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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8 성령강림후 1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9. 7. 13:04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18:1 ~ 11
2독서 | 빌레몬서 1:1 ~ 21
본문) 3독서 | 누가복음 14:25 ~ 33
응송 | 시편 139:1~6, 13~18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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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쓰기 | 깨진 그릇을 채우는 방식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일본 도예 기법 )
깨진 그릇에도, '은혜'는 채워집니다
1
나는, 내 인생은, 세상은 왜 이럴까 ?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 ? 자조 가득한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대단히 명확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잇대어 있어야만 하는데 하나님과 분리된 ‘죄’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삶은 좋지 못합니다.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삶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안에서도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 자신을 ‘박복하다’ 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_렘 18:10
이 말씀을 그대로 뒤집으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지켜 선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려고 복을 주실 것이다’ !! 라는 말이 됩니다. 깨어지고 터진 삶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 지켜 행한다 ! 는 것이 가벼이 들리지 않고, 쉽지 않고, 무겁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처럼 ‘복’을 쉽게 정의함에도 우리는 그 복을 누리지 못하며 삽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된다하시는데 그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수 없는데,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말씀은 주어졌으니, 늘 자신을 속이거나, 그럴듯 위선을 입어야 합니다 그도 아니고 정직한 편에 속하는 이들은 ‘나는 않돼 !’ 정죄감에 짓눌리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기쁨이고, 감사고, 생명이어야 하는데, 부담으로 작동시키고 회피하고 싶어집니다.
주님은 ‘양은 주인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몽골에서 선교하시던 선교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소유의 양이 모두 방목되어 있었는데, 저녁이 되고 주인이 양을 몰기 위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정확하게 주인을 향해 양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양이 주인의 음성을 구별하고 듣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 많은 틈 바구니에서 내 자식 발견하고 수 많은 소음속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이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주님의 양으로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보는 시선, 그 페러다임의 변화가 있지 않으면 여전히 주님의 말씀은 무겁기만 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안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쁘고, 복되고, 유익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우리중에 누구나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님을 예배함을 지나, 삶에 새기기를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자꾸만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오늘 3독서 본문의 예수님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자기 목숨, 때로는 가진 재물 모두를 버리고, ( 오늘 본문에서는 ‘미워하라’로 까지 표현되고 있습니다 )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버려라’, 혹은 ‘미워하라’는 말씀은 ‘소유해라’ ‘쟁취하라’고 요청하는 시대적 외침과 부딪힙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하나님의 나라에 맞서는 사탄의 실질적인 지배력이기도 합니다. 더 가지려고 한다는 것은, 지금 비어있음에 대한 반증인 것처럼, 그 갈함과 결핍에 한번 사로잡히고 나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핍으로, 노예로 우리를 부리려고 하는 맘몬의 환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계를 하십니다. 그 유혹에서 벗어나는 참된 자유는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 하나님의 은혜로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인간 삶의 평안과 행복을 위한 이런 실천적 대안은 다른 종교, 철학도 제시하는 인간 진단이기도 합니다.
'비워내라, 버려라, 또는 포기하라’ 정말 모든 문제가 다 내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동의가 된 이후에, ‘그래서?’라는 질문앞에서 이런 진단과 분석의 끝에 주어진 금언은 실제 살아감의 자리에서는 사뭇 ‘무책임’하게 들리기만 합니다.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비워내지거나, 버려지지 않으니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속의 부모, 처자, 형제, 자매와 같은 가족들이나, 자기 목숨은 실은 모든 인간이 생존을 위해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이것 없으면 끝장나는 것들인 셈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매일의 열심은 결국, 어떻게 해서든 이런 것들을 유지하고 지켜내려는 몸부림들입니다. 반드시 소유해야만 합니다. 붙들고 있다는 말은 힘을 주고 있다는 말인데, 그러니 힘에 겹습니다. 잠시도 한눈을 팔거나 손에 힘을 빼서는 않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하고자 시작된 힘에 겨운투쟁의 끝에 결국 자유하지도 못합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것을 놓을 수만 있다면 참된 안식이나 평화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 않은 것은 우리 생존의 본능상 이런 것을 끊어내는 것은 쉽지 않고, 그럴 사람도 없다는데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본능을 이기기 위해 면벽 수련 10년을 하여도, 끼니가 되면 배가 고프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겉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처럼 초연해 보여도, 결국 상황이나 조건이 변화될 때 꿈틀대며 올라오는 자신의 민낯만을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려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 행복을 경험하려면 죽어지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진단의 결론입니다.
4
그러고 보니, 누가복음 14장 본문 28 ~ 32절까지 5절 사이에 두개의 짧은 비유가 들어있습니다. 첫번째는 망대를 세우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력이 과연 완공할 수 있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두번째는 전쟁을 하기 이전에 과연 내가 적과 싸워서 이길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볼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야 말로 어리석고, 심지어는 망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 수지분석을 잘해라. 자기 자신, 제 분수를 잘 파악해보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길을 좇는 ‘제자됨’을 결심한 무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며, 제자됨의 선행 조건 즉, 앞서 말한 제 부모와 형제, 자매와 같은 가족들이나,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는 그런 제자의 길을 따라올 준비가 되어 있겠느냐 ?라는 친절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제자됨의 선행조건을 자신을 살펴볼 것을 요구하는 이 비유의 말씀은 끝내 내 자신이 ‘제자가 될 수 없는, 밑천이 바닥난 상황’임을 정직하게 직면하게 합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 우리는 제자가 될 출발점에도 설 수가 없습니다 !!! 라고 고백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5
말씀의 기준, 조건을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예수를 따르기에도 불가능한 깨지고 상한 그릇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록, 비우고 비워도 여전히 채워지는 상한 본성을 발견하게 되고, 은혜를 채우 고 채우려 해도 여전히 비어있는 자신만 보게 되니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버려야할 것들이 가득찬 자신을 보게 되니 말입니다.
작고 연약한 육체이지만, 마음은 우주를 채워도 남음이 있을 만큼 큽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채워져 있는 탐욕과 집착을 비워내 보겠다는 시도는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큰 마음이니, 공허하고 비어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을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 우리 힘으로 이 허무의 속박과 강압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_렘 18:4
그런데 무너지고 깨어진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이런 우리를 위로합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하나님 백성으로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상하고 깨어져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깨어져 터진 그릇이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 그의 좋으신 뜻대로 다른 그릇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신다 !
누가 흙덩이를 빚어 그릇을 만들고, 누가 깨지고 터진 그릇을 다른 쓸 그릇으로 만들어냘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 그리 하십니다 ! 하나님 만이 그렇게 하십니다 !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만 당신 손에 들려있는 흙덩이들 (아담, 아다마)를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비워내실 수 있고,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
‘보시기에 좋은 대로 …’ 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셨던 그 말씀, 히브리어 ‘토브’와 같은 말입니다. ‘토브’는 ‘선하다, 좋다’는 뜻과 함께 ‘유익하다 이익이 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 보시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도 ‘유익’ 하도록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6
그릇을 빚어가는 것도, 온전하게 만드는 것도 토기장이의 몫입니다 !
자신을 의지하고, 기대어,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우리 !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워낼 수 없어, 다른 것을 채울 수 없는 우리 ! 모두를 버리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손에 두시고, 손수 빚어가시는 ‘주인’이십니다 !
그러니 그가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들어주시지 않아도, 사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가 거부하셔도 따져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있지 않으면 갈 곳이 없고, 그의 손이 아니면 살 수가 없기에, 그의 손 만이 깨지고 상하고 터진 그릇을 회복시킬 수 있으시기에, 우리는 주님만 찾습니다.
다시금 돌아가봅시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 본성을 떨쳐낼 수 있을까요 ? 소유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가족과 같은 안정감의 근거를 버려낼 수 있을까요 ? 우리는 본성상 우리는 결코 자신의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을 제 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수 많은 자살의 방법중에 아무리 힘이 장사라고 해도 제손으로 제 목을 졸라 질식사할 수 없는 것도, 제 목숨을 붙들어내는 악다구니같은 본성 때분입니다. 그 결과가 아무리 좋은 말이고, 설득력이 있어 공감이 된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는 전혀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것’이기 때문이고, ‘내’가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부자청년은 잘 먹고 잘사는 문제도 아니고 영생을 얻고 구원받겠다는 고귀한 가치를 붙들고 씨름하면서도, 네 재물 모두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에 실족하지 않았습니까 ?
하지만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그만 못했을 것 같은 ‘삭개오’는 자신에게 있던 것을 다 버렸습니다.
내 것을, 내가 버려야한다고 생각되니 부자 청년은 떠나갔습니다. 삭개오는 남의 것으로 채워진 것이니 다 버렸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도적이 아니고서는, 남의 것을 가지고 놓지 못하겠다! 포기하지 못하겠다! 갖고야 말겠다! 할 사람은 없습니다. 남의 것을 놓고, 버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해 봐야합니다. 과연 우리가 버려야할 것은 모두 ‘누구의 것입니까 ?’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창조 신앙의 고백이 경험되지 않고는, 우리는 버리지도, 비워낼 수도 없습니다.
7
이처럼 불가능할 것만 같은 ‘버림’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서신서 빌레몬서에서 만나게 됩니다. 무려 세명입니다.바울, 오네시모, 빌레몬 세명입니다. 바울은 사울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사도이며, 빌레몬은 바울을 따르던 성도였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속한 노예입니다.
사실 이들 세명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터진 흙덩이처럼 깨어지고 상했던 사람들입니다.바울은, 예수믿는 자와 벽을 세우고 박해하던, 자신이 믿는 바가 진리라는 자기 확신을 목숨처럼 붙들고 살던 목이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레몬은 당시 소유물처럼 노예를 소유하고, 도망친 노예 쯤 임의로 처분함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의 부자입니다.
오네시모는 제 목숨 하나만 바라보고 도망쳤던 오네시모가 사도의 말을 따라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에서 보게 되는 그들의 면면은 모두 새롭기만 합니다.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의 자긍심 충만하던 바울, 그가 도망친 노예를 내 마음과 같은 자(형제)라 부릅니다 _몬 1:12
살겠다고 도망쳤던 오네시모는 사도의 말을 따라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도리어 목숨을 버린 셈입니다.
빌레몬은 사도의 말을 따라 언제든 처분해도 무방한 소유인 노예, 도망쳣던 그를 형제처럼 대합니다.
목숨처럼 붙들고 살아가던 모든 안정감과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주인되심을 경험하였을 때에만 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버림이 먼저가 아니라, 채움이 먼저입니다 !
8
창세기 12장에는 열국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 하나님의 구원의 무대에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11장 말미, 안정감으로 상징되어지는 모든 소유를 버려두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그에게,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풍성한 자손을 허락하고,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버리고 미워하라고 하셨던 것을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첫 무대에 오른 아브라함에게 ‘복’으로 주신 셈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자신을 세상을 향한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바라크’입니다.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릎은 주인앞에서 종이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복’인 것’입니다.
깨어진 곳이 있다면, 먼저 메꿔져야만 하고, 비어있는 곳은 채워지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비워내려면 다른 것을 채워야만 가능합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순서가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도 먼저 버리지 않았습니까 ? 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버림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예수의 제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소유하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미워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이끄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채우시는 은혜를 맛보아야만 합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할 때, 그분이 주인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뺄 수 있고,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9
성경은 우리에게 ‘기준’을 제시합니다. 누가 주인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참된 복인지의 가름선을 보여줍니다. ‘좋다’ 여겨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토브’야 말로 내게 유익이 됨을 가르쳐주십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듣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주권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것을 빼앗긴다거나 박탈당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인이 되실 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버리기 수월해 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내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안에서 터지면 괜찮습니다! 주님은 능하시므로,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터지고 깨져, 쓸모 없고, 버려져야하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면 망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시고, 주님앞에서 기도하시고, 주님안에서 발견되어서, 주의 손이 빚어가시고 회복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살아가야만 합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무나 익숙하게 자주 들어온 말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또 인생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변하지 않으니 복음이 필요한 겁니다. 깨어져 아무것도 채울 수 없기에 주님의 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하여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이므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깨어진 한덩어리의 흙같은 당신의 인생에 복음을 담아 세상을 구하고 회복시키는 귀한 그릇으로 빚으실 줄 믿습니다. 깨어진 그릇에 주님의 은혜는 채워집니다. 은혜는 깨어진 그릇을 채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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