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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04 변화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19. 3. 3. 08:46

    본문:


    제1독서    출애굽기 34:29 ~ 35
    제2독서    고린도후서 3:12 ~ 3:18

    제3독서    누가복음 9:28~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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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 맺혀있는 '영광'


    1

    오늘 성서일과 제1독서 출애굽기 본문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고 내려온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오경의 기자는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비추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모세의 얼굴을 경외와 경탄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 35절)

    하지만 모세는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주목하는 것을 보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다고 합니다 (33절)

    대체 모세의 얼굴에 드러났던 광채는 무엇이었을까요 ? 그리고 왜 모세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을까요 ?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해서였을까요 ?


    2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붙들고 인도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목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내 삶의 방식으로는, 영혼의 위안이나, 자유와 해방과 같은 구원을 경험할 수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목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안에서만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즉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예수님 없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


    4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이있습니다 자유, 행복, 성공, 기쁨, 구원 등의 것들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것들이고 인생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의미있고, 잘 살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의롭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롭다'는 말을 인생의 목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의로움'이란 '옳다'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공부잘하고, 사회규범을 잘 지키고, 모범생으로 불리우고, 사람들의 평판을 얻는 사람은 누가봐도 의로워보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람을 인정하고, 그런 인정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또 매달리며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기 위해 율법을 잘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의로움'입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면서 사람들은 모세에게 압도당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신통력이라고 할까요 ? 우리랑은 다른 사람이니, 뭔가 대단해보이기만 합니다 

    모세를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모세처럼 광채가 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면전에서 뵙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에 관심을 쏟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모세처럼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율법을 잘 지켜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광채입니다


    5

    율법주의는 '성공주의', '실적이나 업적주의'로 갈무리가 됩니다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의로워진다고 여기는 삶이 내몰리는 도착지입니다 쉽게 '~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삶의 행태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이런 율법주의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두렵고, 무엇을 해내지 않으면 사회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명예가 있어야, 빛나는 업적이 있어야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줍니다 삶의 만족을 거기에서 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업적주의, 실적주의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목적, 평안과 평화, 자유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방식으로는 돈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해결할 수 없고, 명예를 얻는 것으로 나의 의미가 발견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을 가지더라도 결국은 부족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의 결핍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돈을 채우는 방식이 아닌,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결핍욕구가 아닌, 존재욕구를 키워가야만 합니다 )

    나는 부자가 되어도, 돈을 가져도 그렇게 타락하지 않고 만족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지나친 낙관주의입니다 업적주의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며 감사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 보다는, 나 이상의 사람과 비교하며 채우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불행으로 끌어안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6

    그래서 복음은 율법의 규범과 행위를 실천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고 선언합니다 

    기독교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아니 어쩌면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말씀이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다 의롭지도 않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갱신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인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본질만 왜곡시킬 뿐입니다 

    그렇게 해내야한다는 것에 매달릴 수록 그렇지 못한 우리의 모습만 비교의 대상으로 남게 됩니다 


    업적이나 실적을 쌓음으로 인정받게 되는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영혼의 자유와 구원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도리어 무엇인가를 해내고, 쌓아야 한다는 업적주의에 매몰되게 되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업적주의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나, 나보다 나은 타인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뽐내는 우월주의와 결국은 차별짓고, 구분짓고, 적대시하는 일만 벌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판단이나 정죄는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6장 1 ~ 18에서 유대인의 경건생활인 구제, 금식, 기도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라고 하는 방법론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슬리기만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경건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이 경건한 사람임을 확인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남들이 모르게 구제하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금식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그들은 구제나, 금식,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업적이나 실적을 '광채'로 바라보려고만 합니다


    7

    이 율법의 업적주의에 반대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 구원은 행함이나 업적, 인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업적이나, 인정, 명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정이 율법의 완수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안에 담겨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용납과 인정으로만 보여집니다 무엇을 더해서도, 더 가져서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 중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이기에 용납되는 것입니다 ( 자녀를 대하는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


    8

    오늘 성서일과 3독서 누가복음 9장에서 우리는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는 변화산에 오르신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하고, 옷에서 광채가 났다고 전합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귀신들린 아이를 낫게 하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 (43절)고 합니다 

    사람들이 산아래에 내려왔던 모세의 광채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과는 달리, 변화되어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속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광채가 아닌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속에서 발견되고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위와 업적, 실적이나 명성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그 믿음이 실현된 곳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9

    율법의 무거운 짐, 업적과 실적을 쌓아올려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세상임에도 여전히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중심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져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목사의 목회 역시 이런 세속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 성도수의 증가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목회를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


    10

    지난 금요일 3.1절 백주년을 지냈습니다 서슬퍼런 총칼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나아갔던 이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실질적인 권세는 일제의 무력이었습니다 여전히 독립은 오지 않았던 그 때, 태극기를 쥔 그들은 총과 칼날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의 몸은 자유를 빼앗겼지만, 그들의 눈은 자신이 자유인임을 보게 되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입니다

    현실앞에서는 누구나 두렵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달려 죽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예수를 믿는 믿음안에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겁기만 하던, 그리고 막막하기만 하던 압제하는 율법의 짐짐 점점 가벼워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구원입니다 업적과 실적을 강요하는 세속주의 세상에서 내가 죽는 십자가를 경험할 때, 우리는 부활하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외칩니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6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7절)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녘교회 #십자가 #십자가에_맺힌_그리스도의_영광 #업적,실적주의_율법 #자유와_해방_그리고_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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