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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5 성령강림후 1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9. 12. 23:08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4:11~12, 22 ~ 28
2독서 | 디모데전서 1:12~17
3독서 | 누가복음 15:1 ~ 10
응송 | 시편 14
설교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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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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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임스타소, The Lost Drachma )
‘그 까짓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입니다
1
오늘 성서일과 본문으로 주어진 말씀들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원어적으로 ‘회개’라는 말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속에서 ‘회개’를 접할 때 마다, 어린 시절의 그 날? 이 떠오릅니다. 깨어지고, 상하고, 잃어버린 곳에서, 있어야 할 곳,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그래서 더욱 반갑고, 고마운 마음만 드는데, 여러분은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요 ? 많은 분들이 ‘회개’를 무겁고, 힘든 자기 극복의 종교적 언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의 복,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때와, ‘죄’나 ‘회개’를 대할 때 반응하는 여러분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계십니다. 그런데 가까이에 몰려든 사람들은 모두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물론 군중속에는 그들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표정도 밝지 않고, 퉁명스럽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_2b
그들에게 세리나 죄인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부정하고 불결합니다. 이런 부류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그렇게 그들 곁에 둘러쌓여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예수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실망스럽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예수란 이는 부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불퉁거리며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그들을 보신 주님은 ‘이리 가까이 오라’고, 이 기쁨의 자리에 나아와 ‘기뻐해주라’며 부르시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내 움직일 생각조차 못할 만큼 굳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첫번째는 잃은 양에 관한 말씀이고, 두번째의 것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이가 한 마리를 잃었는데, 그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열 닢의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아 애를 쓰다가 마침내 찾아내고서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회개’라는 주제와는 무언가 선뜻 이어지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던가, ‘하늘의 축제’ 이런 말들이 훨씬 자연스러워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향해 치닿던 걸음을 멈추고, 뉘우치고, 용서받는 것, 혹은 그런 종교적 행위나 제의를 ‘회개’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떠올리는 입장에서 보면, ‘잃어버린 양’ 한마리나, ‘잃어버린 한 닢의 드라크마’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잃어버린 상황을 자초한 것도 아닐 뿐더러, 그것들이 뉘우치고, 주인에게 돌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회개’는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대체, 이 말씀속에서 주님이 가르쳐주고 계시는 ‘회개’란 무엇입니까 ?
2
우리는 이미 앞선 누가복음 14장의 말씀을 몇주에 걸쳐 함께 나누어 왔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눈 말씀이 그 결론에 해당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 예수를 따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함은 내가 결단한다거나, 내가 자격이 있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깨어진 그릇을 채우고, 온전히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 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 변하고, 삶이 새로워지는 구원의 경험은 하늘의 은혜를 맛보는 사람들, 하나님이 구원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일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잇대어 있는 사람, 비록 이 땅에서 깨어져있어도 하늘에 잇대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이들이 ‘성도’라고 정리했었습니다.
그분이 전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그 은혜 말고는 다른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천대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이었고, 지난주 말씀대로라면 분명 깨어지고 상하고 터진 그릇들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갈 곳도, 소망도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사람대접 받을 만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은혜만 구하며 주께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쟁취하고 쌓아가는 종교적인 활동도 아니고, 거룩해 보이는 무엇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사랑에 굶주린 연약하고 깨어진 이들의 몸부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시는 분, 이들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십니다.
14장의 내용을 터잡아, 다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잃은 양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 두 이야기의 핵심은 양이나 드라크마가 아닙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힘들고 어렵고, 이제는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 애를 쓰는 것 보다는 포기하는 것이 더 득이 될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잃은 것을 포기할 수 없어, 끝까지 찾아내고자 하는 주인에 의해서, 반드시 발견되었다 ! 마침내 주인이 찾아내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이 말씀은 ‘회개’에 대한 전혀 다른 가치와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보던 ‘회개’와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회개’ 는 결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우리는 ‘회개’를 이렇게 정의내려야할 것 같습니다. 회개란, 무언가 종교적으로 거룩해지고, 습관을 바꾸고, 죄를 떨쳐내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여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으시는 주님에 의해 발견되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셨던 바로 그 사람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애쓰던 것을 찾으면 기쁜 법입니다. 그 수고하던 고통과 아픔은 모두 잊혀질 만큼 찾아낸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찾으러 오셨던 주님은 오늘, 그런 죄인들을 발견해내셨고, 그러니 그들과 함께 기쁨의 식탁에 앉으실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3
어렸을 적에 장이 설때 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장에가면 무언가 얻어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먹을 것을 얻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온갖 신기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보지 못했던 온갖 진기한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약장사 아저씨들이 펼치는 공연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재미난 장터 나들이가 있던 어느 날입니다. 그때가 다섯 살 즈음으로 기억됩니다. 어머니가 사주신 소라 뒤꽁무니를 빨아먹으면서 어머니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오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내 손을 붙들고 계시던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버스에 올랐고, 막 차가 출발하려고 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버렸습니다. 짐짓 무심결에 손을 따라 올려다 보았는데, 제가 붙들고 있던 그 손이 어머니의 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안내양 누나가 왜? 그러느냐고 다독였지만, 너무나 당황해서 말은 못하고 울음만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버스 창 밖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좇아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시는 어머니 모습이 눈에 보였습니다. ‘엄마~!’ 소리를 쳤고, 안내양 누나가 버스를 세워주어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만약 어머니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니 그때 만약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좇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제 인생은 참으로 많이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물론 돌아오면 야단도 맞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어머니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이 될 뻔했던 그 날 ! 어머니는, 평상시는 그렇게 사달라고 노래를 불러도 들은 척도 않하시더니, 돌아오는 길에 자장면을 사주셨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엄마를 찾아 기뻤던 나 만큼이나, 어머니도 좋으셨던 거구나. 어머니가 나를 참 사랑하시는구나. 어머니에게 내가 소중한 아들이구나.
사랑하기에 잃은 것을 찾아 애태우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그 자장면을 통해, 그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4
그 만큼 예수님께는 기쁜 자리였는데, 이 잔치의 자리를 불퉁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저런 것들과 함께 하다니 …’ 그들은 잃은 것을 찾아낸 주님의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랑해보지 않았고,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은, 그들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빈다. 주님의 눈에 더욱 안쓰럽고 불행한 자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_7
‘회개할 필요가 없다’ !!! 는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 주님께 인정받았으니 대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되십니까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회개할 것이 없이 완전하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회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고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찾으시는 이에게 발견되어지고, 찾아내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라는 고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찾으시는 이에 의해여 이루어진 이 기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해지고, 스스로의 수고함으로 구원을 얻고, 인정받으려 합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동전은 주인이 찾아내야만 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정작 그들은 애타게 찾아 헤매이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회개하고, 내가 구원받고,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 발견되고, 찾아내시고야 마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으로만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 발견되어야만 삽니다 ! 그 은혜를 힘입어야만 깨어진 곳이 회복되고, 하늘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서신서 말씀인 디모데전서 1:12~17에서 바울은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_13 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이후에, 내가 이 만큼 잘났다거나, 내가 이 만큼 이루어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나는 예수를 얻고 다 잃었다 나는 예수 생명을 얻고 다 버렸다라고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끝까지 발견하고 찾아내시고야 마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과분하고, 고맙고, 감사할 뿐 입니다. 외딴 곳에 버려지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잃은 양이나 드라크마 같은 우리를 반드시 찾아내어 주신 주님의 기쁨이 되었으니, 나를 드러낼 여지가 없습니다.
5
‘소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맡기신 ‘사명’으로 이해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명(vocation)을 뜻하는 라틴어 어원은 ‘목소리’(voice)라고 합니다. 그러니 소명은 내가 추구하고, 이루고, 달성해내야하는 어떤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내야만 하는 목소리인 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외침, 주님의 속삭임을 들어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이라고 불리는 소명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직업, 천직’을 하나님이 불러내신 자리라고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 울리는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이고, 들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게 되면,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어느새 주님의 음성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누림을 상실하고도 그것을 잃은 줄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니 마음이 공허해지고, 스산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자신과 소외되고, 주님과의 사이를 벌여놓고 마는 거리감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잃은 자들을 발견해내어 기뻐하시는 주님의 기쁨을 귀히 볼 수 없고, 그 기쁨에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은 ‘정말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99개중의 한개 일뿐, 10닢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그까짓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찾은 이가 그토록 기뻐하시는 가치를 맛볼 수 없습니다. 그 감동의 가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구약성경 1독서 예레미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심판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심판’은 하나님과 소외되고, 하나님의 기쁨과 잔치에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살아가는 삶을 실존적으로 직면하는 자리입니다. 뜨거운 바람처럼 그들에게 임할 심판은 그 소외와 단절을 메꾸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회개’로의 촉구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것은 잃은 것을 찾고 계시는, 찾아내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맛보며 사는 것을, 주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것으로 바꾸고, 소유하고, 이루는 일들에 내몰려 살아가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나, 그의 찾아내시는 기쁨은 어느새 ‘그까짓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에서 ‘소외’되고 말았습니다.
6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나뉘고 깨어진 사람들이 화해와 일치하는 평화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천사들이 기뻐할 만큼 소중한 일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이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로 삶을 정하여, 그렇게 찾으시던 주님의 눈에 서려지는 그 한 사람이 주님께는 모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찾고, 찾아, 반드시 발견해 내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런 답도, 아무런 소망도 없는 절망의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으십니까 ?
주님은 ‘그 까짓 것’ 이라 말하는 세상을 가로지르며,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시고, 건져내십니다.
그의 부드럽고, 넓은 품에 안기십시오. 주님은 당신으로 인해 기뻐 춤을 추고 계십니다.
당신은 세상이 조롱하는 ‘그 까짓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던, 그리고 마침내 찾아내신 주님의 ‘모든 것’입니다.
'회개'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실은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왜? 무엇이? 돌아오도록 해주었습니까 ?
그가 '나'를 찾아내어주셨기에! 나는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은 '반드시' ! 찾아내십니다. 나를 ! 당신을 ! 우리 모두를 ! 그의 '모든 것'을 찾아내시고야 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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