헌금도 하고, 경건생활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돈벌이와 성공에 내몰린 부모들이 부족함 없이 용돈도 주고, 하고 싶은 것은 모두 있게 해주었다는 것들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곤 해도, 그들을 보면서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구나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무것도 해줄 능력이 없어 품안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부모를 보면서도 깊은 사랑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 무엇을 해주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4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명기쉐마 말씀은무엇을 어떻게 하고, 또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강요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오직 사랑할 때만 말씀을 지킬 수 있고, 마음을 다할 수 있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할 수 있으며, 힘을 다할 수도 있다 말씀인 겁니다. ‘사랑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우리가사랑 있는 것이 아닌 겁니다.

    율법학자는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답변에는 본래 신명기 말씀에서목숨을 다하여라는 대목이 빠져있습니다. 자꾸만 순서를 바꾸어서만 생각하게 되니, 부끄럽지만 아무리해도목숨을 다해말씀을 지켜낼 자신은 없었던 겁니다. 차마 하나님 말씀 앞에서 거짓말은 없었기에 슬그머니 빼먹은 겁니다. 우리네 못난 본성은 사랑하지 않는 것에는 목숨은 커녕, 힘을 다하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고 맙니다. 그렇게 보니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룩한 척하는 이들에 비하면 그의 반응은 백배는 정직해보이기 까지 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네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왔다 하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법인데, 아직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안에 들어가면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있지만, 사랑밖에 있을 삶의 언어는 , 나만?’ 뿐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삶의 중심에나만보이니 자꾸만 불안하고, 두려워질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 요한1서 4:18a

    요한 사도는 온전한 사랑이야말로 허다한 두려움도 몰아내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감정은 벌칙이나 내쫓김, 결과를 생각할 찾아오는 마음입니다. 바울의 표현으로하면두려워하는 종의 영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아직 두려움을 몰아내는 온전한 사랑안에 있지 못한 것이고, 아직은 가슴떨리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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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1독서 본문으로 채택된룻기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압땅으로 이민갔던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가 징계와 저주로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다라고 여겼습니다.(13) 며느리들 만큼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랬고, 이방인이었던 며느리를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며 고집을 피웁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애틋한 정으로 인해 버려지고 깨어진 삶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인들의 처절한 삶의 고통이 서럽게 보입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란 단적으로 나오미와 , 여인이 처한 기구한 운명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의 내용들입니다. 

    현대 물질 사회에 길들여져당장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없는 으로 여기는 우리에게는, 패망함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룻기의 결말은  이질적이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지금명백한 해답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나 섭리를 믿으며 산다는 것은 운명론에 기댄 수동적인 삶일 뿐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 하지않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기고 아무것도 장담할 없는 길을 나섰던 룻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믿게 삶을 우겨싸고 있는 두려움을 떨쳐낼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며 역동적인 살아 있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만 누릴 있는 자유케 하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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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목숨을 다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을 받았다는 , 환란과 핍박, 궁핍함과 낯설은 절망에도 꺾이거나 소멸되지 않는영생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죽음에서 벗어나는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재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결과로 십자가를 지실 있게 했던 , 어둠을 뚫고 걸음씩 나아갈 있도록 예수님의 삶을 격려했던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사랑 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앞서가신 주님의 길을 따르며, 하나님을 바라보셨던 주님의 시선을 배우고, 말씀을 육신으로 살아내신 주님께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절망앞에서도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휩쌓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까지 다할 있는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사랑에 있는 , ’쉐마 말씀이 우리에게도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듣기만 하던 욥이나 바디매오가 마침내 눈이 열리고보는 사람 되었던 것처럼, 반드시 닫혀있던 영혼의 눈이 열리는에바다 사건이 필요합니다. 무수한 헛된 갈망속에서도 참되고 바른 소망을 구할 있도록 부르고 계신 성령을 알아차리고,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보이고, 절망에 짓눌린 우리의 오늘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담겨 있음을 엿볼 있는 말입니다. 절망 가득한 세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있는 주님의 함께 하심을 엿볼 있는 눈이 열려야만 합니다. 그때 비로서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왔던 자기 자신을 만날 있게 되고, 그제서야 자신이죄인이었으나 주님의 은총에 사로잡혀있음을 보게 됩니다. 영혼이 사랑에 사로잡히게 , 고통스럽고, 아프고, 서럽기만 했던 지나온 모든 삶이 긍정되고, 주님의 은총은 더욱 깊어져만 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행함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절망을 이겨낼 있는 기쁨이 있고, 죽음을 무력화하는 구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살이가 바쁘고 먹고 살기 힘들고 지쳐도, 밥은 먹고 숨은 쉬어야 하듯,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살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과 영혼이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는 이것 뿐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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