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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9/ 24 창조절 넷째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7. 9. 24. 14:21
본문 - 마태복음 20:1 ~ 16
https://youtu.be/4xJheZuJXvY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누실 수 있습니다
'긍휼함' 가운데 맛보는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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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산과 공기와 하늘빛이 좋은 요즈음입니다 모르고 있던 가을의 모습을 새로운 고운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자연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하나의 색만 있는 것도, 크기가 큰 녀석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색이 모여서, 서로 다른 모습과 크기의 나무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하나의 가을의 빛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다름이 또 저마다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고, 저마다의 좋은 점을 더 부각시켜주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연은 모두가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근사근한 아름다움은 멀리서, 빠르게 지나쳐 갈라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느린 걸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세심히 살펴보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모습입니다 눈을 가지고 있다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늘을 볼 수 있지만 하늘의 높이가 얼마나 높고 투명해졌는지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지 않습니까 ? 하물며 가을이 오고 있는지, 여름이 이미 가버렸는지 조차 알지 못할 만큼 둔감히 살아가는 삶도 많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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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찾고, 그 원인과 결과, 사실이 어떠한지와 관계 없이 내가 보고 싶었던 것으로 읽어내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라는 말입니다 예의 한국 땅을 혼란스럽게 몰아가는 것처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였는지에는 무관심하고 그저 불순하고 색이 다른 적대감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문화, 지역, 종교까지 모두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찾고, 또 그것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나와 다른 이의 세계와 충돌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끼리 끼리’ 모이게 됩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가진 사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같이 보고 싶어하는 이들만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주위에는 나와 다른 이와의 두텁고 높은 경계만 뚜렷해져 갑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난 눈은 모두를 낯설은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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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연은 시간이 지날 수록 변화와 다름에 유연해져가는데 유독 우리들 사람의 삶은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지날 수록 ‘나의 시각, 나의 가치, 나의 기준, 나의 가치, 나의 신앙’의 틀이 고정되고 굳어져만 갑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 또 여러분의 가치관의 눈은 나 아닌 사람과 세상을 어떤 식으로, 무엇이 기준이 되어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습니까 ?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의 규모가 확장되어가면 갈 수록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과 가치는 돈, 아파트, 자동차, 직장, 화려한 스팩, 걸맞는 명성 등등… 눈에 보이는 것 들로만 채워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아도 그 사람의 됨됨이나 품성을 읽는데에 미숙하고, 그 사람이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는데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지난주 문구점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 노트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네가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결혼 잘하려는 것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행복한 결혼과 아름다운 인연이 상대방의 얼굴로 수렴된다는 가치를 아이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학습하게 되는 현실이 끔찍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러니,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타인을 무참히 해하고, 같은 또래 친구들 돈을 주고 팔고, 장애우를 위한 교육시설 보다는 부동산 값이 오르는지만 보이고, 목숨을 잃고 희생당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도 보험금이 얼마인지가 뉴스가 되는 세상의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내일이 아닌 오늘 나를 만족시켜줄 것만을 붙들며 살다보니, 두눈 지긋이 감고 하늘과 별과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도, 가을밤 풀벌레 소리나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애쓰는 생명의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도, 선하고 아름다운 발걸음도, 조건없이 나누던 푸근한 마음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보지 못하는 불능에 빠지고만 것이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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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서일과 제3독서 복음서 본문속에서도 우리는 다른 눈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의 사건을 마주대하는 가치가 다르고 눈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전해주신 비유의 이야기인데, 본문을 다 읽고난 우리 마음이 괜시리 편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씀씀이나 마음이 너그럽다고 칭찬해주고 싶은데 한켠에서는 무언가 억울하고, 무언가 불공평한 뒷맛이 남습니다
보통은 오늘 본문에서 16절 말씀을 주제로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그래서 공동체나 신앙의 모습속에 나보다 약하거나 미숙한 이를 더 잘 대해주자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중되지 않겠다는 이기심에서 비롯하는 그 동기’는 여전히 순수하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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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본문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시선의 당사자들은,
포도원 주인과 먼저 온 품꾼들, 나중에 온 품꾼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청중들과 이 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삼시, 육시, 구시, 그리고 십일시에 각각 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모으고 일을 시킵니다 문제는 일이 다 끝나고 나서입니다 우선 8절을 보면 맨 나중에 온 이부터 품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그닥 크게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정작 문제는 9~10절 먼저 온 이부터 나중에 온 이까지 모두가 한 데나리온의 하루치 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무언가 불공평한 주인의 일처리에 불만족스럽지 않으십니까 ?
유대의 시간으로 삼시는 오전 아홉시 입니다 그로부터 육시는 정오, 구시는 오후 세시, 십일시는 오후 다섯시 입니다 그러니까 오후 여섯시까지 일했다고 가정해보면, 오전 아홉시에 와서 아홉시간을 일한 사람과,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 같은 품을 받았다는 것인데 우리의 정의관념을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나중에 온 이가 주인과 특별한 유착관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이 아니라도, 되려 성실히 더 많이 일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 보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마치 우리네 삶의 현실을 직면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언짢아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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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듯 무심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십니다 심지어 14절이후에 주인은 ‘내 것으로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떠냐?’ 식으로 먼저 온 품 꾼들에게 핀잔을 줍니다 주님은 정말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실까요 ?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요 ? 대학생 시절에 다양한 알바를 했는데 직업 소개소를 통해 공사장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손이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대기소에 있는 사람들을 슥하고 훑어보고는 이 사람, 저 사람 택해서 나갑니다 경력이 있고, 젊고, 힘있어 보이는 이들이 제일 먼저 일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뒤로 남을 수록 힘없고, 경력이 없는 이들만 남게 됩니다
본문의 메시지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십일시,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나갈 때까지 일감을 얻지 못했던 품꾼입니다 아마도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병약해 보이거나,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겠지요 사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처럼 보여 택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포도원 주인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그의 마음을 잠시 헤아려보려니 마음이 짠합니다 어쩌면 그는 돌아가면 책임져야하는 식구들 모습에 슬퍼했을지도 모릅니다 일을 얻지 못하면 오늘 그의 식구들은 모두 허기로 밤을 지세워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포도원 주인은 참 괘팍한 사람입니다 6절을 보니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고 퉁명스레 말을 건넵니다 핀잔이고 타박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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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그들이 게으른 이들이 아닌 삶의 자리에서 처연하고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었음을 알게 된 이후 곧장 자신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도록 불러줍니다 그 부름에 조건은 없습니다 일을 마칠 때까지 채 한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이 포도원주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불편해하는 이 포도원 주인을 보고 ‘천국’이 이와 같다고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 천국이 나라가 아닌 것도 낯설은데, 그 주인이 천국이라니요 ?
그러고 보니 천국, 하나님의 나라란 하루 종일 일을 얻지 못해 자괴감과 슬픔과 걱정에 가득찬 쓸모 없이 버려진 그이를 차별함이 없고 사특한 조건이나 이기심도 없이 아낌없이 받아주고 나누고 베풀수 있는 나라, 구속하는 조건도 없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나라인 셈입니다 연약하고 모자라고 힘이 없다고 괄시당하지도 않습니다 지식이 조금 있다고 깔보지 않고, 그저 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기죽을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가 전하시는 메시지와 거북함을 느끼는 우리 사이의 차이는 왜 생긴 것일까요 ? 우리의 가치는 언제나 ‘양’과 ‘크기’에 제한을, 우리의 눈은 늘 눈에 보이는 ‘돈’이라는 가치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먼저 일한 이나, 늦게 일한 이나 모두 품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닌, 먼저 일한 이가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는 것보다는, 나중온 이가 왜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냐는, 그러니 먼저 일한 이의 대가가 정당하지 않다는 탐욕의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를 받았느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가치를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신앙생활을 더 오래했는지 ? 누가 더 십일조 많이 하고, 누가 교단의 교권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더 신학적 지식이 많은지는 한 터럭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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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명의 자녀가 있는 경우, 대체로 모두가 다 건강하고, 모두가 다 똑똑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아이는 더 연약하고, 더 미숙한 경우가 있습니다 더 건강하지 않으니까 좋은 것 않먹이고, 어차피 더 똑똑하지 않으니까 공부도 가르치지 않으시겠습니까 ? 실용성과 산술적 정의에 예민한 세상의 가치관은 강하고 똑똑한 이에게 더 많은 것을 지불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조건은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은 모두가 소중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게 되는 천국은 세상의 가치와 정의를 전복시키고 ‘모두’와 ‘함께’를 수용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긍휼’의 주라고 고백합니다 못났다고 말하지 않고, 타박하지 않고, 소외시키거나 내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형편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긍휼’은 헤아림과 겸손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이쯤되면 결국은 애당초 먼저 온 품꾼과 나중 온 품꾼이 같은 품을 받는 것에 우리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나중 온 품꾼에 대한 헤아림과 공감이라는 기본적인 밑천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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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명은 무엇으로 평가받는 상대적 가치가 아닙니다 가장 고귀하고 중요하여 다른 것들의 가치를 구분짓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생명은 때로는 세상보다 큰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불하셨을 만큼 말입니다 생명을 대하는 이런 마음이 바로 긍휼이며, 그것이 자비이고, 그것이 헤아림입니다 긍휼함이 있어야 상대가 보이고 사람이 보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긍휼을 잃어버리는 순간 화석처럼 굳어지며, 긍휼을 잃은 세상은 끔찍한 아비규환의 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휼을 가져보려고, 사랑을 해보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긍휼이나 사랑은 시장에 가서 필요한 것을 돈주고 사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생겨 날 수 없습니다
꽃 한송이를 정성껏 가꾸듯, 사랑하는 아이들을 매일의 돌봄으로 키워내듯 마음을 다하는 매일의 시간이 쌓이는 방식으로만 긍휼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 생명을 보아야 하고, 귀하고 가치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는 눈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이런 눈과 이런 귀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
물질에 길들여있고, 탐욕과 교만에 익숙한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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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치관과 관념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과 보는 눈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기를 원하는 품꾼을 포용하는 천국의 가치를 바라보고, 그런 생명의 법에 우리 영혼을 기대며, 그런 성령과 함께 하루 하루를 살아낼 때, 우리가 살아가는 그 길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감리교회적으로 지키고 있는 청년주일입니다 오늘 주보에 김교신 선생의 이야기를 실어드렸습니다 젊음의 특징은 저항하는 힘, 그런 용기입니다
청년과 늙음은 육체적인 생물학적 구별의 언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칠십오세에 부름을 받았고, 모세는 팔십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는 이였을 때 하나님이 기름부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의 권세와 힘이 아닌, 하나님을 따라 자신의 모든 삶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것들을 절대화하고 영속화하려는 교만과 탐심과 자만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용기야 말로 젊음입니다 세상의 시류가 아무리 거세고 탁하여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에 잇대어 살아내는 결기가 젊음이며 그것이야 말로 믿음의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맨 나중된 우리에게도 한 없이 주어지고 있는 주님의 은총을 삶의 양분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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