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 10/ 1 창조절 다섯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17. 10. 1. 18:08
본문 - 출애굽기 17:1 ~ 7
https://youtu.be/VLMsmUxZll8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르비딤'을 지나는 길에 만나는 하나님
1
아이들이 공부하는 문제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편집이 되어 있습니다
앞 부분은 문제만 잔뜩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뒷 편에는 그 보다 분량이 적은 부분이 있는데, 풀이와 답이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보통은 ‘정답지’라고 씌여있습니다
‘정답’이라는 말이 어떤 문제에 대한 옳은 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답’이라면 이 답만이 옳다는 뜻인데, 어떤 문제의 경우는 풀이나 답이 꼭 그 한 가지만은 아닌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공된 답이 아닌, 다른 답은 옳지 않은 답?이 되는 모순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정답이라는 표현보다는 ‘해답’ 즉 풀어낸 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식의 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정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답, 하나 밖에 없는 옳은 답, 누구도 시비걸 수 없는 그런 ‘답’을 말입니다 조금도 틀어지고, 삐져나오면 않되는 획일화되고 경직된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일탈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우리의 근대화는 일제시대로부터 비롯해서 군사문화에 길들여져있습니다 집단, 단체성이 강조되고 강요되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하나의 답인 ’정답’에 익숙한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정답이 아니고 다르다면 틀린 답이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이런 ‘정답’ 지향은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역동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방해합니다 누군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 살게 됩니다 내 계획도, 내 삶도, 내 시간도 아닙니다 그러니 만족감과 행복감은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3
이런 ‘정답’에 대한 강박증은 가정, 학교,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를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면 잘 못된 것으로 낙인이 찍히고, 당사자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집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에도 ‘공부를 잘하면 잘 산다’가 정답이라고 몰아세웁니다 공부를 조금 못하고 다른 것을 잘하는 아이는 오답이 되어 버립니다
다른 이들 모두가 좇아가는 인생과 다르면 섣부르게 오답 인생이라고 낙담하게 만들고, 낙담하는 이런 삶은 우리네 신앙생활속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되어집니다
4
여러분이 오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 예수를 믿으심으로 기대되어지는 것이 무엇이길래 오늘 이 아침 교회를 찾아와 앉아계시는 것입니까 ? 무엇이 여러분을 이곳까지 이끌었던 분명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지금까지 걸어왔던 걸음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결단과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던 그때, 저마다의 내심에는 ‘정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으니 어둠과 절망이 가득한 내 삶에도 은총과 형통의 복이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가, 이제부터 더 복되고, 더 행복하고, 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5
그런데 어떠십니까 ?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우리가 기대하는 정답과 막상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경험되어 당황스럽고, 상심이 되지 않던가요 ?
예수를 믿으며 팔자가 펴고, 재물의 복도 누리고, 인생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자녀들이 창성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내 인생이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부유해지고, 내 자녀들은 요셉이나 다니엘 처럼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현실은 오히려 반대로 치닿는 것만 같진 않았습니까 ?
혹여 오히려 예수를 잘 믿어보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 무언가 더 꼬이는 것 같고, 무언가 자꾸 힘든 일들만 생기는 것 같아 답답하신 적은 또 없으셨습니까 ?
6
우리들 사는 인생이 이렇습니다 정답이 제시하는 대로 열려지기는 커녕 왜? 이런 일이 생기고,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는 터무니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지 않습니까 ?
대체 의로운 이가 환란을 당하고, 불의하고 악한 이들이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세상을 ‘정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
대체 믿음으로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삶이 왜 자꾸만 꼬여져가고, 어느날 갑자기 만나게 되는 불치병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것입니까 ?
우리들 각자가 살아가야하는 삶을 누가, 어떻게 이것이 ‘정답’이라고 단언하고 설명해낼 수 있겠습니까 ?
인생은 정답이 없고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 어쩌다가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 떠오르는 질문에 섣부른 답 조차도 막막할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7
애굽에서 출애굽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둘째달 십오일 만에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신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고대의 초강대국 애굽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게 되었던 이스라엘,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것은 이제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도 하나님의 주권앞에 무너졌고, 그들을 가로막던 홍해도 하나님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어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등에 엎고 이들이 가는 길앞에 막아설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형통한 길이, 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기자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는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입니다
16장에서 그들이 직면하게 된 현실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입니다
1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고, 고기가 없어 하나님을 원망한 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듯 씌여 있지만 실상 그들의 원망도 일리는 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 애굽의 바로의 권세를 무너트리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이라면 곧장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어야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풀한포기 자라지 않는 광야였습니다 가나안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현실은 배고픔과 막막한 현실이었으니 원망도 할 만하지 않을까요 ?
8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오늘 17장은 신광야를 떠난 그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한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르비딤’은 말 그대로 쉴만한 곳, 평원입니다 그리고 본문 17장 1절은 그들의 이 여정이야 말로 그들을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따라온 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해서, 믿음이 없어서 제 길로 고집하며 온 길이 아닌, 심지어는 하나님이 이끄셔서 도착한 곳! 그들이 지금 그곳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주께서 이끄셔서 온 이 길에서 지금 백성들이 다투고 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며 다투는 이들의 모습은 혈기가 가득합니다 2절에 다투다라는 말 ‘리브’는, 주먹질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르비딤에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순례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확보입니다 광야와 사막에서 물은 바로 생명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길 안내자나 리더의 덕목은 ‘물’이 있는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을 대언하는 모세가 인도한 르비딤에는 물이 없습니다 이는 곧장 수백만에 이르는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여기 저기 ‘책임지라’는 원성이 하늘을 찔렀을 터입니다
9
그래서 그들은 지도자 모세에게 따지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지도자입니다 원망을 받아도 쌉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모세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대로 백성들을 인도했는데 펼쳐진 상황은 참담합니다 자칫 흥분한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들어 초래된 책임 때문에 실망과 좌절이 몰려왔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 하나가 보입니다 ‘르비딤’의 상황에 당황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의 대응이 확연히 다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한 것은 4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것은 원망이 아닌, 현실의 상황을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없고, 백성들이 자신을 돌로 칠 것 같은 악화된 상황말입니다 누구에게 부르짖었습니까 ? 형제, 자매, 이웃,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10
모세는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요 ? 말도 되지 않는 상황,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이면 당연히 펼쳐져야했을 젖과 꿀이 흐르는 ‘정답’이 아닌,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절박하고 황망한 상황과 조건이 현실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는 자유를 저당잡혔어도 먹고 사는 생존은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었으니 낙담하거나 슬퍼하거나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본성입니다 누구라도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 모세가 성품이 좋고, 인내심이 많고, 믿음이 커서 그러했을까요 ?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도 모세처럼 어떤 상황속에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정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요 ?
11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일컫는 곳에서 반석을 치자 물이 샘솟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백만의 백성이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말입니다 ‘맛사’는 시험하다, ‘므리바’는 다투다, 시험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반석을 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저급한 믿음의 단면을 보여준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 늘 이런 빈약한 믿음 한 줌을 붙잡고 불안과 두려움과 싸워가며 하나님을 향해 가는 치열한 길임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 우리의 생에 만나는 광야들은 모두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내 삶을 통해 가슴으로 경험해가는 시간들이지 않습니까 ?
그런데 그리고 나서 바로 직후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자 또 다른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해결되자 목숨을 취하려 달려드는 아말렉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전투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아말렉과 더불어 싸우시는 분’ 즉 ‘여호와 닛시’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누가 싸우십니까 ?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같은 현실의 고난의 잔들을 해결하기 위해 싸우는 치열한 우리들 일상의 삶의 자리, 그 전쟁 같은 삶에서도 싸우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싸우려들면 지치고, 우리가 싸우려들면 두렵고, 우리가 싸우려들면 넘어지며 분쟁하고, 갈등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싸우시면 해결되고 승리하는 줄 믿습니다
12
맛사와 므리바의 물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즉 하나님이 우리 삶의 문제에 앞서 싸우시는 분이심을 가르치시기 위한 사건이었던 것일까요 ?
다시 말해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거나, 가르치시기 위해 ? 혹은 훈련시키시려고 우리를 오늘의 아픔, 오늘의 고통, 오늘의 절망을 경험하는 자리로 몰아세우신 것인지 ? 마치 더 좋은 선물을 주려고 지금 당장 함정에 빠트리고, 나중에 자신을 더 잘 믿게 하려고 지금 괴롭히는 그런 신이신가? 라고 하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 다음에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오늘 아프고, 오늘 괴롭고, 오늘 죽을 것 같은 상황속에 우리를 몰아부치시는 분이실까요 ?
13
본문의 두 사건을 전혀 무관한 사건으로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삶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도 여전히 이런 상황에 맞닥트리게 됩니다 네 ! 그것입니다 물이 없는 곳, 목숨의 위협마져 지나쳐야하는 길이 바로 우리들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거나, 믿음이 없었다는 등의 ‘정답’이 아닌,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에도 힘이 들고, 아프고, 슬프고, 당황스럽고, 속임을 당하고, 괴로움과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광야’로 읽혀지는 사람의 삶의 본질이 그런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는 곳이 세상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맞닥트린 곳이 광야였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이방인에 의한 죽임의 두려움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14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까 ?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 죽을 수 있는 곳에서도 죽지 않았고 칼을 들고 그들의 생명을 취하려 달려드는 아말렉의 앞에서도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와 생의 광야에서 스러진 수많은 이들과 민족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죽지 않을 수 있던 근거는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아픔의 시간에,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일을 감당할 힘,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늘을 헤쳐나갈 힘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삶은 그저 먹을 것이 없어 궁핍하고 마실 것이 없어 갈한 그런 땅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아말렉과의 전투후에 자신들이 걸어온 걸음을 돌아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생을 가로막은 모든 것과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 냈습니다
하지만 정답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정답대로 살지 못했다고 타인을 핀잔주거나 자학하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오늘 본문속에서 기억하는 바,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 터무니 없는 탐욕의 인간 세계에 대한 긍휼을 버리지 않으시고, 세계를 끌어안고 지켜내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이들을 끝까지 품고 십자가로 향했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15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고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이르는 최단의 ‘정답지’만을 요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이르는 그런 길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걸어가는 길, 르비딤을 거쳐 맛사에 이르러 우리의 믿음이 늘 시험받는 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그 여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약속의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어느새 걸어온 삶 돌아보니 여기까지 온 것처럼, 가나안까지의 그 광야 길을 무지랭이 같은 이스라엘과 함께 걸어내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이 광야에서도 반석에서 물이 솟아 오도록 하시고, 우리 생명을 붙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배고픔이, 목마름이, 두려움이 몰려올 때, 하나님을 향한 기도 조차 할 힘이 없을 때, 하늘을 올려다 보십시오 우리가 바라보는 그 밤 하늘의 별들은, 숱한 두려움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았던 그 별들이며,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푸근히 안고 계시는 평안이 몰려올 것입니다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 10/ 15 창조절 일곱번째 주 (0) 2017.10.15 2017/ 10/ 8 창조절 6주 (0) 2017.10.08 2017/ 09/ 24 창조절 넷째주 (0) 2017.09.24 2017/ 9/ 17 창조절 셋째주 (0) 2017.09.17 2017 / 09/ 10 창조절 2주 '예수의 마음 머무는 곳' (0) 201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