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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1 성령강림후 1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8. 31. 10:36
성서일과
- 예레미야 2:4~13
- 시편 81:1, 10~16
- 히브리서 13:1~8, 15~16
- 누가복음 14:1, 7~14 ( 본문 )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Tg2B7vjdCJJSY56eyz8cKUlLNFpgIkY5/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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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를 향하는 시선, 낮은 자리를 향하는 마음"
1
세상의 모든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연히 생겨났다가 우연히 시들어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음은,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목적에 의해 지음을 받았으니 먼지 하나, 발에 채이는 돌부리 하나, 이름없이 피었다가 지는 들꽃 한송이 조차도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것처럼, 그 삶의 결이 어떠한지에 여부와 관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주님의 은총의 빛안에 있어야 할 자리가 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자리에, 환자는 치료를 받을 병원에, 군인은 주어진 수호지역을 지키며 있어야만 합니다. 저마다 주어진 자리,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게 되면, 공동체나 개인의 운명과 삶은 망가지고 일그러지고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평안’을 맛보고,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영생’의 복을 누리는 이들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는 모든 삶의 멍울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이름 안에서 참된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함으로, 또한 성령안에서 기도할 때에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말씀듣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주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성경은 인간편에서의 어떤 가치와 목적에 주목할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만을 소개하고 경험하도록 권면하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빵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은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안에서 성취되고 입증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 되어, 생의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의 세상을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런 이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식사의 자리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먹기를 탐하는 자’라며 조롱할 정도였습니다 (누가복음 7:34)오늘도 주님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 떡을 잡수러 방문하셨고, 그곳에서 혼인 잔치, 먹고 마시는 자리의 이야기를 건네고 계십니다.
3
본문의 구조는 얼핏 보기에 대단히 단순해 보이고, 쉽게 읽혀집니다. 주제도 비교적 명확해 보입니다.
(잔치에서)남들에게 인정받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은 낭패를 당하고’, 도리어 스스로를 ‘겸손히 여기는 자는 높임을 받게 된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부인할 수 없는 유익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도덕과 윤리의 금언을 전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가의 복음서나, 또 그 안에 담긴, 예수의 말씀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렇다고 나보다 못한 사람, 연약하고, 가난하고, 불편한 이들을 섬겨주라 복지를 행하고 인간애를 실천하라는 차원의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공자나, 석가, 윤리나, 철학의 편을 찾는 것이 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피상적인 것들보다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말을 건냅니다.
사실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서 낮아지는 자리나, 높아지는 자리나 별 수 없이 서로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높은 자리에 서려는 마음을 가지지 마라! 거나, 혹은 그러겠노라고 다짐을 하여도 그런 자리에 대한 미련은 쉽게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남들보다 낮은 자리를 찾았다고 해도,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이내 불편하기만 합니다. 속 마음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혹은 ‘곧 상황이 바뀌고 사람들이 알아주어 내 자리가 높아질 것’이라는 억울함과 기대감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는 우리는 결코 평안해 질 수 없습니다.
4
누가의 귀에는 높은 곳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향해 ‘도리어 가난한 사람, 몸 불편한 사람, 저는 사람, 맹인들을 잔치에 초대하라’시는 예수의 말씀이 매우 특별하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언급하셨던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내심 ‘없어도 좋을 사람’ 혹은 ‘차라리 없는게 좋은 사람’으로 여기곤 합니다. 자기 자신을 남들보다 크게 보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여전히 높은 자리, 낮은 자리만 보일 뿐, 이런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말하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눈,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보면,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혀지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중요한 착안점은 ‘잔치의 자리’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두 다 청함을 받은 이들 뿐입니다. 그들이 자격이 있다거나, 능력이 있다는 식의 조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아닌(* 높고 낮음은 모두가 상대적인 가치일 뿐입니다), 모두를 잔치에 초대하는 청하는 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있기에 모두가 다 함께 기쁜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잔치에 초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잔치의 기쁨도, 우리가 청함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기뻐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하신 하나님을 놓치는 순간,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 그보다 낮은 자리에 앉은 ‘나’만이 눈에 보이 때문입니다. 그 찰라의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를 잔치에서 소외시켜 버리고 말게 됩니다.
두번째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가치의 전도’입니다.
이후에 등장할 누가복음 19장 말씀에 보면 또 다른 먹고 마시는 장소에 계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세리장 삭개오와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과 잔치자리의 시작은 삭개오를 보고 어서 내려오라면서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하신 (눅19:5b)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교회나 다른 경배의 장소에 모셔두기를 좋아합니다. 마음이 내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그곳을 찾아가서 만나 뵐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집으로 가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응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집에 모시는 것은 사실 여간 꺼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집’에 모시면 그는 반드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의 핵심은 회심한 삭개오가 아닙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시고,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께서 죄인인 삭개오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낯선 이들을 위해 삶의 한 부분을 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늘 나보다 높은 곳만을 바라보던 우리 시선에서 소외되었던,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저는 자들과 맹인들이 낯설은 이들입니다. 주님 자신이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향해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도 그렇게 세상에서 낯설은 이들이었습니다.
5
나보다 높은 곳만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이런 가치를 끌어안고 살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낯선 이들을 향해, 없어도 좋게 여기던 이들을 귀히 보는 눈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 그들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눈을 가질 수는 있을까요 ? 이런 것들이 선행을 베풀고, 잠언이나 교훈을 익힘으로 가능할까요 ?
뻔한 답처럼 들리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길이고 답입니다. 소유와 업적이 아닌 관계에 몰두할 때, 비로서 우리는 낯선 이들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깨지고 상한 자리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눈이 익어져갈 수록, 억울하고, 안타깝고, 답답하고, 실패같은 인생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를 경험하게되고, 비로서 우리 영혼은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세상의 논리’를 따를 때가 많습니다. 어쩌다가 높은 자리를 얻게 되면 흡족해 하고, 그걸 얻지 못하면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자책합니다. 때로는 신앙을 이용해서 높은 자리를 취하려고도 합니다. 물신주의 성공주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지만 애를 쓰고, 몸부림 치면서 이런 방식으로 높은 자리로 자신을 끌어올려낸다고 거룩해지고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무언가 남들과 다른, 남들보다 더한 것을 성취해 내니 흡족하더라’ 생각하실 분도 있습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느냐 ?’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밥 세끼 먹고, 그렇게 살지 않아도 밥 세끼 먹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를 발견하고 만나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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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14절을 유의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듣기에는 좋으나, 쉽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실제의 삶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나은 사람곁을 찾고, 그렇지 않아 내가 도와야할 사람이 있어도, 갚을 능력이 있고, 갚을 것이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려 합니다. 갚을 능력이 없거나 그저 도움만 구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 마음은 거북하고, 그래서 싸늘하고 냉정하게 식어집니다. 보상할 능력이 없는 ‘민폐’를 끼치는 이들에 대한 불편함이 일어납니다. 이런 마음과 사고를 깨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본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이들을 돌보고, 베풀라고 하십니다. 거져 내것을 베풀어야하니 부담이 되고, 마음이 편치 않은 얄팍한 우리에게, 주님은 이런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베풂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님이 제시하는 차원은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릅니다. ‘
의인들의 부활’의 때에 갚아주실 것이다 !
무슨 말입니까 ?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입니다. 또한 ‘의인들의 부활’이라는 시점은 종말의 때를 말합니다. 결국 낯선 이들을 향한 선행에 대한 참된 보상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눈앞에 보이는 지금이 아닌, 종말의 때에 얻게 될 보상에 기대가 되십니까 ?
사실 세상의 보상이라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잡힐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늘 허무하고 늘 절망합니다. 깨어진 세상이기에 그렇습니다. 불의와 불법함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만듭니다. 선한 걸음의 열매는 하나님만이 거두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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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살아갈 것에 대한 시선을,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봄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의 삶이란,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기에 기쁠 수 있고, 소망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야기해주는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 그런것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종말의 날도, 하나님의 갚으심도, 그리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세상은 효율성을 추구하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신주의와 성공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유익을 얻어내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삼습니다. 이런 것을 ‘가성비’라고 말합니다. 같은 값이면 싼것을 찾고, 같은 값이면 내게 도움이 되거나 보상할 수 있는 이를 돕는 것이 ‘선’이고 똑똑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뜻의 ‘가심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의 기업들은 ‘이익’을 많이 내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기업들은 가성비보다 가심비를 어떻게 높일 것인지를 기업의 사활이 걸려있다고들 말합니다. 가심비라는 말은 가격대비 마음을 움직이는 정도를 말합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당장 적자가 나와도 괜찮습니다. 소비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가 여부가 성공하는 것이라는 셈입니다. 이전의 경제 가치관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를 추구하는 기업이 일류기업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리고 성도의 삶과 가치관은 이와 달리 거꾸로 가고만 있습니다.
교회시설을 바꾸고 치장하고, 시스템과 일을 만들고, 사람들이 몰려 오도록 애를 씁니다. 사람들의 영혼과 삶이 아닌, 출석률이 몇 프로인지, 어떻게 해야 헌금을 많이 걷을 수 있는지만 목적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죽고 예수로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것인가?의 목적은 잃어버리고, 적당히 헌금하고, 적당히 신앙생활함으로 어떻게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인가?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가성비에 몰두하게 되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죽어야 할 실존에 대한 집착’입니다. 업적이 중요하고, 결과가 중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집착하면 결국은 허무의 깊이만 깊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겠다는 열정은, 그 만큼 깊은 허무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 살아있음을 확인받고자 하는 모든 것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 삶에서 죽음을 직면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오늘로 끌어당기며, 그렇게 죽음을 확인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죽어야만 다시 삽니다. 일상에서 살기위해 그렇게 집착하던 것에서 죽을 때, 그때야 비로서 하나님만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죽음’앞에서는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외에, 세상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상을 얼마나 받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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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예레미야서는 하나님 백성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집중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남들보다 더 나은 어떤 지위나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선택되는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비었기에 힘들고, 터지고, 상하고, 공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어, 성공하지 못해서, 남들보다 높아지지 못해서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은, 주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서 죽는 겁니다 주의 은혜가 흐르는 곳에서, 주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곳에서, 낯설음의 자리로 내몰리는 이들이 살아나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녀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아닌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말라버린 샘이며, 터진 웅덩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곳, 은혜가 상실된 삶, 주님이 주인 되지 못하는 삶은 공허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허무해지고, 자꾸만 갈하고, 비참하고 아프고 상처받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난 사람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을 확증하는 예식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세례는 매일의 예배와 성찬을 통해 반복되어집니다. 예배와 성찬은 ‘죽음’대한 기억이며 ‘생명’과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에 조건이 없으셨던 주님, 그래서 누구라도 평등한 주님의 식탁앞에서 우리는 비로서 높은 자리, 낮은 자리로 구분하는 세속의 판단에서,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땅에서, 얼마나 큰 보상을 받을 것인가하는 조급함으로부터 해방되어, 날마다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실제의 삶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이 생명이시고,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은혜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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